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허황한 도미노(domino)이론을 내세워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한반도를 「한 세대 동안 분할(divided Asia for a generation)」 지배하려는 정책이다.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권좌에 오른다. 공산당은 10월 14일 광저우를 접령하고, 11월 30일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을 함락시킨다. 12월 27일 국민당이 피신한 마지막 수도인 청두까지 접령당한다. 공산당이 대륙을 완전히 장악한다. 중화민국은 타이완섬으로 거점을 이동하여 지금의 대만이 된다. 중국혁명은 미국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미·소 냉전의 핵심 인물이자 정치가·외교관인 조지 케넌(George Frost Kennan, 1904.2.16.~ 2005.3.17.)은 1947년 4월 조지 캐틀렛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12.31.~ 1959.10.31)국무장관에 지시로 정책기획실을 구성해 미국의 대외정책을 수립한다. 케넌은 "작은 나라가 독재를 하든 굶어 죽든 그것이 미국의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이다. "유럽과 아시아에 강력한 패권국(소련)의 등장을 저지한다"는 봉쇄  전략을 마련한다. 소련의 세력 확장을 봉쇄한다.

케넌의 봉쇄 전략에 따라 서유럽 경제와 일본 경제의 부흥이라는 중대한 목적이 생겨난다.  케넌은 중국이 전쟁 능력에 필수적인 통일적 산업 기반을 갖추지 못했고 기초적인 공업만 있다는 점을 들어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핵심에서 배제시킨다. 대신 그 지역에서 강력한 산업국가인 일본에만, 어떻게 하면 일본을 부흥시키고 동아시아 내 일본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만 주목한다. 케넌의 전략이 담긴 국가보장회의 문서(제28/2호 아시아정책)은 1949년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다. 미국 정부의 궁국적 목표는 동아시아 지역에 방해받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다. 한국 중국 베트남에서 식민지에 반대하는 정권의 출현은 그러한 목적을 저해했고, 따라서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은 아시아를 한 세대 동안 분할한 차선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브루스커멍스 <한국전쟁>P291~292 요약

미국이 말한 ‘분할’이란 첫째 한 나라를 지리적으로 나누어서 힘을 분산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 형성된 문화공동체를 쪼개 서로 갈등이 유발되도록 해서 노예근성에 젖도록 하는 것. 동아시아 민족을 우롱하는 못된 짓이라는 지적이다. 미국의 목적은 소련의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차단하려는데 있었다. 대소 봉쇄전략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미국의 목적이 신형 식민지 형태로 지배하려는데 있다는 지적이다.

대소 봉쇄정책을 설계한 조지 캐넌(George Frost Kennan, 1904.2.16.~ 2005.3.17.)이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보다는 이념적·정치적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것. 냉전 당시 미국의 가장 유명한 책사였던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5.27.~)와 겹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케넌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38선 이북까지 수복하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했다. 선을 넘지말고 선을 지키며 냉철하게 행동하자는 주의였다. 

케넌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과장하여 동아시아 분할 지배로 대응했다. 특히 미국 국무부가 베트남 현상을 도미노이론으로 설명한 것은 착각이었다. 호치민(본명 구엔 타트 탄 Nguyen Tat Thanh, 胡志明·C.M. Hoo는 프랑스 식민지 감옥에서 사용한 가명)의 항불 독립투쟁 정신은 공산주의 이념이 아닌 베트남 민족주의이다. 호치민이 이끈 국민당은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던 1927년12월 구엔 다이 흑(Nguyen Dai hoc)을 중심으로 교사, 학생, 언론인 등이 모여 베트남 북부의 중심도시 하노이에서 결성했다. 쑨원(孫文)이 중심이 돼 만들고 그 뒤 장제스(蔣介石)가 지도자로 활동한 중국 국민당을 모방해 창당했다. 민족민주혁명을 완성하고 억압받는 민족을 지원하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공산주의 이념이나 중국 민족주의와도 다르다. 중국이 공산국가 된다고 해서 베트남이 따라서 공산국이 될 수 없다. 미국은 헛된 도미노이론으로 동아시아 분할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현대사의 주요 사건 대부분은 미국 국무부 정책에 기인하고 있다. 정책을 현지에서 실행하는데 국무부 소속 OSS(CIA 전신). CIC 요원의 비밀공작(Covert Action)활동이 배후에 있다. 비밀공작은 국가의 이익이 위협받을 때, 정책결정자가 선택할 수 있는 대외정책 수단 중 하나이다. 비밀공작이라는 단어를 냉전체제 당시 이루어진 스파이 활동과 혼돈·인식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 안보법에 비밀공작은 정부의 역할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공개적 알려지지 않도록 하면서, 해외의 정치, 경제, 군사 상황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부의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부분 사건은 사진과 문서로 기록을 남겼다. 지금은 실패로 끝난 중국과 베트남의 분할정책을 간략히 살펴보자.

 ①중국 분할정책

중국은  1945년 8월 15일 항일전쟁(抗日戰爭)이 끝나고 중국 재건을 두고 국민당(장제스·蔣介石)과 공산당(마오쩌둥·毛澤東)이 국공내전( 國共內戰)이 벌인다. 양당은 8월 충칭(重慶)에서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을 개최① 내전회피 ② 정치협상회의 개최 ③ 각 당파의 평등한 지위 승인 등을 논의한다. 10월 10월 10일 쌍십협정(雙十協定)을 통해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한다고 합의한다.

국민당은 미국의 원조와 4대 1의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에 중공(중국공산당)과의 제3차 국공합작을 파기한다. 이에 마오쩌둥도 강경히 응전태세로 맞서면서 1946년 내전으로 돌입한다. 중공군은 국부군을 유도하여 각개(各個) 격파의 작전을 전개한다. 그 세력권 내에서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정치적·군사적인 기반을 닦아 나갔다. 또 한편으로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국민당을 고립시키는 전략·전술을 전개한다. 국민당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947년 말부터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 관계가 역전된다. 마침내 중공은 국민정부를 타이완(臺灣)으로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유일한 중국으로 남았기에 중화민국의 계승 국가로 인정받아 UN 상임이사국 자리를 손쉽게 차지한다. 현재 중국은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국공내전 말기에 미국은 대만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장개석이 국부천대로 선수를 쳐서 무산된다. 만약 대만공화국이 먼저 세워졌다면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대만)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대만공화국(혹은 미국령 대만)의 대치 상태가 된다.

미국은 중국의 분할 과정에 개입한다. 당초는 대륙을 만주-남-북 등 세 부분으로 나눠 중국의 거대한 힘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중국 대륙의 남쪽과 북쪽으로 나눠 모택동의 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이 분할 지배하도록 하도록 한다.  나머지 만주 일대를 떼어내 만주국을 세우도록 한다. 이 중 만주국 건립은 일본을 도와주는 정책이다. 1905년 7월 29일에 작성된 테프트·가스라 밀약( Taft–Katsura agreement)에 연장 선상이다.   

만주국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는 갈등을 계속하던 1904년 2월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맺는 동시에 아서항을 공격해 러일전쟁을 발발한다. 내부 혁명 세력의 반발로 인해 전쟁에 힘쓸 여력이 없던 제정 러시아군대는 패전을 거듭한다. 1905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러시아 제국의 발트 함대를 침몰시키며 승기를 잡는다. 

미국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1858.10.27. ~ 1919.1. 6.)대통령은 1905년 7월 미국 육군 장관 테프트(William Howard Taf1857.9.15. ~ 1930.3.8.)를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제국 수상 카쓰라 다로(桂 太郎·1848.1.4.~ 1913.10.10.)와 비밀회담을 갖는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한다. 동아시아 전반에 관한 논의를 했다. 당시 가쓰라는 "동아시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라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간의 협조가 있을 때에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비밀협정은 20세기 초 미국의 대-동아시아의 기본 방향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조약을 통해 간단히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을 수 있었. 당시 미국은 사실상 묵인했다.

미국은 테프트-카스라 협약에 따라 만주국 건설을 통한 일본을 지원하며, 분할 정책을 위해 장개석 국민당과 모택동 혁명군을 동시 지원한다. 국민당의 지원은 공개적으로, 혁명군은 비밀리에 지원한 것이다. 

미국의 분할 정책에 문제가 발생한다. 모택동이 이끄는 대륙 전체를 빠르게 장악하면서 장개석은 대만으로 밀려나고 만주국 건설도 실패한다  중국 분할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대소 봉쇄 전략의 연장 선상에서 대중 봉쇄 전략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美中覇權競爭·United States-China battle/contest for supremacy)이 바로 그것. 

미국은 1800년대 영국을 경제력으로 추월한다. 2차 세계 대전이후 소련(소비에트 연방)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다. 이후 소련의 붕괴로 미국은 전세계 유일무이 초강대국이 된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빈곤에 시달리던 최후진국이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 개혁정책으로 급성장해 2010년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 이후 미중 양국은 정치, 군사, 외교, 과학, 기술, 문화,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변화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미국의 지도력에 고분고분 따라갈 동맹국은 일본, 한국을 제외하고는 없다.

미중무역전쟁도 미국의 전략 중 하나.  중국해에서 항해의 규칙 마련, 양안 간의 대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은 중국과 대한민국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OSS(CIA전신)는 일본의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베트남과 협력하여 장비와 훈련을 제공하고 정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다. 사진은 호찌민(가운데 좌), 보 응우옌 잡(가운데 우측)과 미국 OSS요원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자료사진
2차 세계대전 당시 OSS(CIA전신)는 일본의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베트남과 협력하여 장비와 훈련을 제공하고 정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다. 사진은 호찌민(가운데 좌), 보 응우옌 잡(가운데 우측)과 미국 OSS요원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자료사진

 ②베트남 분할정책

1945년 8월 일본 항복 직후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 북쪽엔 장개석의 중화민국군이, 남쪽엔 영국군 동남아 사령부가 프랑스군이 도착하게 될 때까지 주둔을 결정한다. 베트남으로 들어오는데까지 시간이 소요된다. 그 사이에 베트남은 무주공산이 된다. 이때 호치민의 베트민((Viet Minh·베트남 독립연맹)이 삽시간에 베트남 북부를 장악한다.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트민은 1945년 12월 19일 하노이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공격한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베트남독립전쟁·1946.12.19.~1954.8.1)이 발발한다. 호치민 주석은 1941년 중국 인민전쟁을 모델을 삼아 전략을 수립한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프랑스가 패전하면 전쟁은 종식된다.

전쟁이 끝난다. 미국이 휴전을 주선한다. 17도선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는 제네바협정을 맺는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할된다. 북에는 호찌민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된다. 남에는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진다. 미국은 자연스럽게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1963년 11월 존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1917.5.29. ~ 1963.11.22)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린든B. 존슨(Lyndon Baines Johnson.1908.8.27.~1973.1.22.)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부터 베트남 전쟁에 깊게 끌려 들어간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 통깅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 해군 구축함 USS매독함을 선제 공격하면서 발생한 양국 함대의 교전 사건인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 베트남 전쟁 단초가 된다.  본래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의회는 대통령에게 무력행사를 자유롭게 실행할 권한을 부여하는 통킹만 결의를 가결한다.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다. 

미국의 경제학자·평화운동가 다디엘 엘즈버그(Daniel Ellsberg·1931.4.7. ~ 2023.6.16)는 1971년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사실을 폭로한다.  국방부 펜타곤 보고서에 1차 공격은 있었지만 2차 공격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  후일 북베트남 당국도 공격 이유를 "당시 전쟁 중이던 남베트남 함선으로 오인한 공격이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미국 내 반전 여론이 일어났다.

존슨 대통령은 의회를 속이고 전쟁을 확대한다. 존슨이 통킹만 사건을 쟁점화한 속셈은 1965년 11월 3일 실시하는 대통령 선거에 있었다. 존슨은 베트남 민중의 피를 제물로 뿌리고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한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전쟁 분위기를 조장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지만 패배한다. 호치민이 지휘하는 베트민에게 베트남은 완전 정복당한다. 1973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쫓겨난다. 베트남 분할 정책도 실패한 것이다.

일부 국내 수정주의 학자들은 "2010년 이명박 정부가 한국 천안함 침몰사고를 폭침이라고 우기면서 5.24조치를 시행한 수법이 통킹만 사건을 닮았다."는 분석을 내놓은바 있다.

베트남의 국보로 존경받는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 당시 열강 제국에 맞서 싸운 독립 운동가이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에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1940년 베트남에 일본 식민 통치가 시작되자 일본 또한 프랑스와 다를바 없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베트남독립동맹회(Việt Nam Độc Lập Đồng Minh Hội) 즉 베트민(Viet Minh)을 창설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태평양 전쟁 당시 호치민과 미국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 우호적 동맹 관계가 맺는다. 베트민 게릴라 200여명이 미국 OSS에서 기관총, 브라우닝자동소총, 수류탄, 낙하산 등 최정예 군사 훈련을 받는다.  미군의 무기로 무장한 베트민 게릴라는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하는 대일전을 치룬다.

후일 미국은 자신들이 군사 훈련을 시킨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 게릴라와 베트남 전쟁 당시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무엇보다 미국의 전략과 미군이 모르는 베트남의 지형적 특성을 잘 아는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호치민은 1969년 9월 3일, 79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는 베트남 민족 모두가 진심으로 존숭하는 영원한 민족주의자로 잠든다.

③조선반도(한반도) 분할정책: 

한반도 신탁통치안(信託統治案)은 트루먼의 분할 정책에서 비롯됐다. 신탁통치란 본래 국제연합 감시하에 특정국가가 특정지역에 대해 실시하는 특수통치 제도를 말한다. 통치국은 이 제도의 기본목적에 따라 평화증진·주민보호·인권존중·자치 또는 독립원조를 하도록 되어 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트루먼은 1945년 4월 12일 대통령에 취임한다. 8월 6일과 8월 9일에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다. 일본의 패망이 예상외로 빨리 온다. 8월 11일 38도선 기준으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뉜 분할 선언한다.

12월 27일 한반도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3국 외상이 참여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린다. 미국의 주장에 따라 최장 5년간 신탁 통치한다는 안이 결정된다. ①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②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③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이날 동아일보는 미국 워싱턴발(12월 25일 발신) 뉴스로 「미국은 즉시독립주장, 소련은 신탁통치주장」이라고 보도한다. 조작된 뉴스이다.

신탁통치안은 트루먼의 동아시아 분할정책의 일환이었다.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는 미국의 구상이었고, 소련은 처음 반대하다 수동적 동의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진실을 왜곡시킨 가짜 뉴스의 배경에 미국 정보국, 이승만, 하우스만 대위 등이 배후라는 짐작이 나왔다.

신탁통치안에 따라 한반도는 미·소 양국이 분할점령하게 된다. 임시 정부안은 1946년 3월 서울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깨진다.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그해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에 건너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1948년 5월 10일에 남한 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진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북 분할 신탁통치와 친미주의자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트루먼의 분할정책은 실현한다.

1947년 11월 14일 조선반도 총선거에 관한 유엔 총회 결의가 있었으나 실행이 어려워,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하였다. 이에 군정관 하지 장군이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선거를 결정함에 따라 단독 정부수립을 위한 선거를 치르게 된다. 이 또한 미 국무부의 분할정책에 따른 것이다.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과 일본에서 진행된 역코스에서 유래했다. 역코스는 새로운 지역적 정치경제의 논리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일본산업은 다시 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일터가 되고, 과거의 식민지와 보호령을 시장과 자원공급처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국무장관 조지마셜이 1947년 1월 29일 딘 애치슨에 보낸 메모에서 "남한에 확실한 정부를 수립할 정책 초안을 만들고, 그 경제를 일본 경제와 연결하라"고 적고 있다.그는 1947년부터 1965년 남한과 일본의 외교정상화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한국 정책이 나아갈 방향의 핵심을 선견지명으로 이해한 것이다. (중략) 이승만이 이끄는 한국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다. 맥아더가 자랑스럽게 연단에 서 있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국제연합의 감독 하에 치러진 선거로 구성된 입법부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된다. (중략)선거는 일제감정기에 확립된 매우 제한적인 참정권에 부합하는 것으로, 투표권은 큰 도시의 지주와 납세자로 한정됐다. 촌락 차원에서는 원로들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투표했다. 무장 경찰과 청년단체들이 투표소 주변을 에워쌌다.  1947년 당시 국제연합은 작은 기구로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소련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거부할 수 있지만, 국제연합을 통제하는 것은 미국이었다. 그럼에도 국제연합 감시관들은 한국에서의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했다고 선언했다. 국제연합은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부여했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 P171~172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의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8월 12일 완전 결렬된다.  미국은 9월 17일 유엔 총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한다. 9월  23일 본의에서 정식 의제로 채택된다. △남·북 총선거△외국군 철수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의 날카로운 대립을 겪는다. 11월 14일 본 회의에서 미국 안이 43 대 0(기권 6)으로 채택된다.

1948년 1월 24일 유엔 임시위원단의 소련 점령 지역 입경이 거절당한다. 유엔 소총회에서 채택된 2월 26일 결의안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북한 지역 선거를 유보한 채,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다. 남·북한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로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계획이었으나, 북한에서 선거가 불가능함에 따라 남한만 200석을 할당한다.

김구·김규식 등 민족 진영에서는 남한만 단독 선거가 실시되면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을 걱정하여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학생들도 반대한다. 학생들은 바로 군대에 끌려간다.

이승만과 한민당, 친일파 세력은 유엔 소총회 결의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좋은 기회로 보고 단독 선거 추진에 혈안이 된다. 

5.10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 국회의원에 출마한다. 상대 후보는 이승만보다 인기가 높은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낸 최능진이다. 조병욱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음모를 꾸며 최능진의 선관위 등록을 취소시킨다. 결국 이승만이 단독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 최능진의 아들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최필립이다. 

남한 단독으로 치러진 5·10선거로 제헌의회가 성립되면서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된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된다.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뽑는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다. 

5.10선거를 두고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평가와 한국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는 평가 등으로 갈린다. 김구·김규식 등 민족 진영의 우려대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1950년대 북진통일 운동도 분할정책의 일환이다. 당시 정부는 학생들을 통원해 “반공, 북진통일”을 외치고 다녔다. 이승만은 헌법상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지만 실제 작전통제권이 없었다. 작전을 수행할 전투력도 없었다. 북진통일을 외친 까닭은 정치적 기만술이라는 지적이다. 전시의 긴장 분위기를 만들어내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해 강권으로 통치하는 데 효과를 거두려고 술수라는 게 수정주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친일파 세력과 일부 월남 기독교인은 통일에 부정적이다. 남북 분단을 고착화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의 분할 정책을 동조하는 보수세력이 많다. 이들은 미군철수 반대를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분할정책 추진 부서는 미 국무부이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OSS(CIA)와 CIC 공작원이 실천하는 요원이다. 대표적 공작원이 하우스 먼(James Harry Hausman·1918.2.28.~ 1996.10. 5.)대위이다. 2차 세계전 이후 1946년 7월 28일 28세 나이로 한국에 파견돼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 때까지 30년간 배후에서 조종하며 한국 정치를 주물렀다. 군대 좌익 색출 작업을 시행하면서, 제주 4.3 사건 당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좌익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그 시체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쏘기도 하였다. 이후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제주도 시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몇개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대꾸하기도 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최종 명령자로도 지목되고 있다. 그의 저서는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이다. 

 美 분할정책 중국·베트남 실패, 한반도 성공 

미국의 분할 정책은 중국‧베트남에서 실패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목적이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 자주독립하려는 민족주의운동과 그 나라 권력자들의 횡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민중의 열망을 도와주려는데 있지 않고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그 나라를 분열시켜 직접 지배하고 이용하려는 제국주의적 폐습에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4월~7월 사이 OSS 요원 패티 소령은 미 대사관을 통한 공식 정보보고서에 “호치민은 무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베트남 독립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삼고 싸우는 민족주의자일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호치민은 마르크스의 이념과 소련을 항불 독립투쟁과 민족주의 부활 운동의 실행을 위하여 일부 활용한 것이다.

호치민의 성향이 백범 김구와 비슷했다. 호치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소련과 미국의 관계를 적절히 유지했다. 순박한 김구는 미국과 장개석 국민당과 가까이 지냈다. 소련과 모택동의 공산당과는 거리를 두었다.

김구는 이승만 휘하의 CIC 백의사(白衣社)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2001년 발굴된 미 국무성의 기밀 보고서(일명 ‘실리 보고서’)에도 안두희가 우익 테러 단체인 '백의사' 대원이자 국내에서 활동한 미군 방첩대 CIC 요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분할정책은 한반도에서는 성공한다. 미국은 남한에 미군을 70년 넘도록 주둔시키면서 중국과 소련을 견제해 오고 있다. 무기 장사로도 돈 벌어 군산(軍産)복합체가 번성했다. 일본경제를 부흥시켰다. 한국 사회에 친일파 세력이 뿌리를 내렸다. 친미 사대주의가 보편화됐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이명박 정부 당시 천안함 침몰 사건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 등을 두고 친미·친일파적 사고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민족의 반역자에서  권력 정점에 있는 기득권으로 성장한 친일파 후손들이 남북 통일에 부정적 시각을 보이며 불안해 한다는 지적이다. 이 점을 이용한 게 미국의 분할정책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분할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민중의 희생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전쟁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 재산은 파괴됐다. 전통적인 공동체문화가 무너졌다.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분단되었을까?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민족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을 의문이다. 8월 15일을 해방의 날로 기념하기에는 바로 그날부터 시작된 분단이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말과 글은 되찾았지만, 천만 가족이 생이별하고 온 나라 땅이 세계적인 전쟁터가 되었던 역사가 억울하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이 억울하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연이었을까? 최근 연구들은 비밀해제 기록을 통해 당시 정황을 밝히고 있다.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처럼 일본을 분할 점령하기로 했다. 1945년 6월 독일의 분할통치가 시작되었고, 일본이 다음 차례였다.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미·영·중·소 연합국은 일본 분할점령에 합의했다. 미국이 간토와 간사이, 소련이 홋카이도와 도호쿠, 영국이 규슈와 주고쿠, 중국이 시코쿠를 각각 차지하고 도쿄는 베를린처럼 4개국이 분할통치하는 점령계획이 논의되었다. 8월13일 미 국무부는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안”을 마련했다.

일본 분할계획이 왜 그대로 시행되지 않고, 엉뚱하게 조선이 대신 분단되었을까? 그 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운다던 일본은 왜 서둘러서 8월15일에 항복했나? 지금까지는 주로 원폭 투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미 일본학자 하세가와 쓰요시 교수는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소련이 참여하는 일본 분할을 피하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원폭 때문에 항복했다는 주장은 미국의 일본 열도 단독 점령을 뒷받침했다.

다른 한편으로 고시로 유키코 교수는 일본 군부가 미국과 소련의 충돌 지점이 일본 열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이나, 만주, 조선이 되도록 유도하려 했다고 한다. 패전 후 일본이 재기하는 데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38도선 부근도 일본군이 꼽은 유력한 미·소 대립 지점 중 하나였다. 소련은 8월 9일 개전하자마자 만주와 남사할린으로 진격하고, 하루 만에 함경북도 웅기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10일 일본은 항복 의사를 알려왔다. 미군 소령 딘 러스크는 하룻밤 사이에 조선의 38도선을 분할점령선으로 제안했다. 소련군의 홋카이도 상륙은 시간문제였다. 일본 천황은 8월15일 ‘종전(패전도 항복도 아닌) 선언’을 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소련이 참여한 일본 열도 분할점령은 피할 수 있을 만큼 빠른 항복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련을 동아시아로 끌어들이고, 원자탄으로 인류의 재앙을 불러온 너무 늦은 항복이었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연합국 정상이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논의하고 있을 때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당시 총리는 “패전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패전 이후 공산혁명을 피하고 천황제를 유지하려면 조속히 영·미 쪽과 교섭해서 전쟁 종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쇼와 천황은 그래도 종전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면 적에게 확실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4월의 오키나와 전투였다.

“출혈작전”이라고 했다. 목적은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출혈을 최대한 야기해서 항복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출혈’은 맞서 싸우는 일본군과 모든 민간인에게도 요구되었다.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도 투입됐다. 일본 본토를 지키는 ‘방파제’, ‘버리는 돌’이라고 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참혹했다. 직접 전투를 한 양쪽 군인 사상자도 많았지만, 주민 46만명 중 12만명이 죽었다. 긴급 동원된 1만명에 이르는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도 함께 희생되었다.

무모하고 잔혹한 “출혈작전”과 마주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재촉하면서 동시에 원자폭탄 개발을 서둘렀다. 폭탄이 만들어지자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수십만 인구의 도시에 두 차례나 원폭을 투하했다. 신무기의 위력을 과시해서 전후 패권을 다지려는 목적도 있었다. 소련은 침공 날짜를 앞당겨서 일본 점령의 지분을 챙기려 했다. 천황제를 지키려고 항복을 늦춘 일본과 동아시아 질서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만들려 한 강대국의 전략 때문에 수백만이 희생되고 민족의 운명이 갈렸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은 그 교묘한 시점에 한탄했다. 중국에서 오랜 국공내전을 겪으며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지켜본 망명정부 수반은 ‘해방’을 그냥 반기지 못했다. 해방과 함께 온 분단이 어언 75년, 남북 대립과 전쟁 공포는 아직도 이 땅을 억누르고 있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우리는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문화의 힘’을 쌓아 올렸다. 국제 정세는 다시 이 땅을 미·중 초강대국 충돌의 최전선으로 떠밀고 있다. 자주외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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