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의 일이다.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당선이 된 직후였다.
KBS 서기원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문단의 선배이고 일간지 두 곳에서 모시고 일한 사이라 가까운 분이었다.
“이 전무(당시 서울신문), 나 오늘 대통령 당선자에게 사표 냈어요.”
“예? 아직 임기가 남았는데요.”
“정권이 바뀌었잖아요. 나를 임명한 사람이 떠났는데 자리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죠. 새로운 대통령과 생각이나 철학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요.”
이듬해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서울신문의 임원이던 나한테도 정부에서는 임기와 상관없이 사임을 요구해 지체 없이 회사를 떠났다. 당시의 서울신문은 정부가 대주주였지만 회사 자체는 주식회사 형태였다.
서기원 사장이나 필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해 했다. 언론계에서 일어난 평상적인 정권 교체였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아직 임기가 남은 여러 공직 책임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그중에도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과 전현희 국가 인권위원장이 논란의 당사자들이다.
이들 위원장에 대해 윤 대통령은 ‘자기가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고 애매한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뜻은 물러나야 한다는데 힘이 실려 있다는 해석이다.
권성동 국민의 힘 원내 대표는 ‘나가는 게 맞다’고 명백하게 말했다.
이같은 압박에 한상혁 방통위원장은 “거취 논란이 방통위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씀은 여러 차례 드린 것 같고, 최대한 성실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말씀으로 정리할게요”라고 밝혔다.
전현희 위원장도 “법률에 정해진 공직자의 임기를 두고 거친 말이 이렇게 오가는 상황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제 거취는 법률이 정한 국민 권익 보호라는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법과 원칙을 고민하고 국민들의 말씀을 차분히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법률에 정해진 공직자의 임기를 두고 거친 말이 이렇게 오가는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제 거취는 법률이 정한 국민 권익 보호라는 그 역할에 성실히 수행하면서 법과 원칙을 고민하고 국민들의 말씀을 차분히 경청하겠다”고 밝혔다. 역시 법이 정한 임기를 채울 것이고, 사퇴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사퇴 압박성 발언 또는 모호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과거 유사 사건의 판례가 주목을 받고 있다.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수석, 장관 등이 노태강 전 국장 및 1급 공무원들에 사표 압박을한 행위를 유죄로 판단한 바 있다.
정권을 이어받은 정부가 강제로 임기 중의 임명직 공직자를 내보기 어렵다는 판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압력은 멈추지 않는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과 철학도 맞지 않는 사람 밑에서 왜 자리를 연명하느냐, 정치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17일 MBC 인터뷰)며 “새 정부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은 몰염치한 일”(10일 조선일보 인터뷰)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는 두 위원장의 국무회의 참석도 막았다.
노골적으로 물러날 것을 재촉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민이 정권을 새로 세웠을 때는 그 정권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 정권이 내세운 선거 공약과 통치 철학을 찬성한다는 것이 국민 과반수의 뜻이라고 해석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약과 철학이 다른 정권 사람들은 불신임 당한 처지라고 봐야한다. 당연히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진퇴의 문제는 정치적인 절차이기 이전에 당사자의 인품의 문제이기도 하다.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야한다는 속설도 있다. 서기원 전 KBS 사장의 처신이 다시 한 번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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