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확대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확대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예상했던 대로 12년 만의 한일 정상회담 후유증은 서울에서만 폭발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에서는 입에 담지도 못할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아마도 사법 리스크로 쌓인 스트레스를 이차 판에 풀어보자는 계산이 크게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 완용’이니, ‘계묘 늑약’이니 하는 표현은 만든 이의 재치를 과시하는 데는 효용이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거나 비판하는 힘은 그다지 높다고 보기 어렵다. 제국 일본의 조선왕조 병합이나 그 이후의 항일 또는 친일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감성적 자극력에 방점을 찍은 ‘조어(造語)’이기 때문이다.

을사5적은 그들 개개인의 영화와 부귀를 위해 나라를 배반한 역적들이다. 그 조약 역시 그들이 살벌한 분위를 조성, 못난 국왕을 윽박지른 ‘깡패 짓’에 불과하다. 어디에도 국가나 민족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배려가 없다. 을사 늑약 보다 14년 앞선 1896년 못난 국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했을 때 이미 조선 왕국은 사라졌음을 그들은 물론 현재의 사학자나 법률가도 모르거나 일부러 눈을 감고 있다. 국가 주권이 국왕에게 있던 시대, 그 주권자가 신하를 거느리고 외국 공관으로 피신 한 것은 ‘망명’과 다르지 않다. 국왕이 망명한 순간 조선왕조는 사라진 것이다. 이를 아관파천으로 미화한 것 자체가 무능의 방증이다. 

그러고도 나라가 온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참으로 가여운 민족이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다’는 요지의 윤 대통령의 3⁃1절 경축사에 시비를 걸 이유가 없음에도 이를 일본에 대한 굴복이다, 면죄부를 준 것이다고 성토하는 것 자체가 1910년, 경술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특히 남한의 면적은 일본 열도의 4분의 1, 인구는 절반 수준. 국내총생산(GDP) 역시 거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한국에 추월당하고 있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일본 정서다. 그들 역시 한국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처럼 1910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일본 보수세력을 떠받치고 있는 극우파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한국에서는 진보 좌파세력이 시도 때도 없이 걸핏하면 ‘죽창가’를 부르고 나서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장기집권에 성공한 것 역시 극우파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각 책임제인 일본은 언제 국회가 해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줄타기 정치를 한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조직을 갖춘, 그것도 상명하복의 극우파를 무시할 수 없다. 

기시다 일본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김대중-오부치 수상의 과거 반성과 사과 담화’를 ‘역대 내각의 입장’이라고 뭉뚱그려서 존중한다고 끝까지 얼버무린 것 역시 극우파의 성토가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윤 대통령이 제시한 경제협력에도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본 경제 상황이 대외협력의 청사진을 내놓을 정도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일본의 경상수지는 적자로 돌아섰다. 당장은 과거에 벌어 놓은 대외순자산 덕분에 큰 탈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국인 일본의 상품 무역 역시 적자 구조가 정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인 경쟁이 날로 격심해지고 있는 디지털 분야에서는 아직도 ‘청동기 시대’나 다름이 없다. 강대국은 제조업에서 서비스 부문으로 변환한 지 오래인데도 ‘강대국 일본’은 여전히 제조국. 산업국이면서도 상품 수출에서 적자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

일본 국내서 조차 디지털 경제의 서비스 부문이 블루 오션이라면서도 투자에는 적극적이지 않다. 만약 일본이 옹졸한 나라가 아니라면 윤석열 대통령이 제시한 디지털 경제 부문의 협력을 환영, 마중물을 내놓아야 마땅하다. 그렇지 못한 배경에는 ‘일본은 강대국, 한국은 신흥국’이라는 우월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옹졸함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죽창가’부터 부르는 한국의 진보세력이나 오십보백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결단을 내린 용기에서나 비전을 제시한 미래를 보는 혜안에서나 한국이 완승했다. 극우파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 총리와 사법 리스크에 물을 타야 하는 한국 야당과 이에 동조하는 시민단체만이 이를 모르고 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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