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통령 당선자인 윤석열 당선자 인수위는 청와대에 들가지 않는 것을 확고한 정책으로 삼은 것 같다. 그런데 당초에 알려진 ‘광화문 시대’가 어려운 점이 많은 모양이다. 가장 큰 문제는 건물이 노출 되어 있고 집무실에서 기거를 할 수 없어 그야말로 대통령실 밖에 둘 수 없기 때문에 관저에서 출퇴근하는 문제 등으로 경호가 어렵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대통령 집무실 부근 100미터는 항상 경비 구역인데 대규모 데모가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광화문 광장에 붙어있기 때문에 보안상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이다. 그 외에도 헬리콥터 이착륙 문제, 주변의 고층 건물, 지하 벙커 부재 등이 난제로 등장했다.
대체 장소로 오르내리는 곳이 용산의 국방부 건물이다.
용산(龍山)의 명칭에 ‘용’은 왕을 상징하는 글자다. 용산의 국방부 청사는 권력과 무관한 곳이 아니다.
조선 초기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을 때부터 용산은 군사 주둔지로 쓰여 왔다. 조선 제3대 왕이 된 방원이 심야 쿠데타를 일으켜 실세 정도전을 살해하고 경복궁을 포위하여 태조의 승인을 받아 낼때 동원된 사병들 본거지가 용산이었다. 안성의 이숙번 군대와 용산의 방원 사병들이 구테타의 주력 병력이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도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용산을 군사 주둔지로 삼았다.
역사가 흘러 1908년 구한국 시절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킬 때도 ‘조선군’이란 이름으로 일본 군대 1개 사단이 용산에 주둔했다.
용산을 배후로 한 남산에는 일본의 총독부 집무실이 있었다. 1892년 일본 황실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일본 신궁(神宮)도 남산에 세웠다. 일본 강점 시대의 시작은 남산과 용산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1945년 해방 공간에 미군이 38선 이남을 관할할 때도 ‘케이맥’이라는 미군 군사 고문단이 용산에 주둔했다. 용산은 미 제8군을 비롯한 주한 미군 사령부가 되었다.
근세 역사 100년사에서 용산과 남산은 군사 권력과 조선 통치의 최고 성지였다.
청와대는 조선 첫 왕궁인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북악 밑에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의 후원으로 군사 훈련장이었던 경무대는 경복궁의 풍수지리를 공유하고 있다.
청와대를 개수 할 때 땅 속에서 ‘복지’(福地)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물이 나오기도 했듯이 이곳은 풍수지리상으로 뛰어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청와대라고 한다. 중요한 주산(主山)인 북악을 중심으로 조산(祖山)인 북한산이 뒤에 버티고 있다. 풍수 이론상으로 중국의 태산에서 시작된 정기(精氣)가 백두산과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다가 조산과 주산을 통해 청와대와 경복궁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앞을 내려다보면 풍수의 필수 조건인 안산(案山)은 남산이고 조산(朝山)은 관악산이다. 큰 강이 흘러야 하는데 한강은 안성맞춤이다. 큰 강과 궁궐 사이의 작은 내천은 역류로 흘러야 하는데 청계천이 바로 한강의 흐름과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렇게 조건이 잘 맞을 수가 없다.
명당에는 이외에도 좌청룡 우백호가 있어야 하는데 서쪽의 무악과 동쪽의 낙산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동쪽의 우백호가 좀 낮아 제 구실을 못한다 하여 성곽의 동쪽 문인 동대문은 흥인문에 한자를 보태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명명했다. 다른 성곽 대문이 ‘숭례문’ 등 모두 3자씩인 것을 보면 설명이 된다.
안산 너머로 보이는 조산 관악산의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은 형상이라서 도성에 화재가 자주 날 것을 염려하여 화기를 죽이는 석상 두 개를 광화문 앞에 세웠다. 그것이 해치(해태)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 이처럼 완벽한 곳이 경복궁과 청와대다.
그런데 청와대의 주인은 명당설과는 달리 온전하게 임기를 마치고 나온 경우가 드물어서 결코 명당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임기를 못 마친 윤보선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 그리고 수갑을 차게 된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3대통령,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통령까지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 잘 한 일인지 후세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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