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한국에 대해 반도체 부문 협력 강화를 요구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출구 찾기라는 일종의 ‘세기적 난제’를 안게 되었다. 재고 누적 속에 분기 결산서 적자가 두드러졌던 반도체 수요가 회복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동안 물밑에서 심각하게 제기된 문제점이 드디어 수면 위로 떠 오른 것이다. 지난 25~26일 미국 디트로이트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에서 중국 왕원타오 상무부장이 한국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에게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된 협력 요청은 비록 안덕근 통상본부장이 부정은 했더라도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중국은 이미 미국 마이크론을 자국 시장에서 퇴출했기 때문에 공급 부족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 사실상 한국이 메워달라는 뜻이다. 재고가 쌓여가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중국의 마이크론 추방은 미국의 화웨이 등 중국 업체 거래 차단에 대한 보복이다. 따라서 미국은 의회가 앞장서서 마이크론이 수출해 오던 물량을 한국업체가 메워주지 말도록 경고하고 나섰다. 이번 중국의 ‘협력 요청’은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이 입장을 분명하게 취하라는 압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40%를 중국 시안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중국 ‘요청’을 거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른바 인플레 감축법과 반도체법을 앞세워 강도를 높이고 있는 미국도 ‘넘사벽(넘기 어려운 벽)’이다. 정부가 두 법의 규제 범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라고 미국에 요청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으나 결과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를 중심으로 중국 등을 제외한 새로운 공급망 구축에  미국과 일본의 ‘밀착’이 심상하지 않음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점유율 2위 업체인 일본의 키옥시아(19.1%)와 4위 업체인 미국의 웨스턴디지털(16.1%)이 합병을 전제로 기업지분 분산비율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단계까지 접근할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물론 중국과 유럽연합(EU)이 반대할 것이 분명한 이상 실제로 합병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27일 새벽 (한국시간) 디트로이트에서 만난 미일 양국 통상장관이 반도체 분야 기술협력 강화 합의는 한국에 대한 보디 블로우로 볼 수 있다. 세계반도체 업체의 자국 투자를 앞장서서 독려한 미국이 이번엔 일본과 단독으로 기술협력 강화에 나선 것은 메모리 분야 최강국인 한국을 따돌리려는 계산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하여 최근 일본 정부가 한국 삼성을 비롯하여 미국, 유럽 대만 등의 반도체 기업 총수를 수상관저서 면담한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지난 2021년에 마련한 일본의 ‘반도체 디지털 산업전략’에 따라 총 2조 엔(약 21조 원)을 일본 투자 기업에 지원하기로 한 계획이 시동을 건 것이다. 삼성전자가 일본 수도권인 요코하마에 3천억 원을 투자, 반도체 개발거점 마련에 나선 것도 이 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는 중국 리스크 전면에 노출된 대만과 중국에 생산시설이 ‘편중’된 한국 대신에 미국에 이어 일본에 새로운 생산기지를 마련하겠다는 미국의 계산과 30년 전에 빼앗겼던 반도체 패권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일본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반도체 장비업체인 미국의 업라이트매트리얼즈(AMAT)가 연구개발거점을, 네덜란드의 ASLM도 기술거점을, 도쿄일렉트론은 연구개발 거점을 2024년까지 마련할 계획이며 작년엔 미국의 램리서치가 R&D 거점을, 올해는 미국 KLA가 기술연수거점을 경기 용인에 마련하는 등 한국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모두 삼성전자의 3천조 원 규모의 신규투자에 대비한 포석이다. 미국과 일본이 정책과 정략적으로 새로운 반도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어도 업계는 여전히 한국 반도체 역량을 중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세계적 장비업체의 기대가 여전히 커지고 있는 현재, 미국과 중국의 압박이 아무리 강도를 높이더라도 자체 기술력이 뒷받침된다면 이 난국을 어렵지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반도체는 기술력’이라는 자신감이 바로 한국 반도체의 경쟁력이며 미국 일본 중국의 압력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정부와 업계는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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