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위상이 말이 안 될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개편하려는 미국이 이른바 ‘칩4동맹’을 앞세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내서 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결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나 심한지는 지난 2월 초 국회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전략기술 분야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구성한 ‘첨단산업전략특위’ 위원 선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무소속의 양향자 의원 대신 ‘검수완박법’ 처리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정략적으로’ 탈당, 무소속이 된 민형배 의원을 지명했다.
누가 보더라도 민형배 의원보다는 고졸 학력으로 삼성전자 임원까지 오른,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전략적으로 영입한 양향자 의원이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전략기술특위’의 적임자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당적으로 버리고 ‘중립적 입장’의 국회의장이 된 김진표 의장은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서 경제부총리까지 역임한 대표적 경제관료 출신인 김 의장이 양향자 의원의 졍력보다는 정략적 꼼수 탈당으로 검수완박법 처리를 도운 민형배 의원을 더 높이 평가한 결과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만으로 특위의 앞날을 예단할 필요는 없다. 김진표 의장이 소속되었던 더불어민주당은 애초부터 한국 반도체의 대명사처럼 된 삼성전자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내서 ‘국제급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도 삼성전자는 메모리 분야 시장점유율 1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그 1위가 지금 흔들리고 있음을 대통령은 알고 있는데 정계, 특히 입법부를 장악한 국회만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반도체는 기술적인 면에서는 미국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중국 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해 있다. 미국은 첨단 장비와 기술의 중국 수출(이전)을 강력하게 차단하면서 오는 10월로 유예기간이 끝나면 삼성과 SK하이닉스 중국 공장 생산도 크게 제약을 받게 된다. 현재 삼성 시안 공장이 생산하는 128단 낸드플레시와 SK 우시 공장의 10나노 중후반 낸드플레시가 대상이 될 수 있다. 각각 삼성과 SK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나 되는 이 두 제품이 규제 대상이 되면 두 회사가 받을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미국이 채찍만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바이든 정부가 책정한 3백 90억 달러(약 50조 5천억 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금 수혜 대상에 삼성과 SK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으로 10년간 중국에서의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 중국에 등을 돌리고 미국 정부의 당근(보조금)을 받느냐, 아니면 미국 대신에 중국 시장을 겨냥하여 생산 능력을 계속 확대해 가느냐의 기로에 있는 것이 한국 반도체의 현주소다. 그런데도 국내 정책 당국이나 국회는 이 어려운 상황을 돕겠다는 데는 아주 소극적이거나 시늉만 할 뿐이다.
이미 중국은 미국의 첨단 제조설비와 기술 이전 차단에 대응하여 지금은 이른바 30나노 전후의 레거시 제품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 대한 설비수출은 제한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새로 각광을 받는 파워 반도체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도 중국에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전력 흐름을 제어하는 파워 반도체는 전기자동차를 비롯하여 휴대전화 충전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배 송전망에도 잠재걱 수요를 상당한 규모로 보고 있다. 당장은 로직이나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설비나 기술 수준이 낮아 미국도 규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탄화규소(SiC)와 질화 가륨(GaN) 등 신소재 제품이 상용화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렇게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반도체 업계는 중대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업계에만 맡겨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거국적인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재벌 기업이 밉더라도 우선은 국제 경쟁에서 이겨놓고 따져도 늦지 않다. 따라서 김진표 국회의장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지도급 인사들은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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