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만을 놓고 본다면 이민족 지배하의 학살에 비해 동족 내의 '빨갱이 사냥'이 규모나 강도에서 훨씬 잔혹했다" <대한민국사>@한홍구, 한겨레출판 

보도연맹학살사건(國民保導聯盟虐殺事件)은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에 함락된 지역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이적 행위(군경과 그 가족에 대한 밀고, 체포, 살해 등)에 대한 '처리'를 명령한다.  장석윤 내무부 치안국장이 전국 경찰서에 무선 전보로 하달한다. 전국 요시찰 단속 및 형무소 경비의 건(6.25)→불순분자 구속처리의 건(예비 검속해서 본관 지시가 있을 때 까지 석방을 금하라. 6.30)→좌익과 국민보도연맹원 처리(6.30) 등의 지시가 내려진다.  6월 28일부터 9월 중순까지 무차별 학살이 진행된다.  최소 10만에서 30만 명의 민간인들이 대한민국 경찰·헌병·군인·우익청년단 손에 살해당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인구는 2000만명이다. 남한 인구의 최소1~2%, 많게는 5%가 학살 당한다.

육군본부 정보국 CIC, 헌병, 경찰,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를 비롯해 서북청년회 등에 의해  집단 학살이 자행된다. 김구ㆍ여운영 등을 지지하는 반이승만 세력를 제거하는 데 활용된다. 

◇정부 주도 보도연맹 설립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을 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반공 교화 단체이다. 보도(保導)는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의미이다.

1948년12월에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 인사를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취지로 결성된다.  법률과 훈령에 의해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다. 

국민보도연맹 경북 고령군연맹이 발행한 가맹자 조두규의 맹원증. 반공을 다짐하는 ‘강령’과 상시 휴대의무 등을 명기한 ‘주의사항’이 보인다. 조씨는 낙동강 왜관철교가 폭파되기 1주일 전쯤 성산지서에 연행된 뒤 고령 강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434번인 걸로 보아 고령군 연맹원이 그보다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 경북 고령군연맹이 발행한 가맹자 조두규의 맹원증. 반공을 다짐하는 ‘강령’과 상시 휴대의무 등을 명기한 ‘주의사항’이 보인다. 조씨는 낙동강 왜관철교가 폭파되기 1주일 전쯤 성산지서에 연행된 뒤 고령 강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434번인 걸로 보아 고령군 연맹원이 그보다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제도(吳制道ㆍ창시명 吳山制道, 1917.11.15.~2001.7.1)치안국 정보수사과장(검사)의 제안에 따라 내무부·국방부·법무부와 사회지도자들이 협의 후 정부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그대로 모방했다. 

친(親)대한민국, 반(反)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향을 분명히 했다. 좌익전향단체를 표방했지만, 조직의 실질적 성격은 국가가 주도한 관변단체이다. 반공사상을 전파하고 사상을 전향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당시 미 점령군과 친미파로 재빨리 변신한 친일파의 절대적 지원을 받은 이승만은 정권에 저항할 위험있는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을 관변(官邊)조직으로 포섭해 세력을 악화하고 제거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창설한다.

1949년 4월 서울에서 보도연맹이 결성된다. 10월25일부터 11월30일까지 자수 기간을 설정한다. 과거를 묻지 않고, 취직을 보장해 준다고  약속한다.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다. 김용환(일러스트), 염상섭(소설가), 황순원(소설가), 정지용(시인)등이 대표적 인물.  

당시 지역 활당제가 있어 공무원들은 가입 실적을 올리려고 공산주의자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까지 무리하게 보도연맹에 등록시킨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주거지를 옮기거나 떠날 때 반드시 관할 경찰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거주·이전의 권리를 제한받았다. 전향여부가 의심되어 경찰에 의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됐다. 정기적으로 동태를 감시당하는 ‘좌익혐의자’ 또는 ‘요시찰인’으로 취급됐다.

한국전쟁이 발생한 뒤 보도연맹 명단은 살생부가 된다. 정부와 경찰은 검속(檢束)과 소집해 구금한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즉결처분을 단행한다. 단순히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 만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음을 당한다. 심지어 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은 평범한 민간인도 학살 과정에 휘말려 죽임을 당한다.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에 미움을 산 민간인들까지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 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자 전쟁범죄이다.

공주 금강변 학살지(살구쟁이)로 끌려가는 보도연맹원. 군경은 보도연맹원을 트럭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공주 금강변 학살지(살구쟁이)로 끌려가는 보도연맹원. 군경은 보도연맹원을 트럭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전격적으로 남침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후퇴 과정에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북한이 접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을 의심한다.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무차별 검속이 실시된다. 즉결처분도 시작한다.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된다. 특무대(CIC),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과거 행적을 심사한다.  남로당 가입,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는다.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한다.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는 1999년 12월 미국 국립보관서@이도영 박사.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는 1999년 12월 미국 국립보관소(NARA)에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수감자를 대전 골령골에서 학살한 내용의 기밀문서를 찾아낸다. 18장의 사진과 글로 작성된 문건이다. 작성자는 미국 극동사령부 소속 주한연락사무소 총책임자인 에버트 소령이다. 사진은 라이카 카메라로 에버트 소령이 직접 촬영한 것이다.  18장 사진 중 유독 우리를 짜르는 사진이 있다. 바로 이 사진. 짧은 머리의 한 사내가 시체들 옆에 엎드려 있고, 그가 카메라를 절망에 가까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다. 살려달라는 애원이다. 프레임 밖의 상황은 없다. 이 한장의 사진은 비극스런 당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비평가 수전 손택은 저서'사진에 관하여'를 통해 "10여 년 뒤에 발생한 베트남 전쟁보다 생태계 파괴와 집단 학살이 훨씬 더 철저히 이뤄진 한국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볼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이나 모두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했지만, 수용하는 집단이 달랐던 것이 정확하다. @이도영 박사. 

군·경은 북한군의 공격에 패해 후퇴하면서 재판과 심사 등 절차 없이  집단 살해한다.  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다.

이승만 정부 이후 들어 선 군사 정권마다 보도연맹 관련 사망한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한다. 명부를 작성해 연좌제를 적용해 취업, 사업 등에서 불이익을 줬다. 유족들은 한국 사회에서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다.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온다.

보도연맹학살사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 미 정령 당국과 미국 정부도 개전 초기부터 정치적 반대자들까지 포함된 무차별 학살 사실을 자세히 보고 받았다. 그것을 방조하고 승인까지 한다. 이미 대량 학살이 저질러진 뒤에야 항의하고 경고하는 시늉만 한다. 

주한 미 대사관의 부영사(1948~1950, 1958~1963)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 (좌)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 초판 표지(우)
주한 미 대사관의 부영사(1948~1950, 1958~1963)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 (좌)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 초판 표지(우)

주한 미국대사관 부영사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Gregory Henderson,,1922∼1988)은 저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1968)>를  통해  1950년 7월 4~5일 당시 보도연맹학살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민군이 형무소 문을 열어 정치범과 재소자들을 모두 풀어줬다. 재소자들은 무장한 뒤 자신들을 감옥에 보낸 사람을 찾아 보복에 나섰다. 한국군 사령부가 있던 서빙고에 인민재판소가 곧바로 설치됐다. 한때 보도연맹을 이끌던 정백(鄭栢, 1899. ~ 1950.7. 3.)이 우두머리가 됐다.  보도연맹원 수천 명이 거리로 나가 경찰, 공무원, 군인과 그 가족 등 우익을 지목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목된 사람은 인민재판을 받은 뒤 즉결 처형되고 있다.”

그레고리 핸더슨은 1948년 26세 나이로 주한 미국 대사관 부영사로 서울에 왔다. 1948~50년과 1958~63년 두 차례 한국에 머물면서 7년간 국회 연락관ㆍ문정관ㆍ대사특별정치보좌관 등을 지냈다. 한대선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질 정도로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1963년 공직에서 물러나 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각종 매체에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한국에서 핸더슨의 저서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됐다.

◇경상도 지역 학살 사례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군과 경찰에 의해 전국에서 30만명이 학살당한다.  경상도 동부지역에서 대단히 심했다. 상대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에서는 적었다. 왜 그랬을까? 1950년 6월 25일 남침이 시작하자마자 북한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은 한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대령)을 쉽게 격파한 다음 빠른 속도로 남하한다.

한국군과 미군이 경부 국도를 중심으로 방어에 치중했다. 방호산은 이곳을 우회하여 남진한다. 호남지역은 한국군 5사단(이형석대령)과 7사단(민기식대령)이 방어한다. 병력 중에서 20%정도만 개인 화기를 지녔을 정도로 빈약했다. 방호산 사단은 이들을 쉽게 격파하고 대전을 우회, 천안에서  공주와 논산을 거쳐 7월 22일에 전주 점령, 다음날 23일에는 광주 점령 그리고 바로 이어 순천과 하동으로 진출한다. 마을 사람들은 지나가는 군인들이 북한군인지도 모르고 길에 나와 만세를 부른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학교를 다니던 필자도 신작로에 나가 열심히 만세 부르던 기억이 난다.

방호산 사단이 빠르게 호남지역을 점령한다. 경찰서나 형무소에 수감 중인 보도연맹원 등 수감자들을 모두 학살하기 전에, 북한군이 먼저 도착하여 석방한다. 석방된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후퇴하자 대부분 지리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으로 활동한다.

북한군의 동부지역 남진(南進)은 국군와 유엔군이 협조한 낙동강방어선에 막혀 지지부진한다. 군경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할 시간이 충분했다. 때문에 학살자가 많았다.

19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경상 지역의 일부가 연좌제에 걸려 취직도 못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유능한 젊은이들이 연좌제를 피해서 사관학교에 들어가거나 군에 들어갔다.

1951년 4월 대구형무소 인근에서 벌어진 총살.@미국국립문서보관소(NARA)
1951년 4월 대구형무소 인근에서 벌어진 총살.@미국국립문서보관소(NARA)

◇대전 골령골 집단학살

대전 골령골 집단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대전형무소(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묵정동34, 현 출입국관리소 위치)에 수감된 수감자를 학살한 사건이다.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수감자와 지역 보도연맹원 등 6900명이 사망한다.  

당시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 학살을 자행한다. 심용현(1918.8.30.~1986.7.20) 전 성신여대 이사장이 당시 헌병대 중위로 근무하면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주도한다

심 중위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 이관술(1902.4.25.~1950.7.3) 등 정치범을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가 사격 명령을 내리는 등 골령골 집단학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가 이관술(왼쪽 세 번째 중앙의 양복차림)이 동덕여고보 교사 시절 사진. @자료사진
독립운동가 이관술(왼쪽 세 번째 중앙의 양복차림)이 동덕여고보 교사 시절 사진. @자료사진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해방직 후 조선공산당 간부로 활동한다. 해방 후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리던 대중적 정치인이었다. 1946년 5월 미 군정이 독립운동가와 노동자에게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精版社 僞造紙幣 事件)'누명을 쓰고 대전형무소에 투옥된다.  사건의 피의자는 독립운동가인 이관술, 박낙종, 신광범, 권오직 등이다. 이들에게 누명을 씌운 경찰은  노덕술, 이구범, 최난수, 검찰 조재천, 판사 양원일이다. 친일파드이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에 이관술을 수차례 고문한 고문기술자로서, 미 군정과 결탁한 친일파 경찰이 독립운동가에게 누명을 씌어 투옥시킨다.

정판사위조사건은 해방 후 최초의 '사법 살인'이다.  이관술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대법원은 2015년 국가배상 판결을 내린다. 대법원은 "수감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하는 것은 불법부장하다"고 판결한다.

두번째 학살은 1950년 9월 북한 조선인민군에 의해 발생한다.  7월 21일 인민군이 대전을 접령한다. 인민군은 곧장 산내 골령골의 집단 희생을 인지한다.

인민군은 양민 학살 이유로 한국군 포로, 우익 인사, 군인, 경찰, 공무원, 서북청년단 등을 모조리 찾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대전 경찰서, 대전 형무소에 분산 수감시킨다.  국군 장교, 판사, 검사 등은 사형시킨다. 경찰, 군인, 면장, 반장 등은 사상 검증을 한다.  

9월 2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급히 후퇴하게 된 인민군은 경찰서 앞마당으로 모조리 끌고와서 벽에 묶어놓고 총을 쏘아 학살한다. 

◇해남 송지면 갈매기섬 학살 사건

해남 송지면 갈매기섬 학살 사건은 1950년 7월 경찰이 예비 검속에 해남경찰서에 구금된 보도연맹원 600명 중 200여 명을 갈매기섬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해남의 북부 지방인 해남읍, 계곡면, 마산면, 산이면, 화원면, 삼산면의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6월 말에서 7월 초 경찰지서에 연행되거나, 지서로 출두하여 해남경찰서에 구금된다. 7월 16일 화산면 해창항에서 배에 태워져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 갈매기섬에서 총살당한다.

남부 지방인 현산면, 북평면, 북일면, 송지면의 보도연맹원들은 송지지서와 창고에 구금된다.  7월 16일 송지면 어란항에서 배에 태워져 갈매기섬에서 총살한다.

이후 또 한 차례 학살이 발생한다. 경찰은 해남식량영단 창고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좌익활동가를 둔 가족들을 7월 22일 화산면 해창리에서 학살한다.

8월 북한 조선인민군이 해남을 접령하던 시기에 인민군에 의한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에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0월 6일 경찰이 해남을 수복한다. 다시 북한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던 혐의자들을 학살한다.  '피는 피를 부른다'라는 말이 현실에서 작동됐다.

해남은 일제감정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하던 지역. 1933년 5월 해남·완도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가 조직된다. 김홍배, 오홍탁, 김정수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해남지부관련항목 보기, 인민위원회 해남지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1946년 11월 해남 추수 봉기를 전남 최대의 봉기로 이끈다.  경찰 지서를 공격해 경찰 10명이 피살되고 33명이 부상당한다. 11명은 실종된다. 봉기에 참여한 농민 54명이 피살되고, 61명은 부상당한다.  357명은 체포된다. 해남 추수봉기에 참여했던 자들은 1949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에 겅제 가입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을 받고 구금됐다가 집단 학살을 당한다.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뒤 경상북도 경산·청도, 대구 등에서 끌려와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경찰과 국군이 1950년 7~8월 경산시 코발트 광산 등에서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당시 경상북도 경산, 청도, 영천, 경상남도 창녕, 밀양, 충청북도 영동 등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검속된다. 

피해자 대부분은 보도연맹원.  가입 당시 이름과 주소를 기재했기 때문에 손 쉬운 표적이 된다. 경산경찰서를 거쳐 경산수리조합 창고, 경산중앙국민학교 등에 구금된다. 즉석에서 살생부(殺生簿)가 작성된다. 경산경찰서 사찰과와 CIC 경산파견대는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을 갑·을·병 등급으로 분류된다. 병은 석방하고, 갑·을 등급은 코발트 광산으로 이송한다. 

2-3명 단위로 손과 발을 묶은 뒤 백자산 산 중턱의 수직 50m나 되는 수직 갱도 앞에 세운다.  앞에서 밀어 갱도에 떨어 트리거나, 총격을 가해 중심을 잃도록 해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트렸다.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다. 폭약까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수직굴이 꽉 차자 인근의 골짜기인 대원골로 끌고가 살해한다.

"대구서 경산을 지나 자인방면으로 가는 국도에서 우측으로 향하여 약 3킬로 들어가면 일제강점기에 '돈방석'이라고 알려졌던 코발트 광산 터가 있다. 이곳에는 6.25사변 당시 그해(1950년) 여름 8월경 현재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총 가진 사람들에게 총살되어, 그 시체가 광산 곳곳에 널려 있는데, 1,500구에 달하고 있어 '해골광산'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구매일신문 1960.5.22.자 기사.

"갑자기 평산 1, 2구 주민들을 몰아내고, 포장을 친 트럭이 하루 5대씩 6일에 걸쳐 왔습니다. 매일 총소리가 들렸고, 총을 쏜 군인들의 눈이 빨개, 흉측했습니다" 

경산신문사, 『경산코발트광산의 진실』, 2008

위령제가 열리기 두 달 전인 1960년 6월 6일 저녁에는 당시 경산군 안심면 유족 30여 명이 전쟁 기간에 불법학살을 저지른 전 민보단 부단장 김만석의 집을 습격해 가재도구 20여 만환 어치를 파괴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유족 5명이 재물손괴죄로 구속되었다.

대구매일신문 1960.6. 8.자. 노용석,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사』, 2018 산지니에서 재인용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2009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363구의 유해를 발굴한 뒤, 2009년 11월 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다. 이 사건 희생자를 18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경산유족회와 경산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인근 지역 주민과 생존자의 증언을 종합해 3500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2016년 9월 대법원 1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 사건 등 6건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의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최근 내린다.

◇신천(信川)학살사건 <1950.10.17.~12.7.: 52일간>

신천학살사건을 소재로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대학살 The Massacre in Korea'은 1951년 5월 프랑스 파리 살롱 드메에서 전시됐다. 피카소는 1950년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신천대학살을 소재로 하여 한국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제작했다. 한국전은 1936년 피카소의 모국인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을 연상시키고 두 전쟁 모두 좌익과 우익이 대립해 무수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총칼 앞에 처참하게 발가벗겨진 여인과 어린 아이들의 공포와 분노를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게르니카와 함께 대량 학살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대표적 반전 작품이다.미군에 의한 신천 양민학살 배경설 때문에 반미작품으로 찍혀 1980년대까지 금지예술품 목록에 등재됐다.
신천학살사건을 소재로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대학살 The Massacre in Korea'은 1951년 5월 프랑스 파리 살롱 드메에서 전시됐다. 피카소는 1950년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신천대학살을 소재로 하여 한국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제작했다. 한국전은 1936년 피카소의 모국인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을 연상시키고 두 전쟁 모두 좌익과 우익이 대립해 무수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총칼 앞에 처참하게 발가벗겨진 여인과 어린 아이들의 공포와 분노를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게르니카와 함께 대량 학살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대표적 반전 작품이다.미군에 의한 신천 양민학살 배경설 때문에 반미작품으로 찍혀 1980년대까지 금지예술품 목록에 등재됐다.

신천군학살사건(信川郡虐殺事件)은 한국전쟁이 벌어진 황해도 신천군에서 발생한 민간인 3만5000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전쟁의 대혼란 속에 격화된 좌우 대립이 빚은 동족 간 학살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미군 접령 하에 있던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 1개 중대(중대장 해리슨 중위)에 의해,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3만5383명의 양민을 확살한다.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된다. 극우 기독교 청년단체들이 주도한다. 

이는 국제사법단체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 조사위원회가 휴전 1년 전인 1952년 북한을 방문해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이다.

1950년 12월 7일,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해리슨(신천 미 점령군사령관)은 그의 휘하에 있던 미군 부대와 이승만의 원군 장교들에게 철수는 ‘일시적’이며 ‘전략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주민들에게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남아 있는 자는 모두 실질적 적(敵)으로 간주할 것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이다.  모든 빨갱이 지지자를 섬멸하라"고 지시한다. 모든 인민군 병사의 가족들과 부역자 가족들은 빨갱이로 간주된다. 그의 명령은 그대로 실행된다. 그날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한다.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도 학살된다. 미군은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다. 그리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 던진다. 건물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두 아이를 창 밖으로 밀어낸다. 한 아이는 총에 맞았다. 한 아이는 도망친다.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다. 해리슨과 다른 장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 1952.3.31. 작성한 보고서  '4장 대량학살, 살해 및 기타 잔혹행위' 중

소설가 황석영(黃晳暎, 1943.1.4.~)은 1950년 10월 경부터 황해도 신천과 재령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다룬 소설 <손님 The Guest>을 2021년 출간한다. 황석영이  1989년 방북 시기에 북한 측의 안내를 받아 직접 학살 현장을 방문하고, 이후 10년 간의 생존자와 목격자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담아냈다. 

남한으로 피난 갔던 기독교인들이 신천으로 돌아와 이 섬뜩한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현대사에 나오는 학살 현장에는 예외 없이 이승만 장로를 비롯하여 서북청년단 등 기독교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미군의 주구가 되어 학살을 자행했다.

진실위가 발굴한 분토골 학살 희생자 유해. @진실위
진실위가 발굴한 분토골 학살 희생자 유해. @진실위

◇30만명 학살의 주역 누구인가?

한성훈 연세대 ‘역사와 공간연구소’ 연구교수의 저서 <가면 권력>을 통해 보도연맹학살사건을 이승만 정부의 야만적 국가권력이 저지른 최대 범죄라는 말한다.

연맹 창설 제안자는 오제도 검사와 선우정원 검사이다. 전시에는 이승만과 독대한 김창룡 특무부대장이 거의 전권을 행사한다. 신성모 국방장관, 조병욱 내무장관,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장석윤ㆍ김태선 치안국장, 장도영 육군본부 정보국장, 한웅진 정보과장 등이 개입한다.

이승만의 최측근 친위세력인 장석윤 치안국장은 전국 요시찰인 단속과 형무소 경비 명령을 내린다. 장은 일본육사 24기 출신으로 방첩대(CIC)전신인 대한관찰부 사정국, 대한 정치공작대 책임자였다. 미 제24군단 정보참모부에서 활동하다 한국 주둔 제 971 CIC파견대에서 근무한다. 정보·공작 전문가이다. 미군 정보·방첩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정보원으로 활동한다.

이들은 1948년 4월 3일 서북청년단원(‘서청’으로 약칭)을 제주도에 대거 투입하여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구실로 양민 3만 명을 학살하였고, 여순에서도 2만 명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중 보도연맹원 30만 명이상을 집단학살한 최고위층 명령책임자들이다. 물론 근본 학살책임자는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미군정관이다.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가 이승만과 조병옥을 움직인 실무담당자였다.

◇이승만의 가장 악독한 학살사건

6.25 전쟁 중 보도연맹원 학살은 이승만대통령이 행한 악질적인 범죄 중 첫 번째로 꼽는다. 이승만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형무소에 일시 수감된 자들을 총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학살은 6.25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부터 시작한다.             

서대문 형무소를 비롯 경찰서유치장에 잠시 구금되어있는 자들을 끌어내 학살했다. 모두 학살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미처 학살하지 못한 보도연맹원들은 북한군이 내려와 석방한다. 전주시 진북동에 위치한 전주형무소에서는 7월 4일부터 7월 16일 사이에 약 1,500명을 황방산과 그 일대에서 학살하한다. 총을 쏜 군인들은 7사단 3연대 소속이었다. 청주형무소에서는 재소자와 김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일시 수감되어 있는 약 4천여 명 정도의 군인들을 모두 학살한다. 총살집행지휘는 충북지구 방첩대 CIC가 담당한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군인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정승화(1929-2002) 장군의 저서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에는 한국전쟁 초기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청주형무소처럼 우리국군에게 학살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한국전쟁 초기 국군이 왜 그렇게 쉽게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본다.

1950년 7월 초순, 일제강점기 항일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네 동생인 김구봉, 김용봉, 김봉기, 김덕봉은 경남 밀양의 자택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한테 끌려간다. 이렇게 끌려간 약산의 네 동생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밀양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 300여 명과 함께 학살당한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정적(政敵)이었던 김구 계열과 김원봉 일가의 씨를 아예 멸균실 수준으로 철저히 말려 버렸다.

◇남경대학살 수법 닮은 보도연맹원학살 

보도연맹원학살은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Nanking Massacre)을 닮았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일본군이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남경(南京)을 점령한 뒤, 일본군에 의해 30만명이 대량 학살을 당한다.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다.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수만 명이다.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로 난징시 안의 건축물 약 23.8%가 불에 타고,  88.5%가 파괴된다. 일본군은 난경 뿐만 아니라 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쑤저우(蘇州)·우시(無錫)·우후(芜湖)·양저우(楊州) 등 중국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 일대에서 학살과 약탈, 강간을 자행한다.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와 일반인을 성 외곽이나 강가로 끌고 가서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살해한다.  총알을 아낀다며 산 채로 땅에 묻었다.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인다.  중국인을 대상으로 병사들의 총검술 훈련을 한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 舊 東京日日新聞)은 두 명의 일본군 소위가 누가 먼저 일본도로 100명의 목을 자르는 것을 경쟁했다는 기사가 1937년 12월 13일에 실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1946년에 도쿄(東京)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규모를 15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난징대학살 당시 중지나방면군사령관(中支那方面軍司令官)인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가 학살의 방지와 책임자 처벌을 소홀히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된다. 1946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열린 난징군사재판에서는 당시 난징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6사단 사단장 다니 히사오(谷壽夫), 100인 참수로 언론에 보도된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 당시 육군 대위로 민간인 300인을 참수한 것으로 알려진 다나카 군기치(田中軍吉)를 사형에 처한다.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던 아사카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은 왕족에게는 전쟁 범죄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 처벌에서 벗어나는 등 난징대학살의 책임자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수법을 보고 배운 일제 군경 출신들은 해방 이후에 한국의 군경에 들어와 같은 수법으로 보도연맹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공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