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NEC)는 헌법 기괸이 맞다. 의전 서열상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우리나라 5부 요인의 한사람이다.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과 같은 반열이다. 선관위를 이처럼 ‘받들어 모시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인 ‘선거’를 중립적 입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투명하게 관리하라는 헌법적 배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앙선관위는 단지 선거만을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다. 헌법과 관련법(정당법 등)에 따라 정당과 정치자금도 관리한다. 신성한 국민의 주권행사인 투개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 일반의 기본적인 사항을 총괄하는 곳이 선거관리위원회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유형무형의 압박과 압력을 받지 않을 근본적인 제도적 보장이 바로 ‘헌법 기관’이라는 위상이다. 따라서 중앙선관위는 이러한 국민적 기대와 헌법적 지위에 부응할 도덕적 투명성 확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양심을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과 수양이 필요한 것처럼 선관위는 다른 어떤 헌법 기관보다 더 강도 높게 뼈를 깎아야 한다는 뜻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60년전인 1963년(1월 21일)이다. 5⁃16 쿠데타의 명분을 제공한 자유당 정부의 정⁃부통령 부정 선거와 그 이전의 국회의원 선거때는 중앙선관위가 없었다. 박정희 정부가 새로 만든 국가 기관의 하나가 바로 선관위다. 그 이전의 선거에서는 집권당인 자유당이 유리하도록 각종 부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개표 과정에서 손가락에 인주를 묻려 상대방 후보표를 훼손, 무효표로 만드는 이른바 ‘피아노 표’, 개표장에 갑작스러운 정전(당시는 절대 전력이 부족했다)으로 인한 올빼미 개표, 투표함 바꿔치기, 여촌야도(與村野都: 여당은 시골, 야당은 도시)를 확인하기 위해 시골 유권자를 사전에 세 사람, 다섯 사람씩 조를 짠 3인조 5인조 투표라는 술수까지 활개를 쳤다. 이를 막으려고 민정 이양을 계기로 만든 것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다. 86세대 논리를 빌리면 박정희의 잔재이며 군사 쿠데타의 산물이지만 중앙선관위 출범 이후로는 부정선거라는 말이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황교안 전 총리를 비롯한 ‘태극기 부대’ 일각에서 부정선거론을 내세웠으나 국민적 반향은 없었다.
그렇던 중앙선관위가 이상해진 것은 문재인 정권 시절인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소쿠리 투표’가 등장하면서다. 아무리 코로나 펜데믹 상황이라 하더라도 사전투표를 소쿠리로 관리한 것은, 비록 일부 지역이라 하더라도 하늘을 우러러볼 것도 없이 땅을 굽어보기조차 부끄러움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당시 중앙선관위 위원장의 태연함은 오히려 주권자인 국민이 쥐구멍을 찾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 뒤를 이은 지금의 선관위원장은 또 어떤가? 대법원장 승용차 꼬리를 물고 버스 전용차선을 달리다가 과태료 처분을 받은 이가 서열 5위의 중앙선관위장이다. 동시에 그는 대한민국 대법관이기도 하다.
국가정보원이 밝힌 선관위 전산망 보안 점검 결과는 한마디로 말해서 충격적이다. 일부 시스템의 비밀번호는 12345였다. 해커에게 뚫어달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거인 명부와 개표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 점검 결과이다. 작년 한 해만 하더라도 4만 건의 해킹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사전투표 여부를 조작한다면 한 사람이 두 번(사전과 본투표) 투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국정원은 해석한다. 공채라는 법정 형식으로 친지나 자신의 자녀를 특채한 채용 비리 척결과 함께 선관위의 환골탈태가 시급한 대목이다.
그런데도 노태악 선관위장은 ’과거 일(전임자 때의 일)이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지겠다‘면서도 당장 눈앞(내년 4월 10일)에 닥친 총선도 있음을 강조했다. 버스 전용차선을 꼬리물기로 이용한 것을 ’세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채용비를 비롯한 각종 의혹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헌법 기관임으로 받지 못하겠다고 버틴 수장이 무슨 낯으로 자유민주의 기간(基幹)을 좌우할 총선거를 관리하겠다고 나서는가? 정말 현 체제와 수준의 선관위가 내년 총선거를 관리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아니라 그 기관의 관리 아래 국민의 신임을 물어야 할 정치권이 내놓아야 한다. 당연히 여와 야의 정파적 입장을 떠나 엄정한 양심에 따라 답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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