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김구, 여운영, 장덕수 등 번 아승만계 연쇄 암살 ...배후 경찰과 친일잔당
안두희 "거사 6일전 경무대에서 이승만 만났고...서청시절 미군 중령 김구 제거 암시"

안두희가 1959년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재일교포 북송사업 저지를 위해 일본 적십자사 폭파를 하러 일본에서 암약했다는 요미우리의 기사(좌) 안두희는 92년 4월 백범 암살 43년 만에 김창룡의 지시라고 밝혔고, 그해 9월 권중희, 변수환, 김인수 등에 납치된 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고 밝혔다(우). 안두희는 상황에 따라 배후를 달리했다.
안두희가 1959년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재일교포 북송사업 저지를 위해 일본 적십자사 폭파를 하러 일본에서 암약했다는 요미우리의 기사(좌) 안두희는 92년 4월 백범 암살 43년 만에 김창룡의 지시라고 밝혔고, 그해 9월 권중희, 변수환, 김인수 등에 납치된 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고 밝혔다(우). 안두희는 상황에 따라 배후를 달리했다.

"안두희(安斗熙, 1817.3.24.~1996.10.23)는 암살자(暗殺者, assassin)이다. 해방 정국 좌우 이념 갈등과 권력 전쟁에서 이승만(李承晩,1875.3.26.~1965.7.19.)은 안두희를 시켜 정적(정적政敵) 백범 김구(金九, 1876.8.29.~1949.6.27) 암살했다. 한국전쟁 이후 안두희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서 테러활동을 벌이다 일본 경시청에 발각돼 미수에 끝났다.  1949년 니카타일본적집사센터 폭파 미수사건(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이다. 백범 암살 배후는 그간 밝혀진 정황 만으로도  이승만과 미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임을 알수 있다."

변수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이사의 증언이다. 변수환은 안두희의 행적은 날조된 것이고 의혹이 제기한다. 안두희는 이승만에 의해 선발된 비밀 요원이라는 것.  1949년 백범 암살과 1859년 일본 적십자센터 미수 사건이  그 정황이라고 주장한다.

변수환은 1945년 광복 이후 해방정국의 정치지형과 좌우이념 대결 과정에서 안두희 행보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치행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미군 하우스만 대위→이승만→신성모→채병덕→장은산→안두희라는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고 추론 한다.

변수한은 1992년 권중희(사망ㆍ민족정기구회장), 김인수(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 신현석(사업) 등과 함께 1992년 9월 안두희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납치에 가담했던 인물. 변수한은 안두희가 1949년 9월 20일 백범 암살 6일전 경교장에서 이승만을 만났고, 미군 방첩대(防諜隊, CICㆍCounter Intelligence Corps)요원으로 활동한 사실을 밝혔다고 전했다. 

변수환은 안두희가 김구 암살 전후 이승만과 미군을 위해 일한 사실이 있다는 증거를  일본 의회에서 찾아낸다.  1959년 12월 8일 일본 중의원 법무위원회는 사전 발각돼 미수로 끝난 적집자사 미수사건이 폭로된다. 안두희, 정두권, 한구, 이주희 등 한국군 특무대원이 일본에 잠입해 한국대표부(영사관)에 도움을 받아 테러 활동을 계획했다고 밝힌다.  당시 일본 의회는 미군과는 행정 협정이 있어 입국이 가능하지만, 행정협정이 없는 한국군의 입국에 대해 군사적 문제가 제기된다. 안두희는 강두희라는 이름으로, 미국 여권과 신분증명서로 미군 전투기를 이용해 다치카와 기지를 이용해 입국했음을 밝히고 있다. 

위키디피아 일본판에 게재된 일본적십자폭바미수사건(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 @wikipedia
위키디피아 일본판에 게재된 일본적십자폭바미수사건(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 @wikipedia

1959년 12월 4일 일본 경시청은 한국 정부가 보낸 공작원을 니키타현에서 적발한다. 뇌관이 장전된 다이너마이트 12개가 들어있는 가방이 압수된다. 니키타현에 위치한 적십자센터를 폭파하기 위한 것이다. 공작원이 현행범으로 체포된면서 폭파는 미수로 끝난다. 한국 정부는  재일한국인의 북한으로 귀국하는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공작원을 보낸 것이다. △요원 암살 △일본 적십자사 폭파 △니키타항 철로 파괴 △일본 정재계 침투 등이 임무이다. 당시 책임자는 안두희이다. 이승만은 안두희를 책임자로 내세워 공작원을 일본에 밀항시킨 것이다. 

당시 한일 관계는 미수교 상태로 냉각기였다.  북한은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활동을 강화한다.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자금을 원조를 한다. 북한은 중화학공업 육성, 기간시설망 확충 사업으로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1956년 김일성은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호소한다. 조총련도 귀국촉진운동을 벌인다.

1959년 8월 북한과 일본 적십자는 귀환 협정을 체결한다. 이승만은 일본과 북한이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자 일본과의 일전을 불사한다. "북한 정권의 공산주의 건설을 돕는다"고 비난한다. 예정된 한일회담을 중지시킨다.  북한의 귀환 사업을 하던 적십자의 활동을 방해한다. 8월 25일 거류 민단 청년들이 적십자에 난입한다.

이승만은 북한 귀환을 방해 공작을 하는 비밀 공작조를 보낼 계획을 세운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내무부 치안국이 주도한다. 대통령 직속 경무대 기관이 조직된다. 이른바 북송저지대이다. 

그해 9월 서울 성북구 우이동에 비밀 훈련소에 재일의용병 41명· 한국군 예비역 장교· 한국 경찰 시험 합격자 24명 등 66명이 비밀 군사훈련을 받는다. 공작원은 3개 소대로 편성된다. 암호송수신, 폭발물 설치, 요인 납치 등 공작원 교육을 2개월 간 받는다. 일명'어둠의 부대 ' 북송저지대이다.  7회에 걸쳐 경북 경주시 감포, 경남 마신항 등에서 선원으로 위장해 무역선을 타고 일본에 밀항한다. 

일본의 전문 사이트 WEBLIO는 '니키타 적십자 폭파 미수 사건'을 한국 공작원의 테러 사건이라고 명칭하고 있다. 공작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기관 출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전문 사이트 WEBLIO는 '니키타 적십자 폭파 미수 사건'을 한국 공작원의 테러 사건이라고 명칭하고 있다. 공작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기관 출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안두희는 공작원들과 달리 밀항루트가 아닌 미국 공군 다치카와 기지를 경유해 일본에 잠입한다. 강두희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안두희가 미 공군 기자를 이용해 일본에 잡입한 점은 미군 CIC로 활동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이승만의 북송저지 공작에 안두희가 활동한 사실 만으로 당시까지도 이승만을 위해 비밀리에 일해 온 정황을 알수 있다.

안두희는 일본 잠입에 성공한 후, 한국영사관 김영한 삼등서기관의 도움을 받는다.  김영한은 12월 4일 오후 2시 안두희에게 3자를 통해 800만 엔을 전달한다. 

안두희는 1959년 니키타 일본 적십자 미수 사건에 참가한 것을 보면 이때도 국군 소속 특무 기관원으로 비밀리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류상 전역은 했다.하지만 실제로는 육군 소속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송저지대의 적십자사 폭파 작전은 사전 발각되어 실패한다.

1954년 12월 4일 경시청 외사과는 니카타현의 한 술집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던 공작원 2명이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가방 속에서는 뇌관을 장전한 4개 세트의 다이너마이트 3다발 등 총 12개가 발견된다. 니카타역에서는 가솔린 1L캔 4개를 숨긴 위스키 상자가 발뎐된다.  

신문기자로 취업해 적십자에 출입하던 일본 국적의 재일 한국인에 출입이 금지된다. 12월 7일 부산항을 출발해 고배항으로 상륙하려던 공작원을 실은 대명호가 해상보안관에 임검된다. 강제정박된 뒤 한국으로 돌아간다. 12월 12일 거제도를 출발한 명성호가 시모노세끼 근해에서 폭풍을 당해 침몰해 12명 전원이 사망한다. 같은 날 거제도를 출발한 공작선은 히로시마현 구리항에 잡입하는데 성공한다. 

1959년 12월 8일 북송저지대의 적십자 폭파 미수사건이 알려진 뒤 일본 정부는 발칵 뒤집힌다.  사회당 이노마타 히로시(猪俣 浩三,1894.7.20.~1993.8.21) 의원이 한국에서 침투한 북송저자대를 폭로한다. 정치가이자 변호사인 그는 1970년 암네스티 인터내셔널 일본지부를 설립해 초대 지부장을 맡은 인물이다.

제33회 국회 중의원 법무위원회 제6호 회의 자료 캡처@일본의회
제33회 국회 중의원 법무위원회 제6호 회의 자료 캡처@일본의회

아노미타 히로조(猪俣浩三) 의원은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공작원) 안두희 장두권 한구 류일희 이주호 등은  한국군 특무기관 소속"이라며 "안두희라는 인물은 한국의 육군 대위이다. 이승만과 세력을 다투었던 김구라는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을 암살한 인물이다. 이름도 강두희로 일본에 들어왔다. 이들은 테러단"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가장 위험한 분자(가 일본에 입국해서 활동하는데) 경찰이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왜 이런 인물이 일본에 들어와도 경찰을 모르는지. 한국의 군인이 일본에 (어떤) 경로로 들어오는지에 대해 파악을 해야 한다. 한국군 특무기관, 그러한 정규의 군인이 일본에 들어오려면 입국의 절차가 정확히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안두희가 이끈 북송저지대는 사전 정보 유출로 정체가 발각되면서 실패한다. 12월 12일 재일한국ㆍ조선인975명을 태운 제1차 귀국선이 일본 니키타항을 출항한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부에서 버림받는다.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1960년 5월 3일 한국으로 밀출국하려던 공작원 24명이 체포된다. 공작원들은 나가사키 감옥에서 6개월 정도 수감된 뒤 61년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다.

일본 내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나빠졌다. 민단이 일본 내 파시스트, 테러리스트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얻게 된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실행됐던 북송저지 사업은 이듬해 3ㆍ15부정선거로 인해 4월 19일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 정권이 실각하면서 중단된다.  

이들 공작원들은 이승만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선발한다. 내무부 치안국의 주도아래 북송저지공작대가 선발과 교육을 진행했다. 문제는 선발 과정. 경찰 임용이라고 속여 재일학도의용군, 경찰시험 응시자 출신을 공작원으로 선발한다. 우이동 훈련장에 천막을 치고 합숙시키면서 가족과도 연락을 두절시킨 채 1개월간 외부와 통제된 상태에서 재일동포 설득작업, 조총련 간부 납치 등  비밀교육을 시킨다.일본에 건너간 공작원들도 이후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돼 생계곤란을 겪는다. 체포돼 1년여간 복역한 후 강제 송환된다.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면서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모두 없던 일이 됐다.  

2009년에서야 정부가 사실을 인정한다. 공작활동 중 사망한 공작원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한다. 2017년 정부의 불법성을 인정해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에 관한 법률을 맏들어 배상한다.

◇안두희, 비밀스런 과거 행적

1949년6월26일 낮12시36분. 평생 조국 광복에 바쳐온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은 집무실 겸 숙소였던 경교장(京橋莊) 2층 거실에서 권총 피습으로 절명했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이국땅에서 풍찬노숙한 노애국자를 암살한 것은 일인(日人)이 아닌 동족청년 안두희(安斗熙·당시 육군포병소위)가 쏜 네발의 총탄이었다.

백범 암살은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니다.  안두희와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배후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승만 정권이 배후이다. 안두희는 1992년 권중희 변수환 김인수 신현석 등에 의해 경기도 가평에 끌려온다. 안두희는 암살 6일 전에 경무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증언한다. 신성모 국방장관, 장은산 포병사령관 등을 배후로 지목했다. 

당시 헌병 사령관을 지낸 장흥(張興)은 자서전을 통해 "신성모 국방장관이 소위 88구락부라는 친일파,  장관, 한민당과 결탁하여 백범 선생 저격을 계획했다. 당시 서북청년단 회원 안두희를 매수해 군에 입대시켜 총술을 가르쳐 준 뒤, 한독당에 입당하도록 교사하여 거사했다"고 말했다.

백범 암살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해체된다. 정부 수립 직후 48년 9월 제헌국회에 설치된 반민특위는 49년 1월 중앙과 지방조직 구성을 끝낸 뒤 약 4개월간 305명의 반민족행위자를 검거한다. 

안두희의 김구 암살의 배후는 당시 정치 지형과 맞물려 있다.  좌우가 극한 대립을 했다. 같은 우익 진영(김 구·이승만) 내부도 권력 심해졌다. 이승만은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다. 김구는 반대한다. 남북통일정부 수립해야 한다는 노선을 편다. 이승만은 철저한 친미 노선을 이행한다. 미국도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다. 김구의 정치 노선은 미국과 이승만의 정치적 입장과 전면 배치된 것. 이승만과 미국의 입장에서 김구는 제거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결국 이승만과 미 군정은 김구를 어떻게 처리할 인가에 대해 고민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두희가 방첩대(CIC,Counter Intelligence Corps)요원이라는 사실은 미국 국립보관서((National A rchives and R ecords A dministration, NARA)에 문건에서 확인된다.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 1933.7.15.~) 한림대 전 객원 교수(국사편찬위원회 해외 자료 수집 위원)는 2016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보관된 '김구-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Kim Koo-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보고서를 통해, 안두희가 CIC요원이었다고 밝힌다.   보고서 내용은 "반(反)이승만파 군인과 쿠테타를 계획한 김구가 암살되면서 그런 위험성이 사라졌다. 미국의 남한 관리가 편해졌다"고 적고 있다.  보고서 작성자는 미군 제1군 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인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이다.  백범 암살 3일 뒤인 1949년 6월 29일자로 작성해 사령부에 보고했다. 실리는 안두희가 CIC정보원이었고, 자신의 부하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안두희가 CIC요원으로 드러나면서 백범 암살에 이승만과 미국이 개입됐다는 그간 의혹이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졌다. 

하우스만의 자서전'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하우스만의 자서전'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당시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가 있었다.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1918.2.28.~ 1996.10.5.)이다.  그의 저서의 제목이 바로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이다. 1946년 7월 28세의 나니로 한국의 파견된 하우스만은 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정치계의 배우 실력자로 군림했다.

조선경비대를 창설을 지원했고,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 군 조직법을 만들었다.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군인을 중용했다. 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 등을 군 요직에 진출하도록 한다.

하우스만은 군 문제만큼은 한국군 장성이나 대통령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군내 동향을 보고 했다. 한국 정부의 장관들이 참여하는 국무회의까지 참석했다. 하우스만은 채병덕 참모총장의 전속 군사고문을 맡기도 했다. 

안두희는 <월간조선>1984년 7월호 및 8월호 연재된 '안두희 고백'을 통해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 정보원으로 서청원(서북청년단)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 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나까."라고 말한다. 

안두희는 1992년 미군 OSS출신 미군 중령을 만나  김구 암살에 대한 암시를 받았다고 증언한다. 미군 중령은 김구를 '블랙타이거(BLACK TIGER)'라고 불렀다고 말한다. 안두희는 곧바로 이 발언이 권중희, 변수환, 김인수 등의 납치되어 구타로 인한 허위 자백이라고 부인한다. 

조지 실리(George E. Cilley)소령의 보고서와 안두희의 그간 증언을 분석하면, 미국 정보 기관과 이승만의 연관성이 더 이상 의혹이라고 부인하기 힘든 상황이다. 만약 미국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실리의 보고서로 유추하면 적어도 미국 정보기관들은 김구 시해를 사전ㆍ사후 인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침묵 또는 방조하거나,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11월 육사 8기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태릉 육군사관학교 본관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8기생은 졸업생이 1263명으로 역대 육사 기수 중 가장 많았다. 교육기간은 짧았다. 현재 육사는 4년제이지만 8기생들은 입교 3~6개월 만에 졸업했다. 국방부 특명(特命) 제35호에 의하면 수석으로 졸업한 이헌영 등이 49년 5월 23일부로 소위로 임관했다.우등생 20여 명은 육군본부 등에 배속됐지만 대부분 일선 전투부대 소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대장·중대부관·대대참모 등으로 최일선에서 근무했다. 이 때문에 전체 졸업생 3분의 1인 367명이 전사하고 35명이 실종되는 등 비운을 겪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자료사진
1948년 11월 육사 8기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태릉 육군사관학교 본관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8기생은 졸업생이 1263명으로 역대 육사 기수 중 가장 많았다. 교육기간은 짧았다. 현재 육사는 4년제이지만 8기생들은 입교 3~6개월 만에 졸업했다. 국방부 특명(特命) 제35호에 의하면 수석으로 졸업한 이헌영 등이 49년 5월 23일부로 소위로 임관했다.우등생 20여 명은 육군본부 등에 배속됐지만 대부분 일선 전투부대 소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대장·중대부관·대대참모 등으로 최일선에서 근무했다. 이 때문에 전체 졸업생 3분의 1인 367명이 전사하고 35명이 실종되는 등 비운을 겪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자료사진

김구 암살은 비밀 작전(作戰)으로 진행된다. 안두희의 선발 과정에서부터 암살 성공 이후까지 베일에 쌓여 있다. 미국과 이승만의 묵인 또는 동조없이 불가능한 행보이다. 

안두희는 극우 단체 서북청년단 단원으로 육사2기로 임관한 한신(韓信, 1922.12.27.~1996.5.6.)에 의해 추천을 받아 1948년 11월 육사 8기(단기사관)에 졸업한 뒤 장교로 임관한다. 장은산 포병사령부관 있는 소속 포병사령부에 배속된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암살 불과 8개월 전이다. 이후 군인 신분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한다.  

이는 안두희가 밝힌 사건 직전 행적이다. 의심스럽다. 육사 8기 출신에 포병사령부 근무가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중앙일보는 지난 2015년 4월 10일자 '육사 8기 경쟁률 10대1...졸업생 1263명 최다' 제하 기사를 육사 8기 선발과 임관 일정을 밝힌다. 육사 8기가 임관한 일자는 사건 1개월 전인 1949년 5월 23일이다. 

1949년 5월 23일 국방부 특명(特命) 제35호에 따라 수석 졸업한 이헌영 등이 소위로 임관한다. 우등생 20여 명은 육군본부 등에 배속된다. 대부분 일선 전투부대 소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대장·중대부관·대대참모 등으로 최일선에서 근무한다. 전체 졸업생 3분의 1인 367명이 전사하고 35명이 실종되는 등 비운을 겪는다.  이 기사는 김종필 전 총리와 육군사관학교30년사(78년 발간)에서 발췌한 것이다. 

안두희가 육사8기를 졸업하고 포병사령부에 배속된 시점은 1949년 5월 23일일 것이다. 이는  김구 암살과의 시점은 불과 1개월여.  소위로 임관한지  34일만에 범행을 저지른 셈이다. 당시 육사의 교육기간은 3~6개월로 짧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안두희의 월남후 김구 암살까지 행적은 다음과 같다.   월남(1947.1)→서부청년단 가입(종로지부 총무부장, 중앙 충무부장)→백의사 가입→육사 8기 입교(1948.11.)→김학규 추천 한독당 입당(49.3~4.)→육사 졸업(49.5.)→김구 암살(49.6.) 등이다.  

◇安, 일본-미국 암살 교육 받은 1급 암살자

안두희의 일생 행적 가운데 1차 1937년~1945년 일제시대, 2차 1947년~1949년 광복이후,  3차 1953년~1960년까지 6.25전쟁 이후 행적이 의심스럽다는 지적이다. 

안두희는 1039년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전문부 법과에 입학한다. 학업을 중도 포기한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1937.7.7.~1945.9.9.)을 전후 징병 제도를  논의한다. 38년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제정한 ‘국가총동원법’(1938) 을 시행한다.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통해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을 실시한다.  강제징병된 조선인은 16,830명이다. 일본군이 진출한 대부분에 지역에 배치된다. 안두희도 징집 대상 나이.  1917년생인 안두희는 1939년 만 22세이다. 강제징병을 피하는 대신 밀정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이 있다.  상업학교를 나와 셈이 빠르고, 법학을 전공해 정보원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안두희가 중국에 건너갔던 1941년 대평양 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조선인에 대한 병원 충원을 늘리던 때다. 안두희는 중국 안희성 회남시(淮南市), 강소성 서주시(徐州시市) 등을 전전한다.  회남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접령당한다. 이곳에서 안두희는 일본군 관리기관인 군납품판매조합의 이사로 일한 것으로 알려진다. 강소성 서주는 일본 독립보병 제58대대가 진주해 있던 곳이다. 안두희는 이곳에서 요식업을 경영한 것으로 알려진다. 밀정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두희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45년 1월 귀국한다.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 군청에서 임시채용된 하급 사무원인 고원(雇員)으로 근무한다. 고원은 임시직, 하급 직원이다.  안두희는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 법학부 3년 때 중퇴했다. 정보 활동을 위한 위장 취업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용암은 지정학적으로, 러시아ㆍ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쉬운 지역이었다.

실제 용암은 1903년 러일 전쟁에 단초가 됐던 지역.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이 용암포에서 대립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한국 정부는 1904년 2월 25일 의주를 개방한다. 3월 23일 용암포를 개항한다.

이곳은 반골 기질이 높은 지역.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됐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된 이기당(李基唐)·송자현(宋子賢)을 비롯해 대한보합단(大韓普合團)의 박초권(朴初權)·이세광(李世光)·조세원(趙世元), 임시정부의 송병조(宋秉祚),  독립운동가 김홍일(金弘壹) 등을 배출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다.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안두희의 집안은 몰락한다. 1947년 월남한다.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가 모여 구성한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Northwest Youth Association)에 가입한다. 북한의 탄압을 피해 도망 온 젊은이와 개신교 신자들이 주축이다.

서북청천단을 무장 친위대와 같은 테러 단체로 완성시킨 이들은 이상만과 정권이라는 지적이다.  이승만의 후원 아래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다. 좌익인사 암살 테러, 제주도 4.3사건 등 잔혹한 범죄를 자행한다. 안두희는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지낸다.

이 시기에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월남한 청년, 학생이 중심이 된 백의사(白衣社)에도 가입한다. 백의사는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직속 특무기관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한 전문 테러 단체이다.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 혼란한 상황속에서 정치인을 암살하고 테러한다.  백의사는 염동진(廉東振, 본명 : 염응택)이 조직했고 초대 총사령을 지낸다. 명령 라인은 김구-신익희-염동진-박경구-단원들로 하달됐다.

안두희의 과거 행적은 친일, 반공, 미군, 이승만의 카테코리를 이어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안두희의 베일 속에 감춰진 일생도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의 정의봉에 맞아 살해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의 죽음으로 김구 암살은 결국 역사 속에 묻히고 만다. 

동아일보 특종보도 [안두희 씨 자백, 白凡 암살 6일 전 이승만 대통령 만났다]
-신성모ㆍ채병덕씨와 경무대에 함께 가
-장은산"배후 거물 있지 않으냐" '강행 지시'
동아일보 1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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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당시 75)는 1992년 9월 23일, "범행 직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났으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백범 저격을 임사하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고, "이 대통령은 백범 암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안씨의 이 같은 자백이 임의성을 가질 경우 그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역사적 진실'의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씨는 이날 오후 경기도 가평군 한 농가에서 본보와 만나 '백범 암살 6일전인 지난 49년 6월 20일 경무대 대통령 집무실로 불려가 이대통령으로부터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잘하라'는 격력을 받았다"고 밝혔다.

안씨는 이어 "당시 포병소위였던 나에게 '높은 사람'이란 장은산 포병사령관, 채병덕 참모총장 등 군지휘계통을 의미했다"면서 "장 사령관으로부터는 백범을 암살하라는 직접 지시와 함께 협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안씨는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해 "지난 49년 6월 20일 오후 3시반 경 장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사령관실로가 지프를 타고 와 있던 채 총장 부관을 따라 총장집무실로 갔다"면서 "채 총장은 그때 신장관과 함께 있다 내가 포병관측장교 사격대회에서 1등한 것을 치하하며 '경무대 구경을 하지 않겠느냐'며 경무대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안씨는 "경무대에 들어섰을 때 미리 연락을 받은듯 신장관과 채총장을 대통령실로 안내했다"며 "처음부터 미리 짜여진 일정으로 경무대를 방문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안씨는 "대통령집무실에서 20여분간 머물면서 사격대뢰성적 등에 관해 이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차 대접도 받았다"고 말하고 "백범 암살을 앞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나에게 확신을 심어주기위해 신장관과 채총장 등이 대통령 접견을 주선한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안씨는 경무대에서 나와 포병사령부로 직행, 장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는데 장 사령관은 안씨의 경무대 방문사실을 알고 있는 듯 "이야기 들었어. 내 말대로 (백범 암살 계획 배후에)거물이 있잖아"라며 백범 암살을 강력히 지시했다는 것.

안씨는 "이 대통령을 만난지 3일만인 1949년 6월 23일 1차 암살계획, 25일 2차 암살을 계획의 행동대장을 맡았으나 실패하자 장 사령관에게 호된 질타를 맏았다"고 증언했다.

안씨는 "그후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이던 장사령관을 다시 만났을 때도 '당신이 서두르지 않으면 당신이 다친다'는 협박을 받고, 백범을 암살하지 않으면 내가 살해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증언했다.

안씨는 "1,2차 암살계획 실패한후 장 사령관은 단독범행을 지시했으며 26일 정오로 못박았다"고 밝혔다.

안씨는 당시 육군정보국 방첩대장 김창룡씨, 정치브로커 김지웅씨에 대해 "김창룡 씨는 나와 백범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나 직접 범행에 관여하지 않고 사후처리역할을 맡았으며, 김지웅씨는 장 사령관과 함께 범행을 계획하고 나를 끌여들였으나 범행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안씨는 지난 4월 1차증언을 번복한데 대해 "이제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아 진상을 밝혀야 겠다는 생각이들었다"고 말했다.

안씨 진술로 본 백범 암살...장은산'범행시각'까지 지정

'이승만 대통령이 백범 암살에 개입했다'는 안두희(75)의 새로운 증언은 백범 암살이 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정치 세력과 군부의 합작으로 이루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안씨의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고 할 경우,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들 집단이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워 백범을 제거하고, 이를 한독당 와해공작의 계기로 삼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지난 4월 1차 배후 진출에 이어 이번에 새로 나온 안씨의 배후 증언은 앞으로 역사적 규명작업을 거쳐야 겠지만, 일단 두 차례에 걸친 안씨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 추론해 보면 사건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안씨에게 백범암살지령을 내린 장은산 포병사령관을 처음 만난것은 지난 1948년 11월 안씨가 육사8기특3반에 입교하면서부터였다.

안씨는 "한신 장군이 포병에는 빨갱이가 섞이면 안되니 서북청년단원(서청)들이 입대하면 좋겠다고 말해 싱계문제도 해결할 겸 입대했다"고 말했다.

안씨의 포병학교에서 좋은 성격을 보여 당시 포병학교장이던 장 사령관의 주목을 받았다. 안씨를 총애한 장 사령관은 자주 "백범 밑에는 빨갱이가 들실거린다"며 안씨를 백범암살음모에 끌여들였다. 

안씨는 "당시 나 자신도 백범이 빨갱이들과 어울려 정국이 혼란해지니 제거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암살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나 장 사령관, 김창룡 방첩대장등과 자주 만나면서 암살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안 씨는 장사령관이 정치브로커 김지웅씨와 부대 안에서 만나는 것을 여러차례 목격했다.

안씨는 서청시절 동료인 홍종만씨(사망)를 통해 김씨를 만나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술을 마시곤 하던 사이였다.

그는 "김씨는 홍씨 등에게 권총 등을 주고 정릉계곡에서 사격연습을 하게 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49년 6월이 되자 장 사령관으로부터 "신변 보장 염려말고 결행만 하면 출세길 보장된다"는 적극적인 회유를 받았다. 

그래도 안씨가 계속 백범 암살에 가담하는 것을 주저하자 장 사령관은 극비리에 안씨에게 이대통령 면담을 주선했다는 것.

안씨는 백범 암살 엿새 전인 49년 6월 20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전용차인 육군본부 1호차로 포병사령부에서 채 총장 집무실까지 (모셔 졌으며) 그곳에서 만난 신성모 국방장관이 "마침내 보고할게 있는데 (경무대에) 같이 가지"라며 안씨를 경무대로 동행, 외견상 안씨가 신장관의 경무대보고행차에 '우연히'끼어드는 형식을 취했다. 

안씨의 범행결행 뒤 신장관은 부산임시정부시절 안씨에게 금일봉을 주며 "그 동안 고생많았다"고 말했다. 

안씨는 이 대통령 면담 직후 '경교장습격'(49년6월23일), 병점고개암살기도(49년6월25일)등에 잇따라 실패한뒤 장령관에게 불려가 단독범행을 지시받았다.

장사령관은 이때 안씨에게 "빨리 서둘지 않으면 네가 백범을 암살하려한다는 것을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으며, "암살후 자살해도 괜찮다"고 말해 자살을 유도한적도 있었다는 것.

당시 장사령관은 안씨에게 범행시각을 '49년 6월 26일 정오'로 지정해준뒤 이를 전봉덕헌병부사령관에게도 통보, 헌병들을 경교장 주변에 대기시키는 등 사후보안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안씨는 "경교장에 들어가기 전 부근 다방에 들렸는데 헌병들이 많아 이상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안씨는 경교장 응접실에 대기하다 백범을 면담. 백범과 용공성 문제로 잠시 언쟁을 벌이다 권총 4발을 쏴 백범을 사살했다.

안씨는 "항간에는 당시 내가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말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백범이 언쟁중 격노해 옥편을 던지자 곧바로 권총을 쐈다"고 밝혔다. 

안씨는 범행직후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관들게게 몰매을 맞다 헌병대 김병삼 대위에게 인계, 연행됐다.

신장관은 사건직후 백범계열인 장흥 헌병사령관을 전격 해임하고, 전봉덕 부사령관을 헌병사령관으로 승진시킨다.

또 채병덕 총장은 이 사건을 담당한 홍영기 군검찰관이 안씨에게 중형을 구형하려하자, 이를 제지하고, 재판 후 홍 검찰관을 지방으로 좌천했다.

김창룡 방첩대장도 안씨를 배후에서 극진히 대우했으며, 안씨 가족들의 생계를 돌봐 주었다. 

이같은 모든 조치는 범행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된 인물들의 진상은폐를 위한 계획된 행동이었던 셈이다.

이후 이 대통령 정부 당국은 안씨에게 '비밀 당원증'을 발급한 한독당 김학규 조직부장 등 한독당원들을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하는 등 한독당을 와해시켰다.

그러나 안씨는 '비밀당원증이란 없다. 홍종만씨가 당원증에 '비(秘)'자 도장을 찍었을 뿐이다"고 말해 이 사건은 처음부터 면밀히 사전계획되었음을 증언했다. 

권중희씨 '억류'속 安씨 일문일답 "최종 배후 밝히니 후련..."

동아일보 캡처
동아일보 캡처

본지(동아일보)취재진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75)씨를 만나 이 사건에 가려진 배후 증언을 듣게 된 것은 23일 오후 5시 경기도 가평에 있는 한 농가에서였다.

당시 안씨는 민족정기구현회 권중희(56)일행 5명에 둘려싸여 있었으며, 이미 권씨 등에게 새로운 배후 증언을 한 뒤였다.

확인결과 안씨는 이날 아침 인천의 집에서 아침 운동을 나가다 권씨 일행에게 이곳까지 끌려왔으며, 안씨의 부인 김명희(59)씨는 "남편이 권씨 등에게 납치돼 갔다"고 경찰에 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안씨의 진술이 과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임의성이 보장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신경을 써야 했다.

다음은 이날 안씨와 나눈 일문일답.

-지금에야 최종 배후를 밝힌 이유는

安:고혈압과 대상포진증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데다 지난 7월 일사병으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죽기전에 진실을 밝혀야 겠다고 생각했다.

-여러차례 진상규명을 회피해오지 않았는가.

安:당초 나는 백범을 정치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으면서도 암살 등 테러에는 반대했었다. 의리를 지키겠다는 뜻에서 입을 열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는 생각이든다.

-백범 암살모의에 가담하고도 한동안 범행을 망실인 이유는.

安:당시 본처가 임신한 몸으로 돈을 별려고 제주도까지 행상을 다니다 유산했다. 불쌍한 아내와 월남한 이복동생 등 가족을 두고 죽기가 억울했다. 

(안씨는 이 말을 하며 한참 동안 흐느껴 울기도 했다)

-이대통령을 직접 만난뒤 확실한 결심을 굳혔나.

安:나를 환대했고, 백범을 시해하라는 시사를 받았다. 대통령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오늘 권씨 등에게 납치 당했는가.

安:언젠가는 진실을 밝히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권씨가 자자는대로 따라 왔다.

-부인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지금 권씨를 찾고 있는데...

安:납치는 무슨 납치...찾긴 왜 찾아

(이때 권씨는 취재진에게 "권씨가 농가에 도착한지 2시간 만에 암살배후에 대해 스스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고 밝혔다.)

-장은산 포병사령관의 암시대로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安:백범을 암살한뒤 창밖을 보니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있었다. '자유'가 그리웠다. 법정에서 백범을 죽인 이유를 밝히고 싶었다.

-헌병대에서 왜 진실을 거부했는가.

安:당시 백범 계열 사령관이어서 헌병대가 싫었다.

-사후 신변 안전 등 보장을 받았는가.

安:그런적 없다.

(권씨는 안씨의 진술도중 여러차례 진실을 제대로 털어 놓으라고 윽박질렀으며, 그때마다 기자는 권씨를 밖으로 내보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까지 범행의 전모를 가족에게 이야기했나.

安:가족들은 나 때문에 사회적 지탄을 받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친다. 왜 자식들에게 '쓸데없는'이야기를 하겠는가.

-현재 심정은.

安:다 털어놓으니 후려하다. 앞으로 더 들을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1992년 9월 24일자 보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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