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를 지나치게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상투를 잡는다’는 속담은 다분히 교훈적이다. 자손을 귀여워하되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 지금 우리 사회는 이 교훈이 실종된 탓에 꽃다운 나이의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교사는 학생에게 폭행을 당해 3주 진단을 받은 데다가 트라우마로 출근도 못 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참담한 꼴을 당하게 되었는가?

스승을 임금과 아버지처럼 공경하라는 이른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는 최소한의 미덕이었다. 국가 주권이 국민이 아니라 임금에게 있던 시대, 스승을 국가 주권(임금)과 가부장 사회의 핵심(아버지)의 반열에 올려놓고 공경한 것은 ‘내 자식이 사람 노릇 하도록 가르치고 다듬어주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 귀엽고 아까워서 그 아이를 가르치는 스승을 높이고 받드는 것이지 그 스승의 학문과 도덕성이 깊고 높아서가 아니다. 그 스승에게 호통을 치고 행패를 부린다면 훈육(訓育)은 설 곳이 없어진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은 자식 교육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학교, 그것도 초등학교를 찾아가 폭언을 퍼붓고 스스로 잘났다며 벼슬(!)을 자랑하면서 교사를 괴롭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아무리 잘해야 그 부모 복사판이 고작이다. 그래서 한 젊은 교사의 죽음 앞에 옷깃을 여미면서 분노하는 것이다.

교육현장이 이처럼 퇴락한 것은 진보 좌파세력에 점령당한 결과다. 전국 교육감 가운데 서울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진보 좌파다. 이들은 교사의 권리, 가르침의 숭고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어린 학생 인권에만 눈이 먼 사람들이다. 또 교사가 학부모와 학생들의 ‘먹잇감’이 된 것은 2010년 ‘학생인권 조례’가 제정되고 부터다. 이 조례로 인해 배우는 아이들의 인권은 하늘을 찌르는 반면, 가르치는 교사의 권위와 인권은 증발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교사들의 근무환경은 날로 열악해지는 데도 배우는, 철없는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전교조 조합원만 기세가 등등한 것이 현실이다. 어린 학생에게 두들겨 맞고 학부모로부터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욕설을 참고 들어야 하는 현실에서 교육이 제대로 발을 붙이고 뿌리를 내렸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교육부 장관이 앞장을 서서 교육환경, 교사 인권과 교권 보호에 나서고 있으나 오히려 이 틈새를 노려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집단의 발호부터 막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로 떠오름을 본다. 죽은 교사를 소재로 가짜뉴스를 확산시키는 유력 유튜버, 학생 인권조례로 문제의 씨앗을 키운 교육감과 전교조, 그리고 이들에게 동조하는 학부모가 시치미를 뚝 떼고 ‘교권 강화 운운’하고 나선 것은 위선이 아니라 오히려 코미디다.

실제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는 교육감의 애도 글과 ‘끼어드는 전교조’에 대한 비판이 줄을 잇고 있다. 고인이 된 교육 동지를 애도하는 것도 좋고 교권 강화도 당면 최대 과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누적된 악습이 하루아침에 씻겨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것 역시 사람의 몫이다. 먼저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잘났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부터 옷깃을 여며야 한다.

학부모가 학교와 교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내 자식이 끔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식이 금쪽이라면 남의 자식 역시 금쪽이며 20대 초반 교사 역시 금쪽같은 자식이다. 내 자식만 끔찍하게 여기는 학부모들은 ‘그렇게 키운 자식이 나중에 무엇이 될까’를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성년이 되어 직장인 되었을 때도 직장과 직장 상사를 찾아가서 내 자식 푸대접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인가? 내가 잘났다면 남도 내만큼 잘났음을 왜 모르는가?

제도 개선도 물론 중요하지만 앞에 제시한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답을 할 수 있을 때, 또 진솔하게 반성할 때 비로소 교육현장의 부조리가 청산될 것이다. 동시에 스승과 제자가 얽힌 콩가루 집안도 바로 잡힐 것이다. 이념과 진영논리, 극단적인 이기심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관련기사

저작권자 © 공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