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민간인 희생자 수 1만4,442명 확정...2만 5000명~3만명 추정
여순사건 발생 직후 미군 하우스만 작전책임자 배속...실질적 작전통제권 지휘
이승만, 4.3-여순 이용 언론 통제 강화, 극우 반공체제 구축해 정적 제거 활용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캔버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오른쪽에는 이들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철갑 투구의 병사들이 있다. 이 다음 장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신할 수 없으나, 그것이 비극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무런 저항의 무기를 소유하지 못한 여인들은 공포에 질려 얼굴이 일그러져 있거나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앉아있다. 우는 아이를 꼭 안고 있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여인의 품속으로 달려들거나,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조차 파악되지 않는 듯 흙장난을 하고 있다. 한국 전쟁의 참상을 그린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다. 다만, 전쟁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피카소는 그림을 통해  전쟁과 평화를 담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_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캔버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오른쪽에는 이들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철갑 투구의 병사들이 있다. 이 다음 장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신할 수 없으나, 그것이 비극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무런 저항의 무기를 소유하지 못한 여인들은 공포에 질려 얼굴이 일그러져 있거나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앉아있다. 우는 아이를 꼭 안고 있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여인의 품속으로 달려들거나,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조차 파악되지 않는 듯 흙장난을 하고 있다. 한국 전쟁의 참상을 그린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다. 다만, 전쟁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피카소는 그림을 통해 전쟁과 평화를 담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_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50만명이 정치적ㆍ민족적 이유로 확살된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2010년 다르푸르 분쟁에서 17만명이 사망한다. 이 중 전투 중 사망자와 아사자의 숫자가 포함된 것이다.

로버트 멜슨(Robert Melson)미국 인디애나 주 퍼듀대학 정치학 교수는 저서 <Paradigms of Genocide>에서 '학살(虐殺, massacre)에 대해 “정치적 주체에 의한  의도적 살해”로 정의한다.

멜슨은 폴란드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았고, 부모와 함께 포그룸을 피해 나중에 위조해 살았다. 그의 연구 분야는 인종 갈등과 대량 학살이다. 홀로코스트에서 그의 가족이 함께 생존한 이야기는 논문<False Papers> (일리노이 대학교 출판부, 2000)에 나와 있다. 이 논문은 2001년 National Jewish Book Award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인류 역사에서 학살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역사에 기록된 학살만으로도 방대한 분량의 책이 될 정도이다. 신념과 권력을 위해, 인종을 위해, 이념을 위해, 그리고 별 다른 이유없이 수 많은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이는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민간인학살지 @진실화해위원회
민간인학살지 @진실화해위원회

학살의 책임자는 대부분 처벌 받았다. 처단됐다. 하지만 처벌 받지 않고, 처단되지 않은 학살자들이 살아 숨쉬는 곳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1947년 이승만 정권 당시  4.3제주사건과 여순 사건이 발생한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 봉기이다. 이 과정에 수많은 인명이 확살됐다. 얼핏 군인ㆍ경찰ㆍ서부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학살의 배후에는 이를 용인하고 조장한 미국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 이같은 야만적 학살은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 때도 발생한다. 광주민주화 운동이 발생할 당시, 정치권력에 의한 학살이 자행된다.  '반공'이라는 미명아래 제도적으로 탄압하고 조직적인 학살이 발생한다.

제주4ㆍ3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 사태가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애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도는 동북 아시아의 요충지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한 전략적 기지였다. 1945년 8ㆍ15광복 직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 주민들이 일시 귀환하면서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는다. 귀환한 사람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해 생계를 꾸리기 어려웠다. 생필품 부족과 콜로라 발병으로 수백 명의 인명이 희생된다. 극심한 흉년과 미곡 정책의 실패로 식량난까지 겹쳐 민심이 악화된다.

설상가상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 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 경찰로 변신한다. 부정 행위를 일삼아 사회적 문제가 된다.  이들과 일본에서 귀환한 지식인들과 마찰을 빚는다. 지식인들의 일부는 조직적인 조합 운동을 해왔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45년 9월 10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지부가 제주시에 설립된다. 건준은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된다. 9월 22일 결성된다. 인민위원회는 조직력이 탄탄해 제주도의 행정을 장악한다.

1949년 훈련을 받고 있는 제주도 노형리 민보단원들.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들은 '민보단원'으로 편성해 군경 토벌작전에 동원. @자료사진
1949년 훈련을 받고 있는 제주도 노형리 민보단원들.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들은 '민보단원'으로 편성해 군경 토벌작전에 동원. @자료사진

이런 복합적인 요인이 상황에서1947년 3월 1일 이른바 '3ㆍ1절 발포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28주년 3·1절 기념식이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열린다.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 명이 모인다. 행사가 끝난 뒤, 오후에 가두시위로 이어진다.

관덕정(觀德亭)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간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한다.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는다.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에 돌입한다.  3월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한다.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이자 3월 8일 제임스 카스티어(James A.Casteel) 대령이 이끄는 미군정청·재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선다.

당시 작성된 미군의 정보보고서에는 3·10 총파업에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다.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술한다.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의 대중 선동에 의하여 3·10 총파업이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 대응책으로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추궁한다.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전개한다

1947년 3월 14일 제주에 내려온 미군정청의 조병옥 경무부장은 무질서한 치안을 잡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제주도 경비 강화를 이유로 경기도, 충청도 등에서 차출한 응원 경찰을 제주도로 파견한다. 북조선과 통모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허위 발표한다. 제두도를 '빨갱이 섬'으로 선포한다. 3월 15일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조병욱은 경찰 뿐만 아니라 서북청년단(약칭 ‘서청’)까지 동원시킨다. 조병욱은 극우 반공주의자이다. 장택상 수도경철청장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경찰력을 장악한 인물이다.  조병욱이 동원시킨 서청은 북한 사회 개혁 당시 월남한 황해도, 평안남ㆍ북도 출신들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된 극우 반공단체이다.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돕는 등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 마다 우익 진영의 선봉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남대문충돌사건, 부산극장사건,  백범김구 암살사건 등에 서청이 개입됐다.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경찰과 서청은  3월 18일까지 200명이 검거된다. 취조 과정에 고문이 자행된다. 1948년 4ㆍ3 발발 직전까지 약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된다.  

3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민심이 동요한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도 무장 투쟁를 결의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4·3민중항쟁이 시작된다. 경찰, 서청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한다. 경찰이 죽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다.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 조국의 평화 통일, 반미 구국 투쟁을 무장 봉기의 기치로 내세운다. 

미군정은 4월 17일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한다. 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무장대측 김달삼이 만나 평화협상을 성사시킨다. 하지만 5월 1일 우익청년단체가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된다. 김익렬은 현장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 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힌다.  미군정은 이를 무시한다.

5월 3일 미군정은 경비대에 무장대를 총격하도록 명령한다. 진압작전은 경비로 넘어간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중장은 조기 진압에 주력한다.

로스웰 브라운(Rothwell H. Brown)대령을 임명해 강경진압을 계속한다. 이 과정에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에 가담한다. 6월18일 화평책을 추진해 온 김익렬과 교체된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 당한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된다. 9월 9일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문제를 지역 문제가 아닌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다.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한다. 10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이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 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된다 마을의 95%이상이 불에 타 없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된다. 진압 군경과 여기에 가세한 서청 등 우익단체들은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재판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 사살한다. 

1948년 12월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교체된다. 조천면 북천리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400명 주민을 총살한다. 세화ㆍ성읍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된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된다.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을 병행한다.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한다.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 치러진다.  6월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李德九)가 사살된다.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된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한다.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된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된다.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제주도에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가 있다.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알뜨레 비행장의 맨 남쪽 격납고 옆 탄약고가 있던 섯알오름 밑에서 132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다. 유족들은 6년이 흐른 후에야 현장을 찾아 유골을 수습한다.  뼈들이 뒤엉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유골을 모아 대정읍 상모리 소재 사계 공동묘지 옆에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운다.  매년 7월 7일 칠석날 아침에 합동 제사를 지낸다. 묘지 조성 후 3년만에 세웠던 희생자 명단 등을 새긴 '백조일손지묘'비석은 5.16 이후 관(官)의 압력으로 두 동강나 땅 속에 파묻힌다.  '제2의 학살'이다.

5ㆍ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혁명 공약' 첫 번째가 반공 강화이다. 

혁명공약은 ①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④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민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등이다.

제주4.3에 희생된 양민의 시체가 널려있는 모습 @자료사진
제주4.3에 희생된 양민의 시체가 널려있는 모습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세웠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1949년 소령 시절 남로당에 휘말려 좌익 혐의를 받았다.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김종필의 조언을 받아들여 '반공'을 국시로 삼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학살을 자행했다.

4.19 희생자의 묘비까지 훼손시키며 반공을 내세운 것이다. 도덕성에 대해,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해 근간부터 회의를 품게 한다.  학살 문제는 극우 반공 세력의 아킬레스건. 그들은 학살의 진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5.16쿠데타 이후 '제2의 학살'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1948.10.27.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 여수시민들이 군의 통제에 따라 공터에 모인 장면
1948.10.27.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 여수시민들이 군의 통제에 따라 공터에 모인 장면

◆여순 민중항쟁 <1948.10.19> : 2만여 명 집단학살

제주4ㆍ3이 도화선이 되어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麗水順天十一九事件)이 발생한다. 여순사건은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과 좌익 계열 시민들이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이다.  '국가보안법' '빨치산' '빨갱이' 등 극단적 반공주의 산물의 단초가 된다. 2021년 정부는 74년 만에 여순사건특별법을 제장하고 희생자 45명, 유족 214명을 인정한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확인안됐지만, 전남도는 1만1131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1948.10. 여수주둔 14연대가 일으킨 반란사건을 진압에 나선 진압군이 민가에서 발생한 화재를 지켜보는 모습.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으로 라이프지에 실림.
1948.10. 여수주둔 14연대가 일으킨 반란사건을 진압에 나선 진압군이 민가에서 발생한 화재를 지켜보는 모습.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으로 라이프지에 실림.

1948년 10월 19일 미군정은 14연대에 제주 4.3 진압을 명령한다. 지창수 상사, 김지회 중위 등은 이승만 정부의 명령에 항명한다. 진압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동족상잔(同族相殘) 이라는 이유로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다.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이름으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성명에는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고 밝히고 있다.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 등의 내용이 담았다.

이날 저녁 8시 경찰서의 무기고와 탄약고를 접령한다. 비상나팔을 불어 연대병력을 집결시킨다. 여수·순천에 이어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 등 전남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한다. 친일 경찰을 체포한다. 친일파의 은행예금을 동결한다. 재산을 몰수한다. 식량창고를 개방해 시민들에게 배급한다.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판이 열린다. 우익인사들이 학살된다.

여순사건은 주한미군이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던 때에 발생한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군정관이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 South Korea-U.S. Military Accord>을 맺는다.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는 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반소반공 노선을 표방하던 미국의 정부 입장은 이승만의 정책과 일치한다.

미 군사고문단(U.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은 발생 당일인 10월 19일 정보를 전달 받는다.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준장은 하우스만을 호출한다. 기동작전군(Task Force)편성을 지시한다. 

20일, 로버츠 준장은 주한 미24군단 G-2에 여순 관련 정식 문건이 접수된 뒤, 곧바로 이범석 李範奭, 1900.10. 20 ~ 1972. 5. 11.)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정일권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총참모장 등을 소집한다. 하우스만을 군사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로, 총사령관의 고문자격으로 사령부에 배속한다.

로보츠는 한국군의 작전 수행 능력이나 무기 등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하다 판단한다. 미군은 작전과 지휘 만을 담당한다. 한국군이 진압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다만 한국군 사령부가 '적절한 대처'를 못하면 미군이 즉각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장악하도록 했다. 

여순에 참여한 미군 @LIFE 1948.10. 칼 마이던스.
여순에 참여한 미군 @LIFE 1948.10. 칼 마이던스.

1948년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사령부를 설치한다. 반군토벌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한다. 하우스만 대위는 군사고문단을 대표에 참전한다. 라이프(FIFE)지 칼 마이던스(1907~2004) 사진기자 등이 참여한다.

국군 15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선다. 광주, 마산, 대구, 진주, 군산, 대전에 주둔하는 10개 대대 병력을 광주, 남원, 하동에 집결시킨다.  이날 오후 6시 진압군은 순천, 보성, 광양 방면의 반군을 포위한다.

22일 계엄령이 선포된다. 여수ㆍ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진압작전을 본격화한다.  진압군은 순천시 서면 학구리를 점령한다. 앞서 반군 주력 2개 대대는 소규모 단위로 산개하여 광양·백운산·벌교·보성으로 도주한 뒤이다 제12연대 병력이 순천에 진입했을 때는 좌익청년·학생단체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진압부대는 23일 오전 순천을 완전히 점령한다. 

24일 4일 여수탈환작전은 장갑차를 앞세운 1개 대대와 23일 부산에서 급파된 1개 대대 병력이 LST로 여수만을 포위한 상태에서 개시된다. 미평부근의 교량근처에 매복중인 반군의 기습을 받아 제3연대 병력 270명이 사상 당하고 송호성 총사령관이 부상, 외신기자가 피살된 사태가 발생한다. 반군은 추격중인 광양방면의 제12연대 2개 대대를 여수탈환작전에 투입하는 것이 불가피해 졌다. 이러한 정치적 고려는 반군 주력이 섬진강을 거쳐 지리산으로 잠입하게 만들든다.

미평에서 진압군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여수읍내에 있던 반군 1개 대대가 야음을 틈타 진압군 포위망을 뚫고 벌교와 지리산 방면으로 도주한다. 여수는 1000여명의 노동자·좌익분자·학생 및 청년단체에 의해 사수되고 있었다.

1948년 여순에서 발생한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박정희 소령(맨 왼쪽),송호성 준장(왼쪽 둘째), , 하우스만(왼쪽 세번째) 등이 지도를 들여다 보면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다.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송 준장은 6.25전쟁 발발된 뒤, 납북되어 인민군 사단장을 지낸다. 사진 미국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1907~2004)이 찍은 사진으로 나이프지에 실림.
1948년 여순에서 발생한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박정희 소령(맨 왼쪽),송호성 준장(왼쪽 둘째), , 하우스만(왼쪽 세번째) 등이 지도를 들여다 보면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다.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송 준장은 6.25전쟁 발발된 뒤, 납북되어 인민군 사단장을 지낸다. 사진 미국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1907~2004)이 찍은 사진으로 나이프지에 실림.
여순사건 진압에 나선 진압군. 똑 같은 군복을 입은 반란군과 구별하기 위해 진압군은 철모에 흰색띠를 두르고 있는 모습.. @공정뉴스 자료사진
여순사건 진압에 나선 진압군. 똑 같은 군복을 입은 반란군과 구별하기 위해 진압군은 철모에 흰색띠를 두르고 있는 모습.. @공정뉴스 자료사진

진압부대는 25일 오전 장갑차를 앞세우고 제2차 공격을 시도해 오후 3시경 여수읍 외곽고지를 장악한다.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공격을 가한다. 장갑차를 읍내에 투입, 반군에 대한 공격을 한다.  밤이 되자 공격을 중지하고 고지로부터 철수한다. 미평과 같은 반군으로부터의 기습을 두려워했기 때문.

26일 정오  진압부대는 최종 공세를 편다. 장갑차, LST의 박격포사격의 지원과 함께 여수읍내로 진격한다. 좌익분자들의 저항이 결사적이다. 시가전으로 맞서 그만큼 여수읍은 황폐화된다. 27일 오후가 되서야 진압부대는 여수를 완전히 재탈환한다.

사건은 9일 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된다. 경찰은 보성에서는 24일 오후 2시, 벌교 25일 오전 10시, 광양 26일 오후 7시, 구례 27일 오후 2시, 여수 28일 오전 8시에 각각 업무를 재개한다.

진압군의 진압 작전은  봉기군이 아니라 여수ㆍ순천 전 시민을 반란군이라고 간주하고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한다.

진압군은 여수ㆍ순천을 수복한 뒤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한다. 서북청년단들과 우익 세력의 도움을 받아 14연대 협력자에 대한 색출에 나선다. 이들은 이미 지리산 산악지대로 탈출한 상황이다. 이들을 '빨치산'으로 부른다.  경위 조사나 심문 절차 등 요식행위도 생략된다.

오로지 우익단체의 '손가락 총'이 주민의 생사를 갈랐다. 지목되면 즉석에서 참수 당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일본군 출신 토벌대 5연대 1대대장 김종원(훗날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조사단에 총격을 가한 사람)은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온 사람들 중 7명을 일본도로 목을 벴다. 그러다 지치자 권총으로 사살했다. 당시 야만적이고 참혹했던 민간인 불법 처형 장면은 미국 FIFE지 사진기자였던 칼 마이던스에 의해 포착됐다.

마이던스는 "“반란을 진압한 정부군은 순천농림학교에 시민을 전부 모아놓고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보복을 하고 있었다. 자백한 이는 운동장 저쪽에 있는 구덩이 속에 처넣어져 총살되었다. 이름도, 죄명도, 누가 심문하고 누가 사형을 집행했는지도 기록되지 않았다.”며 참상을 폭로했다.

진압군의 ‘부역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한 달 반 동안 계속됐다. 계엄령 아래서 체포된 여수·순천 시민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수천 명이 총살당한 뒤 불태워졌다.

1949년 1월10일까지 인명 피해는 총 6250여 명(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00여 명), 이재민은 6만7332명이다. 민간인 학살과 토벌작전이 1949년까지 계속됐다. 사건 1년 뒤 전라남도의 피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순사건 희생자는 총 1만1131명이다. 군대에서는 대대적인 숙군 작업에 따라  4749명(국군병력 5%)이 좌익으로 숙청됐다.

여순사건사진 @LIFE. 1948.10. 칼 마이던스.
여순사건사진 @LIFE. 1948.10. 칼 마이던스.

여순사건 진압에는 친일 행적의 군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토벌사령부에 정일권(대령ㆍ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백선엽(중령ㆍ정보국장) 김정곤(소령ㆍ정보과장) 박정희(대위ㆍ작전참모)등이, 진압 지휘관에 김백일 (제5여단장) 송석하(3연대 부연대장) 최남근(15연대장 )등이다.

일제가1939년 8월에 항일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한 간도특설경비대에 소속된 군관 출신이다. 만주에서 항일 독립군을 토벌한 경험이 있던 이들의 전투력이 여순 학살에서 드러낸다.

여순은 이승만에게 호재가 된다.  여순을 계기로 철권 통치와 반공노선을 강화한다.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선다.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한다. 김창룡이 숙군을 주도한다. 이승만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맘 놓고 자행한다. 정치적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을 가차 없이 숙청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군력을 키워간다. 김창룡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고,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 했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ㆍ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김창룡은 군 숙청 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고 시행했다. '스테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쳤다.

김창룡이 1848년 첫 숙군작업에 나선 뒤, 남로당 군사부책 이재복과 그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을 체포한다. 이 과정에 조직명단이 입수된다. 당시 소령이던 박정희의 이름이 처음 발견된다. 11월11일 박정희는 체포된다.

1949년 2월 8일 군사재판1심에서 무기징역과 파면을 당한다. 김점곤(1연대 정보주임)ㆍ강측모(전 함경북도 지사)ㆍ백선엽(육군본부 정보국장), 하우스만 대위의 노력으로 심사장관의 조치로 징역 15년으로 감형된다. 이후 수사에 협조한다.

백선엽ㆍ김안일(방첩대장)ㆍ김창룡(대위) 3인의 보증을 받고 집행정지 판결로 풀려나 민간인 신분이 된다. 이후 박정희는 6개월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2군 포병단장에 발령받는다. 1958년 비밀취급 인가가 취소된다. 

여순사건 당시 확살되어 순천 들판에 마구 버려진 시신들@출판사 지영사
여순사건 당시 확살되어 순천 들판에 마구 버려진 시신들@출판사 지영사
진압군이 협력자를 색출하는 동안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있는 주민과 어린이들 @출판사 지영사 
진압군이 협력자를 색출하는 동안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있는 주민과 어린이들 @출판사 지영사 

하우스만과 박정희의 인연은 5.16쿠데타로 이어진다. 1960년 3월 1일, 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한다. 이후 쿠데타 직후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간다. 하우스만은 다음날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참모 총장, 합장의장, CIA에 박정희와 한국상황에 대해 브리핑한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공로로 미국방장관에게서 공로표창을 받는다. 

여순사건 당시 순천에서 학살당한 희생자 앞에서 통곡하는 두 여인과 이들 뒤에서 바라보는 미 고문관(CIC요원). @LIFE 칼 마이던스 1948.
여순사건 당시 순천에서 학살당한 희생자 앞에서 통곡하는 두 여인과 이들 뒤에서 바라보는 미 고문관(CIC요원). @LIFE 칼 마이던스 1948.

 

미국 CIA가 2017년 공개한 기밀문서. 여수, 순천, 지리산을 여순사건의 주요 발생 지역으로 표기한 지도에는 'To Cheju-do'와 화살표가 제주도를 향하고 있는데, 이는 여수 제14연대 제주도 출동을 의무하고 있음.
미국 CIA가 2017년 공개한 기밀문서. 여수, 순천, 지리산을 여순사건의 주요 발생 지역으로 표기한 지도에는 'To Cheju-do'와 화살표가 제주도를 향하고 있는데, 이는 여수 제14연대 제주도 출동을 의무하고 있음.

미국 중앙정보국이 2017년 7월 18일 인터넷 홈페이지 전자 독서실에 기밀 해제문서 83건 1200만쪽 중에는 이승만 정권이 여순사건을 이용해 김구 등 정적(政敵)제거에 이용했다고 CIA는 평가한다.  

이승만은 여순 사건을 계기로 언론 통제를 강화하고, 극우 반공체제를 구축하고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을 제거할 기회를 잡은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김구 등 정적 제거를 위해 이 사건을 이용한다. 정권을 비판하거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을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분법적 이념 프레임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이런 프레임은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병폐가 되고 있다. 

미군 장교가 여순사건 당시 전쟁을 지켜보고 있음. @1948.10. LIFE지
미군 장교가 여순사건 당시 전쟁을 지켜보고 있음. @1948.10. LIFE지

변수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이사는  "여순에서 2만여 명을 학살됐다.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6·25전쟁의 최대의 수혜자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전쟁이 발생했고,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불법 개헌해 정권을 유지했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은 정권을 유지할 길이 없었다.  오늘 날까지도 태극기 부대가 준동하는 우익 친미 기독교 국가가 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돌아보면 하우스만이 한국사회를 이분법적 프레임을 만들고 국민을 분열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이후 반공이라는 미명아래  정권 유지를 위한 규제를 만든다.  △보도연맹 창설 △예비검속 연좌제 실시 △김창룡 주도 숙군작업(항일독립운동· 반이승만 성향 군인, 좌익세력 청산) △친일경찰 서북청년단원 대거 입대. 정규경찰직 전환 △군대가 체제 수호  부패 온상 변모 △ 전국 대학 학도호국단 창설 △국가보안법 제정(1948.12.1. 정치적 반대세력 무제한 탄압 제도화)등이다.

변수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이사는 “CIA 자료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를 미국이 알면서도 방조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미국이 남한의 체제를 반공 체제로 구축하려고 이승만을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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