이른바 진보세력은 상황이 뜻대로 전개되지 않으면 서슴없이 핵심을 비틀고 프레임을 바꾸는 기민성을 발휘한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발탁한 KBS 김의철 사장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현재 전기요금과 묶어서 징수하고 있는 수신료를 분리 징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가 있자마자 김 사장은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내 때문이라면 (분리징수를 거두어 드리면) 사퇴 하겠다’면서 윤석열 대통령과의 면담도 제안했다. 대통령에게 ‘KBS의 미래와 발전 방향을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8일의 김의철 사장 기자회견 내용은 이른바 진보 세력다운 프레임 바꾸기와 핵심 비틀기의 전형적인 사례다. 첫째 정부가 추진하는 수신료 분리 징수는 KBS의 현 경영진 거취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책적 선택이다. 이를 정권이 바뀌어서 그런 것이라면 내가 사퇴하겠다는 정쟁 요소로 비틀어 버린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또 KBS 미래와 발전 방향을 전달할 목적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으나 대통령 면담을 요청한 것도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보기에 따라서는 오만함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KBS 사장이 정부에 정책 건의를 하려면 공식적 창구가 있고 절차가 있다.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대통령과 직접 만나서 전달하겠다는 것은, 비록 ‘공영방송’이라 하더라도 방송사 사장과 대통령을 동격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장의 격을 높인 것이 아니라면 대통령을 깎아내린 것과 다르지 않다. 시청료 분리징수 문제를 순식간에 엉뚱한 곳으로 옮겨버린, 프레임 바꾸기 전술이 놀라울 뿐이다.
시청료를 석 달 만 연체하면 전기공급을 끊어버리는 것이 지금의 제도다. 수신료 제도가 도입된 것은 1963년, 전기료와 통합징수는 1994년부터다. 연간 약 6천 2백억 원이나 되는 이를 분리 징수할 경우 1천억 원대로 급감할 것이며 따라서 공영방송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돈 계산 만 의 문제라면 이 주장이 맞다. 그러나 현재 KBS 인력의 거의 50%가 억대 연봉자이며 그 가운데 30%는 보직도 없다고 알려져 있다. 무보직은 정해진 일이 없다는 뜻임을 생각할 때 전기료와 시청료를 묶어서 강제 징수당하는 소비자(국민)가 지금처럼 가만히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97% 이상이 시청료 강제징수에 반대한 자체를 KBS는 정확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또 ‘전임 정권에서 임명한 내가 문제라면……’운운 역시 과녁에서 벗어났다. ’전 정권 임명자’를 쫓아내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총동원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며 그 정권은 물러나면서 ‘알박기’로 윤석열 정권에 몽니를 부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돈을 거두어 쓰는 쪽이 아니라 돈을 내는 쪽 입장을 살펴야 한다는 상식을 회복하자는 것이 정부의 시청료 정책이라는 점이다. 어떤 경우든 시장은 공급자가 아니라 수요자(소비자)가 우선일 때 비로소 발전의 탄력이 생긴다.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그 터전을 튼튼히 하려고 상식을 잠시 뒤로 밀어놓고 강제징수를 해 왔으나 이제는 바로 잡을 때가 왔다고 판단한 것일 뿐, 사장의 거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른바 ‘공영방송’이 이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공영방송의 선구자로 대접을 받아 온 영국의 BBC는 2027년이면 수신료를 완전폐지할 예정이며 프랑스 역시 수신료를 없애고 국가가 부담한다는 계획이다. 이웃 일본 NHK 역시 수신료 인하를 검토한다는 움직임이 다. 각국의 이러한 변화는 TV를 비롯한 ‘영상공급’이 방송사 독점물이 아닐 정도로 세상이 변했음을 말해 준다. 우리 경우, 이동통신 3사와 각 지역 케이블 TV가 공중파 프로그램을 유료로 서비스하고 있고 OTT(영상 스트리밍)로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보는 세상이다.
KBS가 억대연봉자를, 그것도 무보직으로 거느리고 싶다면 전 국민을 상대로 시청료를 통합징수 할 것이 아니라 이동통신사, 지역 케이블 TV 등을 상대로 징수하면 된다. 소비자가 이동통신사에 TV 관련 요금을 따로 내는 데 시청료를 징수하는 것은 이중과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KBS는 우선 대통령과 동격으로 놀겠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 사태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정권부터 누려온 특권도 내려놓고 방송과 언론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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