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초년병 기자이던 필자가 힘에 겨운 일을 하다가 마침내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낮 12시경 잉크 냄새가 향기로운 신문 스리다시(刷出, 처음 인쇄되어 나온 신문의 일본말)를 보던 편집국 기자들은 대경실색했다. 내가 편집한 사회면의 가운데쯤 기사 제목에 기상천외한 오자(誤字)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개무대에 시계 10경’
기사 내용은 어느 시계 회사에서 처음으로 국산 시계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증정하기 위해 경무대(景武臺: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 현재의 청와대)에 보냈다는 기사의 제목이었다.
그런데 ‘景武臺에 時計 10個 기증’의 제목 중 하필 ‘景’ 자와 ‘個’ 자 두 활자가 뒤바뀌는 바람에 대통령 집무실이 ‘개무대’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날 오후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다가 경북 경찰국 사찰과(정보과)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
“대통령 각하의 집무실인 경무대를 ‘개무대’로 비하, 욕설한 일은 국가 원수 모독죄에 해당 됩니다. 저의가 무엇입니까!”
“단순한 오식입니다. 즉시 고쳐서 내보냈습니다.”
해질 무렵까지 시달리며 조사를 받은 뒤 훈방으로 풀려났다.(졸저 ‘권력은 짧고 언론은 영원하다’에서)
윤석열 20대 대통령 당선인은 청와대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인수위에 ‘청와대 개혁 TF'
까지 만들어 진행을 하고 있다. 정말 옮길 모양이다. 전임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 아닌 광화문에서 근무를 하겠다고 공약했으나 막상 당선이 되자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청와대의 뜻은 ‘푸른 기와가 덮인 집’이라는 뜻이다. 크기로 말하면 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의 3.5배라고 한다. 청와대 개혁이란 권위주의를 벗어나 국민 속으로 들어오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지금 청와대 자리는 조선 왕조 시절 경복궁 뒤에 설치한 무예 수련장이었다고 한다. 경무대(景武臺)로 불린 그곳은 일제 강점기 전까지 그대로 있었다. 일제 강점으로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자 남산 왜정대에 있던 총독 관저가 경무대로 옮겨졌다.
원래는 청기와가 아니었는데 보천교(증산교의 전신)의 본당 대웅전을 헐고 거기에 있던 청기와를 가져다가 경무대 지붕에 얹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라는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고 경무대로 있다가 총독 관저로 바뀌었다.
1948년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쓰면서 옛 이름을 찾아 경무대로 부르게 되었다. 경무의 뜻은 볕(景)이 드는 굳센(武) 곳이라고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시대에는 경무대 경호실 대신 경무대 경찰서가 설치되어 치안국 소속 경찰이 경비를 했다. 4.19 혁명 때는 경무대 경찰서 경찰관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바람에 서장이 뒤에 반혁명 재판에 회부되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나서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장면 총리와 함께 윤보선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국민 투표가 아님)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다.
윤 대통령은 푸른 기와로 덮인 집이란 뜻으로 청와대라고 개명을 했다.
왜 이름을 고쳤느냐에는 정설이 없다. 그러나 옛 사연을 따라 했다는 설과 함께 미국의 백악관(白堊館)이 흰색이라는 색깔에 착안해서 푸른 지붕 집인 청와대로 개명했다는 설도 있다. 백악관의 백악(白堊)은 ‘회칠한 듯 희다’는 뜻이다.
그러나 필자는 청와대가 그리 좋은 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자금성은 금색이다. 중국의 한족은 오행설에 따라 동서남북 중에 중앙이라는 사상이 있다. 동쪽은 푸른 색, 쪽은 흰 색, 남쪽은 붉은 색, 북쪽은 검은 색, 그리고 가운데는 노란 색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황제는 노란색, 제후는 푸른색 기와를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색 기와집은 황제나 왕이 아니고 그 밑 계급인 제후라는 의미가 된다.
청와대라는 이름을 붙여 우리 스스로 그런 께름칙한 이름을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에 살지 않아서 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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