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신탁통치(信託統治·Trusteeship) 오보(誤報)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악의 오보 사건이다.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三相會議·1945.12.16.~12.25.) 결과를 보도한다.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한다. "미국은 즉각 한국의 독립을, 소련은 신탁통지를 주장했다."고 보도한다. 오보다. 역사적 진실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 소련은 즉각적인 한국 독립을 주장한다.
동아일보는 이를 정반대로 보도를 한다. 찬탁한 좌익은 민족을 팔아 먹은 '제2의 매국노·일진회' 신세가 된다. 이를 계기로 정국이 분열된다. 반탁과 신탁 논쟁이 좌우간 이념 대립 구도가 본격화된다. 심지어 서로를 적대하고 죽이는 갈등으로 치닫는다.
이승만이 정권을 잡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李承晩·1875.3.26.~1965.7.19.)의 보수 진영이 득세한다. 반대로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김구(金九·1876.8.29.~1949.6.26)의 한독당이 위축된다.
신탁통치는 1945년~ 1946년은 해방정국에서 한국 정치사를 가르는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인 만큼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3상회의 결정과 국내 전달과 확산 과정에 특정 세력의 개입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3상회의 결정은 1945년 12월 27일 워싱턴발 '합동통신'의 지급보(至急報)로 최초 국내 유입된다. 동아일보가 이를 받아 보도한다. 이후 조선일보, 민중일보, 중앙신문, 신조선보 등 대부분 매체들이 제목만 바꿔 1면 상단 헤드라인 또는 중간에 그대로 보도한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스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이 기사는 3상회의 당시 미·소 양 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한다.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보도인 셈이다.
미국은 신탁통치, 그것도 10년간의 신탁통치를 제안한다. 소련은 즉시 독립을 제안한다. 3국 외상들은 협상을 거쳐 ①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임시정부 원조를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를 설치한다. ③한반도에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5년 동안 공동위원회가 한반도를 신탁통치안을 임시정부와 협의해 제출한다고 합의한다.
합동통신의 기사는 분명한 오보였다. 이를 동아일보가 확인없이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오보 투성이였다. 애초부터 신탁통치안은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였던 지역들의 전후(戰後)처리를 위해 미국이 만든 정책이었다.
1943년 11월 미국·영국·중국이 참가한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1943.11.22.~26) 때도 영국은 독립반대, 미국은 신탁통치 실시, 중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결론 없이 원론적으로 한반도의 독립을 확인하는 선에서 끝났다.
동아일보는 남한에서 일어날 격력한 반탁 운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신탁통치 제안자를 미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지목한다. 38선 분할이 지속되는 것도 소련 때문인 것처럼 몰아갔다. 동아일보의 오보는 반탁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산이 된다.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오보 배후에 미군정이 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 당시 미 군정은 기사 내용을 철저히 검열했다. 이는 최소한 이 오보를 용인한 것이다. 미국의 통신사인 AP가 워싱턴에서 최초 발송한 기사이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미군 기관지 <성조기> 태평양판(Pacific Stars and Stripes)에서 AP와 UP를 출처로 하는 같은 내용의 기사가 동일한 날짜(27일)에 실렸다.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랄프 헤인젠 기자이다. 이전부터 날조기사로 유명하다. AP와 UP에는 원문이 남아 있지 않아 미 군정이 오보 배후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당시 미 군정청 공보부는 정치동향’Political Trend·1945.12.29.자)보고서를 통해 “합동통신사가 배포한 기사가 강력한 반소 감정을 일으켰다”면서 왜곡보도의 출처로 합동통신사를 지목했다.
‘신탁통치’ 특별보고서는 워싱턴발이 아니라 미 육군이 태평양지역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위해 도쿄에서 발행하던 12월27일자 <성조기> 태평양판(Pacific Stars and Stripes)이라고 적었다.
미국과 친미 세력은 신탁통치에 대한 당시 국민 감정을 이용해 소련과 국내 공산주의자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오보의 배후라는 추정이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식민지를 처리하기 위해 신탁통치안을 수립한다. 한반도의 신탁통치안도 이 같은 정책안에 기반한 것이다.
당시 해방 정국에서 한국인들은 '신탁통치'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가졌다. 일제 식민지의 연장선상으로 본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동아일보가 오보를 낸다. 좌우 이념대립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우파는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 대중의 정서를 자극한다. 당연히 신탁통치를 식민통치라고 생각한 국민들 역시 반대하고 나선다. 좌파 역시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취한다. 통치 주체가 임시 정부로 된 것을 확인하면서 신탁 찬성으로 돌아선다. 외세가 아니라 임시 정부가 통치 주체가 돼서 신탁통치를 한다고 하니 좌파 입장에서 찬성을 하게 된 것이다.
좌우 이념대결은 점차 적대시된다. 소위 빨갱이 탄압이 시작된다, 우파는 신탁을 찬성하는 좌파를 빨갱이라면서 몰아세운다. 국민들 역시 우파의 목소리에 동조한다. 그러면서 좌파의 설자리가 좁아지기 시작한다.
"<동아일보>에 미국의 정책인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안했다는 허위보도가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정보 조작을 통한 공작 정치의 냄새가 짙다. 소련의 격렬한 반발을 부를 게 뻔함에도, 허위 보도를 묵인하며 반탁운동을 '반소·반공'에 활용했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존 하지와 미군 접령통치 3년> "공작정치 분단 씨앗 뿌린 냉전의 용사" 2003-8-9.한겨례신문 기사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2003년 발표한 논문<1945년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에서 동아일보 오보는 정보 조작을 통한 미 군정의 공작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가 배후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동아일보가 3상회의를 원래 대로 보도했다면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은 신탁통치 30년을,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가 5년으로 합의한 사실이 그대로 보도됐다면, 당시 반미 정서가 강했던 한반도에 반미 정서가 더욱 확산됐을 것이다. 사실 미군정은 9월 들어서면서 쌀값 폭등, 인플레이션 등이 발생하면서 반미 정서가 대중들에게 있었다. 동아일보의 오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입지가 더욱 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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