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와 모스크바 신문발행 협약서에 서명하는 필자와 고르비 재단이사장
고르바초프와 모스크바 신문발행 협약서에 서명하는 필자와 고르비 재단이사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최후의 대통령이 지난 달 30일 별세했다. 애칭 고르비로 불리는 그는 소련 연방을 해체하고 오늘의 러시아를 만든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다.

“공산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고 말해온 그는 정권을 잡게 되자 공산주의 해체와 함께 서방과 손을 잡고 개혁을 단행했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구권을 위성국가에서 놓아주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소수민족 국가들을 모두 독립시켰다. 연방을 해체한 것이 불만인 러시아 사람들은 고르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소련 남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85년 54세 때 소련 최고의 지도자인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평소의 소신인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는 개혁을 시작했다. 서방과의 화해를 시작해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핵무기 감축에 전격 합의하고 동서 해빙무드 조성에 앞장섰다. 그는 1990년 소련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소련의 첫 번 째이자 마지막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1년 뒤 군부내 강경파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뒤 고르비 재단을 설립하고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필자는 20년전인 2002년 그와 모스크바를 무대로 한 공동 사업을 도모했다. 

한국 최초의 대중 종합 일간지를 지향한 굿데이 신문을 창간한 직후였다. 모스크바의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우리 신문사 방문을 제의해 왔다. 굿데이 신문 회장 초청 형식으로 그가 서울의 신문사를 방문했다. 그는 언론 사업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특히 스포츠, 예술 등 대중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편집국을 둘러본 고르비는 굿데이 신문의 편집국과 제작 과정을 상세하게 돌아본 뒤에 우리 회사와 함께 모스크바에 대중 일간신문을 창간하자는 나의 제의를 적극 동의하고 즉석에서 협약서를 작성했다.

고르바초프는 신문 제작 과정을 돌아보면서 편집부 디자인 팀이 신문에 쓴 본인의 캐리캐쳐를 기념으로 주자, “여기 걸어 두십시오. 여기 두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텐데요” 하고 농을 던졌다.

“모스크바에는 컬러신문이 없어요. 대중 오락 신문도 없어요. 말하자면 러시아는 흑백만 있는 국가입니다. 컬러 윤전기가 없어요. 이렇게 화려하고 다양한 칼라 언론을 모스크바에서 펼쳐서 다양한 문화를 누리게 하고 싶습니다.”

고르비는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쇄 시설과 기술적인 문제는 굿데이에서 담당하고, 기자를 비롯한 인력은 고르비 재단에서 담당하기로 했다.

제작 방향은 스포츠, 연예 등 문화적인 뉴스를 주로 다루며 정치성은 배제하기로 했다. 

고르바초프가 한국에 온 것은 굿데이 신문 초청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생전 4차례나 방한했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깊다.

굿데이 편집국을 돌아보는 고르비 모습이 보도된 신문
굿데이 편집국을 돌아보는 고르비 모습이 보도된 신문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1년 4월19일 소련 지도자로서 처음 한국을 방문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반도 긴장 완화, 한·소 공식수교 후 관계 개선, 서울올림픽 과정에서 소련 역할론 등 다양한 의제가 다뤄졌다.

일본을 경유해 방한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우호관계에 있는 북한을 제치고 적대 관계였던 한국을 먼저 찾았다는 점에서 당시 파격적으로 평가됐다.

굿데이 신문은 그 뒤 필자의 손을 떠났고 고르바초프 재단 이사장도 이제 세상을 떠나  ‘모스크바 사업’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서울시 중구 정동의 굿데이 신문 편집국에서 활짝 웃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먼 남쪽 나라에서 명복을 빌 뿐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공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