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필자가 회장으로 있던 굿데이신문 행사에 참석한 최병렬(왼쪽) 한나라당 대표
2003년 필자가 회장으로 있던 굿데이신문 행사에 참석한 최병렬(왼쪽) 한나라당 대표

국민의힘 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대표였던 최병렬 씨가 타계했다. 최 대표는 나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고향이 같고 나이도 동갑이다. 같은 신문사 출신이고 직책도 편집부장과 편집국장을 지냈다.

전두환 정부가 탄생한 뒤에 신문사를 떠나 정계로 갔다. 전국구 국회의원 초년병 시절 대화 도중에 “국회의원 생활이 어떻습니까? 할 만 한가요?”했더니 “아이고 정치란 것 말도 마세요. 기자 생활하다가 명색이 정치인이 되어 보니까 갑자기 3류 시민이 된 것 같습니다. 눈치 봐야지 누가 미워하나 살펴야지, 식사를 하려도 맘대로 다닐 수 없지, 자유가 전혀 없어요.”

“하하하, 줄도 잘 서야지요...”

서로 웃으면서 한 말이지만 ‘삼류 시민’이란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요즘 일부 정치인의 행태를 보면 삼류보다 더 못한 것 같다.

언론인 시절 그의 별명은 ‘최틀러’였다. 히틀러 같은 최병렬이란 뜻이다. 일을 할 때는 기자를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는지 예절에서부터 기사 취재 태도, 특히 기사의 정확도, 진실성을 세세히 따졌다. 아마 최틀러 밑에서 일한 기자라면 요즘 툭하면 터지는 ‘가짜 뉴스’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1938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고인은 부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9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1963년 조선일보로 편집부 기자로 옮겼다. 취재부서 근무를 희망한 끝에 정치부로 옮겨 정치부 기자로 이름을 알렸다.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을 거쳐 편집국장까지 지냈다. 

데스크로 있으면서 후배 기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최틀러’란 별명을 얻었다. 고인한테 크게 혼난 어느 후배 기자가 “우리가 지금 히틀러 밑에서 일하나”라고 푸념한 뒤 생겨난 닉네임이었다.

고인과 한나라당의 기자출신 정치인인 서청원 전의원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사회 부장 시절 사회부의 이른바 ‘시경 캡’으로 경찰 출입기자들을 지휘했던 서청원 전 의원과 서로 티격태격했던 인연이 2003년 한나라당 대표를 뽑는 경선에서도 경쟁자로 맞붙어 ‘그 악연이 참 질기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고인은 기자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정계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전 전대통령의 후계자인 노태우(1932∼2021) 당시에는 민정당 중견들과 가까이 지내며 19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크게 공을 세워 킹메이커로 불리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4선 정치인뿐 아니라 공직자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청와대 정무수석(1988년 2월∼12월), 문화공보부 장관(1988년 12월∼1990년 1월)과 명칭이 바뀐 공보처 장관(1990년 1월∼12월), 노동부 장관(1990년 12월∼1992년 6월)을 차례로 지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다시 전국구 의원이 된 고인은 이번에는 김영삼 당시 민자당 총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밀었다. 원래 야당 지도자였던 YS는 1990년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으로 여당 대권주자가 되었다. YS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며 고인은 YS정부에서 서울시장(1994∼1995년)을 맡는 등 여전한 관운을 자랑했다.

서울 시장 시절에는 다른 시장들이 숙제로 미뤄놓았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는 결단을 내려 ‘최틀러’의 본색을 잘 발휘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들어 제1야당인 한나라당 대표가 된 고인은 대검 중수부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당이 초토화하는 위기를 맞았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한나라 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의혹과 측근비리 등을 들어 탄핵소추를 시도해 국회통과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곧바로 ‘역풍’이 몰아쳐 실패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에서 물러섰다.

언론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가짜뉴스’나 양산하는 요즘의 전직 기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시대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다시금 그의 ‘불굴의 기자정신’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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