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서 열린 G7 정상회담이 우리에게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게 한 것은 한일 양국 정상이 히로시마 원폭 (1945.8.6.) 한국 피폭자 위령비 공동 참배다. 이날 ‘10초 묵념’이 이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78년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세계 2차대전이 나치 독일을 핵으로 한 추축국의 항복으로 유럽 지역은 전쟁이 끝난 데 반해 일본이 완강하게 버티는 태평양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트루먼 미국의 단안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원폭 한 방으로는 효과가 없자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그제서야 일본은 하루만인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수용을 결정했다. 히로시마 원폭은 2차대전을 끝낸 결정타였던 동시에 첫 핵 피폭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못할, 또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가운데는 한국인이 5만 명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망자 3만 명, 생존자 2만 명(귀국자 1만 5천 명, 히로시마 잔류 5천 명)은, 그러나 일본이 벌인 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라 잃은 민초’일 뿐이다. 먹고 살기 위해, 저들의 강제 동원령으로 끌려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한 죄밖에 없는 서러운 백성들이다. 전쟁이 끝났어도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 없는, 점령군인 미군이 다스리는 일본에서는 ‘제3 국인’일 뿐이었다. 일본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제3 국인인 점을 이용하여 북한계의 재일조선인 총연맹(조총련)이 조직된 데 이어 한국계인 재일거류민단(민단)이 등장하여 한때 ‘격렬한 거리 투쟁’으로 일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센징 관념에 젖어 한국인을 멸시하던 그들에게 재일교포의 좌우 투쟁은 새로운 빌미를 제공하는 격이 되었다.
패전 일본은 1947년 이른바 맥아더 사령부가 주도한 ‘평화헌법’으로 재출발하면서도 전범 국가로서의 책임감이 아니라 인류사상 첫 원자탄 피폭 국가로 변신, ‘피해자 코스프레’를 들고 나왔다. 히로시마 피폭 터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피해자 위령탑을 세웠다. 공원 동서에 두 개의 평화기념 자료관도 만들었다. 한때는 한국인 피폭 사실도 전시했으나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념관은 ‘일본 국수주의 중심’으로 대폭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인 피폭자 위령탑은 지역 교민들(대부분이 피폭자)의 힘으로 1970년에 세워졌으나 평화공원이 아니라 그 건너편이었다. 위령탑까지 ‘국외자(局外者)’의 서러움을 겪었다. 이 서러움은 1999년 5월 마침내 공원 안으로 옮김으로써 조금은 풀 수 있었다. 두 나라 정부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히로시마 원폭 한국인 피해자는 식민지 시대에 강제로 끌려갔던 징용공과 종군 위안부를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한국인과 한국 정부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틈만 나면 죽창가를 외치는 진보 좌파조차 그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승만 초대를 제외하고 일본을 방문하지 않은 이가 없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도 히로시마는 찾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일본 오부치 수상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고 추앙받는 김대중 대통령,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던 김영삼 대통령, 독도를 찾아간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히로시마 원폭 피해 한국인은 잊혀진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2차대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렇던 그들에게 광복의 기쁨과 함께 영면과 안식을 안겨준 이가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대신이다. 지난번 방한한 기시다의 제안으로 이번 참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시다로 하여금 ‘실질적인 과거사 사과’인 공동 참배를 제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한 이는 바로 윤석열 대통령의 ’통 큰 대일 제스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법 리스크에 몰린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서는 ’망국 외교‘라고 장외투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78년 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공동 참배의 ‘10초간 묵념’을 통해 비로소 평안과 함께 안식을 찾았다. 기시다 총리의 실질적인 과거사 사과를 무시하고 장외투쟁에 나선 야권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대통령은 이쯤해서 옷깃을 여밀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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