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좌)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우)
김구(좌)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우)

1949년 6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백범(白凡)김구(金九,(1776.8.29. ~1949.6.26)선생은  자신의 저택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 1817.3.24.~1996.10.23)가 쏜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5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서울 육군 형무소에 갇힌다. 그해 11월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 1891.5.26.~1960.5.29.)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1915.4.17~1950.7.26.)의 상신을 받아들여 징역15년으로 감형된다. 6ㆍ25전쟁으로 인해 6월 27일 형집행 정지로 가석방된다. 7월 10일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의 특별 명령 4호로 육군소위로 원대 복귀한다. 9월 중위로 진급한다. 1952년 2월 15일 신성모의 명령으로 형이 면제된다.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한다. 1953년 2월 15일 완전 사면 복권된다. 그해 10월 1군 사령부에 식품을 공급하는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강원도 양구에 설립한다.  종신형을 면한데다 1년여 군에 복귀해 복역한 뒤 전역한 뒤, 군부의 알선으로 군납사업을 한다.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킨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은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여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남겨져 징역 15년을 언도받았다. 안두희가 1년 7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난 반면, 김학규는 이승만 정권 내내 징역살이를 한다.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어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당시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배후라는 의혹이 있다.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신의주 부호였던 병서(秉瑞)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의주와 신의주의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다. 1939년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전문부 법과에 입학한다. 학업을 중도 포기한다.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휘성 회남시(淮南市), 강소성 서주시(徐州시市) 등을 전전한다. 회남에서 일본군 관리기관인 군납품판매조합의 이사로 일한다. 서주에서는 요식업을 한다.

이때 안두희의 행적이 의심스럽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은 두 부류였다.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일본군인 만주군, 친일경찰이었다. 안두희는 민간인으로 일본군 관리 기관에서 부역했던 것이다. 

1945년 1월 귀국한다.  용암포 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한다. 1947년 월남한다.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에 가입한다.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지낸다.  이 시기에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월남한 청년, 학생이 중심이 된 백의사(白衣社)에도 가입한다. 백의사는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의 직속 특무기관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한 전문 테러 단체이다.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 혼란한 상황속에서 정치인을 암살하고 테러한다. 

육군사관학교 8기 앨범
육군사관학교 8기 앨범
육군사관학교 8기 앨범
육군사관학교 8기 앨범

안두희는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8기 특 3반에 입교한다. 8기생은 졸업생이 1263명이다. 미 군정이 종료되고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여서 초급 간부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 현재 육사는 4년제였지만, 당시는 입교 3~6개월 만에 졸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대장ㆍ중대부관ㆍ대대참모 등으로 최일선에서 근무했다. 이 때문에 전체 졸업생 3분의 1인 367명이 전사했다. 35명이 실종된다. 김종필 등 8기가 5ㆍ16군사구테타의 주역이 된다.  5ㆍ16당시 5기생은 주로 지휘관, 8기생은 참모진을 맡았다.

안두희는 군인의 신분으로 1949년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金學奎)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약칭 한독당)당원이 된다.  안두희가 한독당에 입당한 것은 김구를 암살하기 위한 의도적인 포석으로 알려진다. 실제 안두희는 재판에서 백범과 한독당의 반정부적 노선을 성토한다.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한 배경에는 당시 정치 상황이 있다.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한 뒤 38도 선으로 한반도가 분할된다. 남과 북은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각각  들어선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미 군정에 의해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귀국이 불허된다. 한참 뒤에야 개인자격으로 입국한다. 반면 이승만은 미군과 함께 입국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를 갖는다.  이후 좌우간 대립은 심화된다. 좌익세력의 박헌영이 반탁에서 선회해 신탁통치 찬성 입장을 발표한다.  우익진영은 김구·이승만 주도로 1945년 12월부터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진행한다. 

이승만은 선수를 친다. 전북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한다. 북한 김일성이 북한을 수립한 것과 같이 남한 정부를 세워 나라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구를 비롯한 민족 진영은 남한의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한다. 미군의 철수를 요구한다. 평화 통일로 남북이 하나된 정부를 설립할 것을 주장한다.  이승만은 자신의 뜻과 달리하는 김구를 견제한다.  미국 역시 미소 냉전시대에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단독정부 수립과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김구가 곱게 보일리 없었다.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대중매체에서 자주 다뤄지는 소재이다.

암살의 배후가 이승만 정권이라는 게 가장 큰 쟁점.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보호 조치는 정권 차원이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 당시 정치 상황에 정적을 제거하면서 최대 수혜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신성모 국방장관→채병덕 육군참모총장→장은산 포병사령관 순의 지휘에 따라 안두희가 암살작전에 투입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조연으로 관동군 헌병통역 출신의 '의혹의 모략꾼' 김지웅이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했고, 서북청년단의 홍종만이 암살 하수인을 관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1992년 안두희 납치에 가담했던 변수환 씨는 "안두희는 두차례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했다. 경무대 면담에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창장이 배석했다. 이 대통령은 직접적인 암살 명령 대신 두 사람(신ㆍ채)의 말을 잘 들으라고 격려했다. 실제 김구 암살 직후 곧바로 방첩대에서 경무대로 출동해 안두희를 데려갔다. 경찰이 아닌 군대가 동원되어 안두희를 데려갔다는 사실만으로 사전 시나리오가 있었음을 정황상 알수 있다"고 증언한다.

두번째는 미국의 관련 여부. 미국 역시 김구 제거가 마국 국익에 도움이 됐다.  소련의 군정 하에 있던 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미국 역시 자신들의 군정하에 있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절실했을 것이다. 한반도는 냉전체제 속 동아시아에서 반공 방제제  역할을 해야 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안두희가 주한미군방첩대(CIC) 요원인 사실을 밝혔다. 이는 미 육군정보국 문서에서 공개된 것이다. 미군의 개입 의혹이 제기된 것은 안두희가 CIC요원이기 때문이다. 

미군이 1945년 9월 9일에 조선반도 38선 이남을 처음 점령한 부대가 미 제24군단. 군단사령부에 정보기관 CIC(Counter Intelliggence Corps 군단방첩대. 특무대)가 있다.

CIC는 첩보, 정보수집뿐만 아니라 한국인 정치지도자를 사찰하고 조종하는 일을 했다. CIC의 하부조직인 한국 CIC를 방첩대, 특무대로 불렀다.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무서운 존재였다.

창씨명이 다마시마 쇼류(玉島 昌龍)로 불린 헌병 출신 김창룡이 대장이었다. 항일조직을 무너뜨리고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후 이승만 세력에 가담해 반공 투사로 전향한다.  남로당 등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69호에 묻혔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포함이 되어 있다.

안두희의 한독당 입당은 암살 계획에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두희와 한독당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안은 독립운동과 관계없이 대부분 친일파들처럼 양지만 쫓아 다녔던 기회주의자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밑에서, 해방 이후에는 미군 정보요원으로, 정치군인으로 활동했다.  

한독당은 1930년 1월 25일 결성된다. 독립투쟁전선 통일과 지방파벌 청산을 목표이다. 조완구(趙琬九)·윤기섭(尹琦燮)·김구(金九)·엄항섭(嚴恒燮)·김홍숙(金弘叔)·이시영(李始榮)·옥성빈(玉成彬)·김철(金澈)·안공근(安恭根)·한진교(韓鎭敎)·김갑(金甲)·김두봉(金枓奉)·선우 혁(鮮于赫)·송병조(宋秉祚)·조상섭(趙尙燮)·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백기준(白基俊)·박창세(朴昌世)·최석순(崔錫淳)·장덕로(張德櫓)·이탁(李鐸)·강창제(姜昌濟)·박찬익(朴翊翊) 등 26명이 참석한다.  이사장에 이동녕(李東寧), 당무이사에 김구·조소앙(趙素昻)이 선출된다.

1940년 한국독립당은 한국독립운동의 주류가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집권당 역할을 담당한다.  중일전쟁 이후 상해·난징의 함락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충칭(重慶)로 이동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후 11월 23일 김구는 임시정부 당원들과 함께 환국한다.  한국독립당은 김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의 기반을 확충 강화한다. 1946년 1월 전국적인 반탁운동에 앞장선다. 그 해 2월 1일 임시정부 명의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한다.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3월 한국민주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과의 합당을 추진한다. 하지만 연합은 실패한다. 4월 18일 한국독립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의 3당 합동이 이루어져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한다. 당내 조직 및 인사개편이 단행된다.  주도권은 구한국독립당 계열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계속 장악한다. 이러한 여건은 후일 국민당계와 신한민족당계의 반발을 산다.  김규식(金奎植) 등이 당을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의 정치노선은 반탁·좌우합작·남북협상통일정부수립·단일정부반대 등이다. 민족적 견지에서는 당연한 노선이다. 반탁운동에 있어서는 이승만(李承晩)과 공동전선을 형성한다.  단독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당세가 쇠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9년 6월 24일 지도자격인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된다.

백범 김구 선생 살해...군사재판 심판대 선 안두희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범 안두희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된다. 헌벙대로 압송된다. 경교장 인근 다방에 대기하던 헌병대위 김병삼은 총소리가 난 뒤 곧바로 출동한다. 필동 헌병대 사령부로 연행된다. 김병삼은 전병덕 부사령관에게 보고한다. 당시 백범과 친한 장흥 사령관은 파주 성묘를 갔던 터다. 전병덕 부사령관은 경무대로 달려가 신성모 국방장관, 신태영 육군 참모총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건 전말을 보고 한다. 이승만은 장흥 사령관을 경질 시키고, 전봉덕부사령관을 승진시키고 수사를 맡긴다. 전봉덕은 일제시대 총독부,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을 지냈다. 육사 1기 고급장교반을 졸업한 뒤 소령으로 임명된다. 일본군 장교 출신 채병덕 참모총장의 비호아래 헌병사령관으로 승진한다. 전 봉덕의 맏딸이 전혜린이다. 전봉덕이 백범 암살사건에 대한  첫 공식 수사를 발표한다. "범인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헌병 사령부에 수감됐다. 현장에서 폭행을 당해 의식을 회복하기를 기다려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할 작정이다. 현장에서 판명한 것은 1인 단독행위인 듯 하다". 수사도 하기 전 이미 결론을 발표한 것이다. 그후 39일 만에 첫 군사재판이 열린다. 일제시대 만주국 군의(軍醫)출신 원용덕 준장이 주심을 맡았다. 군사재판은 안두희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이승만 정권의 의도대로 안두희의 배후를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안두희는 5.10선거를 반대하는 백범과 한독당의 반정부적 노선을 비판한다.  안두희는 3개월 후 15년으로 감형된다.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잔행 집행 정치 처분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한다. 52년 12월 15일 소령으로 진급하고 예편한다.  53년 2월 15일 완전 사면 복권된다. 언론인 오소백 기자가 1949년 9월 월간잡지 <신천지>에 개재된 '심판대에 선 안두희' 제목의 글이다. 

노혁명가 백범 김구 선생이 불의의 흉탄에 쓰러지신 지 39일 만인 8월 3일부터 동 살해범 안두희에 대한 중앙고등군법회의가 반민자를 처단하던 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법정에 모여든 사람은 인산인해였다.  법원 구내를 물샐틈없이 감시하는 헌병, 기마경찰대 그리고 기관총까지 눈에 띄어 경계는 자못 삼엄했다. 

방청석에는 경교장 측근자와 피고의 아내가 눈에 띄었다.  안두희 옆에는 감시병이 총검을 들고 서있다. 안두희는 피고석에 앉아서 태연히 얼굴을 쳐들고 방청석을 이따금 바라보았다. 공판이 점점 깊어가자 여러 가지 못한 현상이 있었다. 변호인은 피고를 애국자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에서 표창을 하고 동시에 무죄석방을 주장했다. 안두희는 공판정에서 선생을 반역자라고 말하면서도 가장 숭배하는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엄격을 자랑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종신형이라는 판결을 받게 됐다. 법이 규정한 종지부, 모든 문제는 어느 정도 뚜렷이 나타나게 됐다. 4일간에 걸친 공판을 될수록 치밀히 본 바 그대로 묘사한다.

경교장 전경
경교장 전경

[기소문 요지]
1. 육군소위 안두희는 국방경비법 제43조 위반¹으로 단기 4282년 3월 중순경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음
1. 국방경비법은 미군 군정장관이 1948년 7월에 조선경비대(한국군의 전신)의 운용을 목적으로 제정한 법령으로 구성은 ‘ 입대, 보고, 무단이탈 폭동, 도망, 군용물, 군법회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법은 한국정부가 1962년에 군형법으로 대체할 때까지 군사재판의 근거로 작동하였다. 국방경비법 43조는 ‘제9장 군기문란’ 중 정치관여에 대해 규정한 조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부에 대하여 정치에 관한 청원의 제출, 연설 또는 문서에 의한 자기의 정치적 의견 공표 또는 정치에 관여하여 조선경비대 내에 소요를 양성하거나 또는 차(此)로 인하여 조선경비대의 명예를 손상하는 여하한 군법 피적용자든지 군법회의 판결에 의하여 처벌함.
2, 육군소위 안두희는 단기 4282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혁명투사 김구 선생을 권총으로 불법 살해하였음. 즉 6월 26일 피고가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을 방문하기 전 경교장 근처에 있는 다방 자연장에서 약 20분 동안 두뇌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종전부터 맘에 품고 있었던 한독당과 김구 선생의 반정부적인 노선에 대하여 김구 선생의 본심을 타진하고 피고의 거처를 결정할 목적으로 김구 선생을 만났다. 피고는 김구 선생을 향하여 공산주의의 이적행위에 가담하지 말고 본심으로 돌아가서 간신배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권하자 선생은 “네가 내게 반동하느냐? 나에게 반동하면 국가민족에 대한 반동이다.”라고 노하기에 그 순간 정신이 혼란하고 흥분하여 김구 선생이 있음으로써 대한민국에 지장을 주며 그것이 곧 민국 정부 육성에 장해물이 된다고 하고 여순사건, 강태무·표무원 소령 월북사건, 장덕수사건, 공산당과의 합작 등등을 생각하고 미국제 권총으로 약 1미터 거리에서 제1탄을 발사하고 계속하여 3, 4발을 쏘았다.

 

안두희 심판 고등군법회의 재판정 배치도@ 신천지 1949.9.
안두희 심판 고등군법회의 재판정 배치도@ 신천지 1949.9.

피 고 : 육군소위 안두희
주 심 : 육군준장 원용덕, 배심: 육군대령 강문봉 외 5인
검 사 : 육군소령 홍영기, 육군대위 김선진
변 호 : 육군소령 김종만(관선), 육군중령 양정수(특별), 이상기(민간)
입 회 : 신문기자

[제1일 공판 오전10시 20분 개정, 오후 4시 30분 폐정]

비밀당원제 없다

검 사 : 직업은?
김학규 : 독립운동이다.
검 사 : 안두희를 아는가?
김학규 : 안다
검 사 : 어떻게 아는가?
김학규 : 홍종만을 통하여 안다.
검 사 : 언제부터 아는가?

김학규는 1900년생으로 평남에서 태어나 10살 어린나이에 만주로 건너간다. 신흥무관학교 졸업후 조선의용대, 조선혁명군, 조선혁명당, 광복군 등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후 1948년 귀국해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을 맡는다. 1948년 서북청년회 단원 홍종만의 소개로 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가입시키고 김구를 소개시켜 준다. 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하면서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받는다.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 1960년 5월 정부는 김학규를 석방한다. 1960년 한국독립당을 재건해 최고 대표위원을 지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한다. 1967년 9월 20일 사망한다. @김학규
김학규는 1900년생으로 평남에서 태어나 10살 어린나이에 만주로 건너간다. 신흥무관학교 졸업후 조선의용대, 조선혁명군, 조선혁명당, 광복군 등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후 1948년 귀국해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을 맡는다. 1948년 서북청년회 단원 홍종만의 소개로 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가입시키고 김구를 소개시켜 준다. 안두희가 김구를 살해하면서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받는다.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 1960년 5월 정부는 김학규를 석방한다. 1960년 한국독립당을 재건해 최고 대표위원을 지낸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한다. 1967년 9월 20일 사망한다. @김학규

김학규 : 나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하여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이야기했다. 3, 4월경에 입당수속을 하게 하였으며 비서를 통하여 당원증을 교부케 했다.
검 사 : 안두희는 한독당을 위하여 활동하였는가?
김학규 : 아니다. 활동한 일 없다. 안두희는 만났을 적마다 민국에 대한 불평을 말하였으며 때때로는 듣기에도 위험한 이야기까지 하고 또 김구 선생 자신의 증명서까지 얻어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 후로는 홍종만을 통하여 나를 또 다시 찾아주지 말기를 요구하여 사건 발생 약 1개월 전부터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
변호사 : 당원증은 어떤 종류의 당원증을 주었는가?
김학규 : 보통 가지는 당원증을 주었는데 그 후 홍종만을 통하여 비자(秘字) 도장을 찍어달라고 요구하기에 무의식적으로 찍어주었다.
변호사 : 비밀당원이 있지 않는가?
김학규 : 한독당에 비밀당원제는 없다.
변호사 : 위험한 말을 피고가 하더라고 하는데…
김학규 : 일본의 2.26사건(1936.2. 26. 일본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일왕의 쇼와유신을 명분 삼아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으킨 반란 사건) 등을 말하는 것을 듣고 한독당에서는 쿠데타를 불찬성한다고 말했다.
변호사 : 입당시키는 데 있어서 안두희를 심사한 일이 있는가?
김학규 : 없다.
(변호인측으로부터 한독당 조직체와 탈당 여부에 대한 심문이 있은 후 검찰관측으로부터 변호사단의 심문에 따른 보충심문이 있은 후 오전 공판은 하오 0시 17분 휴정하였다. 오후 1시30분 공판 속개)

원용덕(元容德, 1908년 2월 29일 ~ 1968년 2월 4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 겸 내과 의사 및 정치가로 제1공화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53년 초대 육군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을 거쳐 이듬해 1954년 초대 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 등으로 국군의 창군 및 초기 형성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박정희, 정일권, 이주일 등이 속한 만주군 인맥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상급자였다.원용덕은 제1공화국에서 벌어진 부산 정치 파동 등 각종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여 김창룡과 함께 대표적인 '정치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중 있었던 이승만의 기습적인 반공포로석방 사건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1960년 4·19 혁명으로 정치적 받침대였던 이승만이 하야한 뒤, 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에서 연합참모본부 고문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1961년 3월에는 7년 전인 1954년에 발생했던 불온문서 투입 사건과 김성주 살해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되어 재판 끝에 한 달 후 1961년 4월을 기하여 육군 중장 강제 예편 처분 및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징역형을 다 채우지 않고 1963년 3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1968년 2월 4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심장협심증로 사망한다.
원용덕(元容德, 1908년 2월 29일 ~ 1968년 2월 4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 겸 내과 의사 및 정치가로 제1공화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53년 초대 육군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을 거쳐 이듬해 1954년 초대 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 등으로 국군의 창군 및 초기 형성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박정희, 정일권, 이주일 등이 속한 만주군 인맥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상급자였다.원용덕은 제1공화국에서 벌어진 부산 정치 파동 등 각종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여 김창룡과 함께 대표적인 '정치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중 있었던 이승만의 기습적인 반공포로석방 사건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1960년 4·19 혁명으로 정치적 받침대였던 이승만이 하야한 뒤, 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에서 연합참모본부 고문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1961년 3월에는 7년 전인 1954년에 발생했던 불온문서 투입 사건과 김성주 살해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되어 재판 끝에 한 달 후 1961년 4월을 기하여 육군 중장 강제 예편 처분 및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징역형을 다 채우지 않고 1963년 3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1968년 2월 4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심장협심증로 사망한다.

검 사 : 한독당의 입당에서부터 입당 후의 활동은?
홍종만 : 김학규 씨한테 안두희를 비밀당원으로 입당시키겠다는 말을 들었으며 활동에 대해서는 모른다. 다만 나는 소개만 하였을 뿐 내부적인 일은 모른다.
변호사 : 안두희는 비밀당원임에 틀림없는가?
홍종만 : 틀림없다.
판 사 : 비밀공작대의 일부와 포병대 내에 세포를 두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홍종만 : 임무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다만 포병대에 세포를 두는 것은 안두희가 포병대에 있는 까닭이다.
판 사 : 지하공작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홍종만 : 나도 모른다.
판 사 : 일단 지령이 내리면 모종의 행동을 하라고 지령하였다는데 모종의 행동이란…선생을 죽이려고 입당했나
판 사 : 한독당에 입당한 동기는?
안두희 : 나는 맨 처음에 조민당에 가입하였으나 별로 정치에는 관념이 없었고 특히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인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두 국부로 모셔왔고 또 숭배해 왔다. 그 후 두 분이 분열되자 첨에는 표면적인 분열이 아닌가 하여 앞으로 다시 합류하게 될 것을 바라며 선생을 모셔오던 중 우연히 홍종만과 가까워졌고 홍종만의 열렬한 권고와 묘한 방책에 나도 이끌려 입당하게 되었다. 당에 입당하는 것은 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을 친히 모실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입당했다.
(피고는 음성을 높여 말했다)

검 사 : 군인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안두희 : 잘 안다.
검 사 : 그럼 알면서 왜 입당했는가?
안두희 : 위법인 줄 알면서도 어느 정도 군인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과 또 김구 선생을 친히 모실 생각에서 입당했다.
검 사 :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안두희 : 국가의 방해물을 타도하는 것이다.
검 사 : 그것 말고 중한 것이 있나?
안두희 : 상관의 명령을 절대 복종하는 것이다.
검 사 : 그래 명령을 복종했나?
안두희 : ……

제1호 공판 재판장에 들어가는 안두희 @동아일보 1949.8.4.
제1호 공판 재판장에 들어가는 안두희 @동아일보 1949.8.4.

검 사 : 입당하여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안두희 : 별로 한 일 없다.
검 사 : 어째서 없는가?
안두희 : 단순히 김구 선생을 모시기 위해 입당했으니까 당의 일은 별로 한 일 없다.
검 사 : 왜 선생을 가까이 모시려고 하였나?
안두희 : 국민으로서 어찌 영도자와 가까이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판 사 : 김구 선생을 죽일 목적으로 입당한 것이 아닌가?
안두희 : 그런 목적은 추호도 없었다.
판 사 : 권고에 못 이겨 피동적으로 입당했는가?
안두희 : 자기 의사에 따라 입당했다.
판 사: 언제부터 정치에 관여했는가?
안두희 : 해방 직후부터다.
판 사 : 홍종만 증인과의 연락은?
안두희 : 내가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휴가시에 나올 때마다 다방 등에서 홍종만을 만났으며 그럴 때마다 입당하라고 권유를 받았다.
판 사 :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입당하지 않았나?
안두희 : 개인적으로 혹은 당적으로도 김구 선생을 모시고 싶어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피고에 대한 죄과, 즉 군인이 정치에 관여함으로써 성립된 죄상에 대해서는 심문이 끝났다)

판 사 : 증인은 26일 사건이 생긴 후 현장에 갔다는데 그때의 사실을 말하라.
의 사 : 26일 오후 1시경 경교장에 갔을 때는 벌써 선생은 절명해 있었는데 저격당한 결과로 보아 이는 연발적으로 총을 쏜 것 같이 보인다. 법의학적으로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다만 그 당시의 결과를 과학적으로 진찰했을 따름이며 강심제 주사를 3대나 논 것은 측근자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적십자병원 외과의사 이씨)

[제2일 공판 오전 10시 15분 개정 오후 3시 55분 폐정]

점심 먹는 중에 저격했다
이날 안두희는 다만 전일과 달리 군화를 단화로 바꿔 신었을 뿐 옷은 말쑥한 군복을 입었으며 때때로 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검 사 : 경찰 경험은?
증인(강주임) : 약 1년 반이다.
검 사 : 당일 보고는 누가 했나?
증 인 : 조순경이 했다. 그래서 나는 곧 현장에 가본즉 범인은 피가 묻은 채 자빠져 있었고 또 아무 저항도 없었다. 나는 다시 2층 현장에 올라가서 보고 곧 본서에 보고했다.
판 사 : 그때 권총을 들고 있던가?
증 인 : 순경이 총을 들고 있었을 뿐이다.
판 사 : 안두희를 구타하는 것을 보았나?
증 인 : 조순경한테 듣고 알았다.
(다음은 경교장 비서 선우진, 이풍식 양인에 대한 증인심문이 계속되었다)

검 사 : 안두희는 몇 시에 왔는가?
선우진 : 12시 전후로 기억된다.
검 사 : 그때 군인은 몇 사람 왔었나?
선우진 : 전부 그때까지 4명이었다.
검 사 : 안두희와 잘 아는가?
선우진 : 몇 번 만났다.
검 사 : 안두희가 찾아온 목적은?
선우진 : 김구 선생을 면회하겠다고…
검 사 : 어떻게 안내했나?
선우진 : 마침 먼저 온 손님이 있었기 때문에 약 1시간 쯤 간담하다가 선생 방에 안내하였는데 그때 시간은 12시 45분이 아니면 50분이다. 이것은 마침 라디오에서 조선 노래가 들렸는데 그것으로 시간은 추측할 수 있다. 선생께 안내하니 선생은 안두희에게 언제 왔느냐고 물었다. 안두희는 3, 4일 전에 왔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곧 내려왔다.
검 사 : 그리고 무엇을 했나?

 

선우진(鮮于 鎭, 1922년 1월 8일 ~ 2009년 5월 1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이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며 본관은 태원(太原)이다. 1940년 만주 신징대학교를 나온 이후 광복군에 입대하여 선전공작 등에 활동했다. 1944년 8월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 부설 광복군 간부훈련반에 입교해 3개월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후 광복군 부위로서 총사령부 정훈처에 소속되 활동했다. 1945년 1월 31일에서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백범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 받았다.  2009년 5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우진(鮮于 鎭, 1922년 1월 8일 ~ 2009년 5월 17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이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며 본관은 태원(太原)이다. 1940년 만주 신징대학교를 나온 이후 광복군에 입대하여 선전공작 등에 활동했다. 1944년 8월 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 부설 광복군 간부훈련반에 입교해 3개월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후 광복군 부위로서 총사령부 정훈처에 소속되 활동했다. 1945년 1월 31일에서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백범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 받았다. 2009년 5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우진 : 약 20미터 떨어진 지하실에 내려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먹은 양은 종전의 3분지 1밖에 못 먹었다.
검 사 : 밥그릇은 공기냐 사발이냐?
선우진 : 알루미늄 그릇이라 밥은 그곳에 7, 8부밖에 담지 않았으며… 밥을 먹다 갑자기 쌈질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숟가락을 내던지고 대합실로 뛰어 올라갔더니 때마침 조순경이 안두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 2층으로 올라가보니 선생은 의자에서 피로 물들인 채 쓰러져 있어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 맥박이 멎어 있었다. 그래 당황하여 곧 병원에 가보려고 내려왔지만 다른 사람이 갔다기에 그만뒀다.
검 사 : 안두희는 첨에 총을 찼던가?
선우진 : 차고 있었다.
검 사 : 권총은 이것인가? (검사는 권총 실물을 제시하면서)
선우진 : 그것으로 기억된다.
검 사 : 그리고 안두희를 때렸는가?
선우진 : 때렸다.

순간적인 이유로 자살 안 했다
검 사 : 증인 이풍식 씨도 당시에 사정을 말해보라.
이풍식 : 나는 그때 마침 전화가 왔길래 라디오를 끄고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 건 사람은 교통부 차관 비서다.
검 사 : 그때 전화 문답을 말하라.
이풍식 : 경교장이냐? 그렇다. 선생님 돌아오셨나? 돌아오시다니. 출장을 가시지 않았나? 가지 않았다. 계시냐? 계시다. 별 사고 없느냐? 없다. 찾아가도 좋으냐? 찾아와도 좋다. 이런 정도의 내용이다.
검 사 : 그리고 어떻게 했는가?
이풍식 : 전화실에서 나오니 안두희는 권총을 내 쪽을 향하여 들고 있었으며 그 밖에 조순경이 카빈총을 들고 “손들어 쏜다” 하며 고함을 쳤다. 그제서야 안두희는 권총을 떨어뜨렸다. 이국태가 권총을 빼앗은 후 2층으로 올라가보니 주석은 피를 흘린 채 의자에 쓰러진 것이었다. 그래 의자에 기대어 있는 주석을 다다미방에 모시고 맥을 보니 벌써 그쳐 있었다.
변호사 : 지금 증인은 김구 선생을 주석이라 말했는데 주는 주(主)자인가?
이풍식 : 그렇다.
변호사 : 주석이란 대체 무슨 뜻인가?
이풍식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란 뜻이다.
변호사 : 임시정부란 지금 존재하고 있는가?
이풍식 : 금년이 대한민국 31년이 아닌가 …
변호사 : 대한민국이 엄연히 …
(이때 재판관이 변호사의 언권을 정지하고)

판 사 : 증인에 대하여 괴롭히거나 필요 이상의 심문은 금한다.
변호사 : 2층에 올라갈 때 안두희는 모자를 썼던가?
이풍식 : 썼다.
변호사 : 내려올 때는?
이풍식 : 모자도 없고 계급장도 없었다.
변호사 : 그런 점으로 보아 피고는 자수하려고 내려왔다고 보지 않는가?
이풍식 : 그렇지 않다. 자수하는 사람이 왜 권총을 가지고 내려왔단 말이냐.
판사: 아까 증인은 전화를 받을 때 사고 없는가라는 말이 있었는데 사고란 무슨 뜻인가?
이풍식 : 무사하냐는 뜻이다.
판 사 : 단순히 무사하다는 뜻이면 안녕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도대체 선우 비서가 점심을 2분 동안에 빨리 먹는다거나 ‘사고’ 없느냐는 전화가 오는 것 등으로 보아 사전에 모종의 무엇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로써 상오 공판을 마치고 하오 1시 35분부터 변호인의 요청에 의하여 30분 간에 걸쳐 경교장 검증이 있은 후 다시 법정에 돌아와서 공판은 재개되었다)

변호사 : 한독당에 가입한 일이 있는가?
안두희 : 있다.
변호사 : 저격 전까지 몇 번 선생을 뵈었는가?
안두희 : 일곱 번 찾아가서 만났다.
변호사 : 6월 26일 무슨 일로 면회하러 갔는가?
안두희 : 근 20일 간이나 면회를 안 하였기에 간 것인데 그 전에도 출입을 삼가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고 나중엔 왜 왔느냐고 책망까지 들었다.
변호사 : 입당 전과 입당 후의 감상은?
안두희 : 표면상으론 한독당 노선은 유혈 기피 노선이라고 보았는데 그 후 점점 그들의 (김구선생은 제외하고) 언동이 불순하여 나는 이런 정당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 침울해졌고 정치적 고민을 하였다. 나는 김학규를 십여 차에 걸쳐 만났는데 4월 중순경부터 반정부적인 말을 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정부시책을 비판하고 대통령을 공격하였다. 나는 김구 선생을 살해했다. 애국자이며 국부이며 영도자인 선생을 살해했다.

안두희가 살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번지
안두희가 살던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번지

(이렇게 흥분된 어조로 크게 떠들자 변호인의 요청으로 5분간 휴정 후 속개하였다)

안두희 : 이렇게 위대한 분을 내가 살해한데는 의의가 깊다. 나는 저격 후 즉시 자살하려고 하였으나 순간적인 이유로 자살을 중지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생명의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 김학규는 민국을 정부라고 부른 일이 없고 국회 소장파에 가담하여 정부시책을 끝끝내 반대하고 외군 철퇴를 주장했다. 강태무·표무원 소령 월북사건도 필연코 한독당에서 조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벌써 탈당 의사까지도 암시하였다. 김학규는 강태무·표무원 소령 월북사건에 대한 각계 동향과 여론을 주시하고 우리 조선에서도 뭘 일으켜야 되며 젊은이래야만 되니 그때를 위해서 비밀조직을 하되 8.15전까지에는 쾌속히 그리고 절대 확실히 비밀세포를 가지라. 김구 선생에게도 말했다고 내게 말했다.
변호사 : 6월 26일 전까지 김구 선생과 만나 한 이야기는?
안두희 : 잘 기억이 안 나나 선생은 외군 철퇴를 지지하였고, UN 한위를 반대했고 1억 5천만불 원조안을 반대했다. 선생은 경교장 경호원은 나를 경호하는 게 아니라 내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나는 국내정세가 변할 때마다 김구 선생을 찾아가서 선생이 본심으로 돌아갈 것을 말했으나 선생은 그럴 때마다 화를 냈다.

[제3일 공판 오전 10시 5분 개정 오후 4시 5분 폐정]

눈을 감고 총을 쏘았다
공판 개정 제3일은 8월 5일로 선생이 가신 후 처음 맞는 생탄일이다. 운명의 장난이란 공교롭고도 얄미운 것이 아닌가.
변호사 : 살해 경위를 상세히 말하라.
안두희 : 그날 아침 조반을 먹고 예사로이 포병대에 나가려고 동화백화점 앞까지 와서 자동차를 타려다 어젯밤에 아내가 낙태한 것을 생각하고 돈을 주려고 다시 집으로 갔다. 집에서 나오면서야 비로소 그날이 공일인 줄 알고 영천 친구네 집에 놀러 가려는 맘에서 자동차를 집어탔다. 대한문을 거쳐 이화여중 앞을 지나 로터리에 다다랐을 때 경교장 김구 주석을 만나겠다는 충동이 일어나 그만 차를 내려 자연장 다방으로 발을 옮겼다. 차를 마시며 번민했다. 오늘은 꼭 선생을 만나 최후의 본심을 알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20분 후 자연장을 나왔다. 경교장에 들어가자 선우 비서와 악수를 하고 잡담을 교환하고 있으니 강 대위가 들어왔다. 나는 김구 선생과의 면회를 강 대위에게 양보하고 선우 비서와 포(砲)에 대한 잡담을 하였다. 강 대위가 간 후 나는 선우비서의 안내로 2층 계단을 디딜 때 마침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해방된 역마차’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들렸다. 내가 선생 앞에 나가 거수경례를 하자 선생은 2미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때 선생은 매우 표정이 불쾌한 것이 역력했다. 선생은 3.8선 사태 및 포병의 편성상태는 어떠냐고 묻기에 흐지부지 대답한 후 나는 선생에게 일부러 꾸며 거짓말을 하여 본심을 알아보려 하였다. 나는 2, 3일 중 웅진전투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출정하며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선생님의 포부도 똑바로 알고싶어 왔습니다 하고 말하니까 선생은 국회 소장파 얘기를 꺼내며 세간에서는 경교장을 싸고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고 있는 이때에 너까지 와서 이러면 남들이 색안경을 끼고 들테니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나는 선생에게 그런말을 하시는 선생을 어찌 의심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마저 선생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정당이나 언론계에서는 모두 선생을 공산당과 악수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꼭 선생님의 본심을 확실히 알고야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더니 선생님은 대노하시며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크게 꾸짖었다. 나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30여 년간 투쟁한 탑을 선생님 손으로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때가 바로 선생님이 개심할 때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으니 본심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십시오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은 크게 노하시며 이 고약한 놈 나에게 반동하는 놈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이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이 순간 틀림없이 선생님은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결심했다. 최고조로 흥분한 나는 선생과 여순사건, 강태무·표무원 소령 월북사건, 장덕수사건 등을 연상하려기에 그 후의 언쟁은 기억이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고 권총을 내어 눈 감고 제1탄을 발사하였다. 눈을 떠보니 선생은 두 손을 들고 무서운 눈으로 무슨 말씀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연속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총을 쏜 후 선생을 보지 않고 그대로 서쪽 마루로 방을 옮기며 내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으나 순간적으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영감을 느꼈다. 나도 자존심과 영웅심을 가진 사람이다. 또 국군에 누를 끼칠까 두려웠으나 죽는 것보다 살면 또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한독당의 비밀을 완전히 폭로하고야 만다고 결심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이국태 등은 그때도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권총으로 선생을 죽였다고 말하여 그들은 당황하며 무슨 말인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이때 밖을 보니 정복 경관이 나를 향하여 조심조심 달려왔다. 나는 계급장과 모자를 다 버렸다. (장내는 긴장한 분위기로 죽은 듯이 고요했다. 재판장으로부터 5분간 휴정을 선언하자 피고는 자기 자리에 태연히 앉아서 장내를 두리번두리번 보았다)

나의 행동은 애국적이었다
검 사 : 김학규가 대통령과 동 부인에 대하여 요설을 한 일이 있는가?
안두희 : 시간과 장소는 기억에 없으나 욕하는 것을 들었다.
검 사 : 그때 홍종만은 있었는가?
홍종만 : 있었다. 대통령 생신날 백성은 굶주려 아우성치는데 생일축하구 머구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 사 : 강태무·표무원 소령 월북사건에 대하여 필요 이상 말한 일이 있나?
김학규 : 그런 일 없다. 강태무·표무원 소령 월북사건은 안두희가 라디오를 틀고 나에게 전언하기에 비로소 나는 알았다. 대통령 부처에 대하여 욕했다는 것도 다 낭설이다.
검 사 : 8.15의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가?
김학규 : 그런 일 없다. 한독당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검 사 : 1억 5천만불 경제원조를 반대한 일이 있는가?
김학규 : 없다.
검 사 : 군사고문단 설치를 반대한 일은 있나?
김학규 : 없다.
검 사 : 그 자리에 홍종만이도 있었다는데?
홍종만 : 모르겠다.

이때 홍검사는 신문을 증거품으로 꺼내 1억 5천만불 경제원조에 대하여 국도신문 6월 10일부 한독당 선전부장 담화를 낭독함으로써 동당이 경제원조를 지지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다시 8.15의거사건에 대해서는 화성매일신문, UN문제에 대해서는 경향신문을 꺼내서 한독당의 이에 대한 성명서를 지적하여 피고의 진술이 전혀 근거 없는 낭설임을 명확히 반증하였고 나가서는 한독당의 노선이 반정부적이 아니고 합법적인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로써 상오 공판은 그치고 오후 1시부터 속개되었다)

먼저 피고 안두희로부터 현재 자기는 김구 선생을 반역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기의 살해행동은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고 열광적으로 날뛰었다.

판 사 : 애독 서적은?
안두희 : 백범일지와 소련문학 고골리전집이다.
판 사 : 고골리의 작품을 읽고 무엇을 느꼈나?
안두희 : ……
판 사 : 그의 사상을 어떻게 보는가?
안두희 : 제정시대에 읽어서 기억이 없다.
검 사 : 고골리는 제정 러시아 사람으로 별다른 사상이 없다.
판 사 : 내가 무식해서… (판사는 빙그레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어 한독당 노선에 대해서 민주국민당 함상훈 선전부장이 비판하였는데 동당 노선은 5.10선거를 반대했고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현 정부에 협조치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검 사 : 증인 함상훈 씨의 증언을 논박하기 위하여 한독당 노선을 가장 잘 아는 동당 조직부장 김학규 씨와의 연석 신문을 요청한다.
판 사 : 그만 두는 것이 좋다.
검 사 : 필연적으로 한독당 노선은 한독당 간부가 잘 알 것이 아닌가? 논박할 수 없는가?
판 사 : 논박할 수도 있으나 재판장의 권한으로 각하한다.
검 사 : 그렇다면 잘 알겠다.

[제4일 공판 오전 10시 개정 오후 0시 52분 폐정]

노혁명가를 죽인 죄는 크다
판 사 : 사실 심문은 대략 이것으로 끝났는데 지금 피고의 심정은 어떤가? (판사는 낮은 음성으로 묻는다)
안두희 : 마음이 잔잔하다. 다소 정치적 번민은 없었으나 지금은 자기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것을 다 집어치우고 인간적으로 돌아가면 가신 선생의 생각이 절실하다. 나는 몇 번 죽여주어도 좋다. 빨리 사형을 내려달라. 만일 사형을 나에게 내리지 않고 미온적인 형벌이 있다면 나는 내 자신이 내 목숨을 끊어버리겠다.
판 사 : 우국지성에서부터 그런 일은 했으나 인간적으로 선생을 숭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고 다시 한 번 재생하여 창공을 바라보는 그러한 맑은 기분을 가질 수 없을까.
안두희 : 내 마음은 지금 창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맑다. 다만 안두희가 인간으로 돌아갈 때 꼭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백범 선생의 국민장날 수많은 동포들이 아우성치고 발 구르며 우는 소리를 영창 속에서 들을 때 나는 울었다. 빨리 나를 사형해 달라.

(피고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판 사 :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처자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안두희 : 사람인 나도 슬프다. 그러나 큰마음으로 생각하면 할일을 했으니… 가족에 대한 모든 것도 머리에서 사라진다.
판 사 : 아무리 선생을 살해하는 동기가 우국지성에서 나왔다 하여도 그것이 국법에 저촉된데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는가?
안두희 : 오로지 사형을 바랄 뿐이다.
검 사 : 논고로 들어가기 전에 전제로 몇 가지 말하겠다. 피고는 죄과 1에 대해서나 죄과 2에 대해서나 절대로 유죄인 것은 명백하다. 첫째 국방경비법 43조에 의거하면 테러와 군국주의를 막는 의미에서 군은 정치에 관여 못한다고 뚜렷이 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다. 그런고로 동 조항의 입법정신을 반드시 이행하여야 한다. 더구나 복잡미묘한 현하의 국내정세에 비추어 군의 질서를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존엄을 위하여 단연히 처단하여야 한다.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정신무장의 정도로 그 한계를 가져야 할 것이며 직접 어떠한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여러 사건에서 본 그러한 전철을 밟기 쉽고 나가서는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육군소위 안두희가 노혁명가 김구 선생을 살해한 동기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간에 그 결과는 커다란 죄악임에 틀림없으며 국군의 위신을 손상시킨 것이다.

(검사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한독당은 합법적인 정당이다
검 사 : 다음은 한독당에 대하여 말하겠다. 한독당은 8.15 이후 특히 대한민국 수립 이후 동당의 노선은 UN을 지지한 합법적인 정당이다.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그런 정당은 아니다. 그것은 동당에서 발표한 성명서 및 담화로서 명백히 되어있다. 혹 전술적으로 또는 기술적으로 좌익과 손을 잡는 듯이 했는지는 몰라도 손목을 잡은 일은 없다. 금년 6월 3일부 태양신문에 게재한 것을 보면, 소위 조국민전을 반대한 한독당의 성명이 뚜렷이 대외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이 밖에도 남북협상 이후 대북반박성명을 한 것으로 보아도 명백한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한 개의 이론체계와 세계관을 서로 달리하고 있는 공산당과 한독당이 합작할 이가 있겠는가… 더구나 공산당이 전국을 장악한다면 한독당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당을 가리켜 반정부적인 정당이라 하는 것은 사실 무근인 허위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피고 안두희가 주관적으로 옳다 해도 객관적으로도 군기에 비추어볼때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런 자에 대한 처단이 미온적이라면 기타의 범인에 대해서는 아무 처단도 내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사는 도하 각 신문을 증거품으로 낭독하며 한독당의 노선을 구명하였다)

대한민국은 안두희를 표창하라
변호사 : 피고는 증인 홍종만의 소개로 입당했다. 이것은 국방경비법 43조에 해당 안 된다. 죄과 제1에 대한 것은 무죄일 것이다. 피고는 한국당을 위해 입당한 것이 아니라 김구선생을 어려서부터 숭배했기 때문에 당에 가입한 것이다. 죄과 제2에 대해서는 살해는 인정하나 대한민국의 장해물을 제거한 동기를 보면 죄과 제1과 어떤 유기성을 갖고 있다. 선생은 5.10 선거를 반대하고 단정을 반대하고 임시정부 주석이라 하며 대한민국을 반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무혈통일의 허울 좋은 이념 아래 비현실적인 길을 걸어왔다. 본 변호인은 범행 목적 동기는 정당하다고 인증한다. 국가가 중요한가? 법이 중요한가? 피고의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다. 형벌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데 있지 않고 이를 회개케 하고 교육하는 데 있을 것이니 육군소위 안두희에 대해서는 무죄석방을 요구한다. 피고는 의식적으로 범행을 하지 않았고 또 자수하였으니 이는 현명한 심판관께서 많이 참작하여 2년 집행유예 정도로 처결을 바란다.

총살형을 요구한다

검 사 : 지금 변호인이 말한 중 국방경비법 43조에 해당 안 된다는 것은 이단적인 해석이다. 군사법은 다른 사법과 달라서 과실이라 할지라도 엄벌에 처해야 한다. 상부에 명령없이 부하가 맘대로 군대를 움직여 전멸했을 때 이 죄과를 무엇으로 회복할 것인가. 더구나 국군의 장교로서의 피고가 노혁명가 김구 선생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무죄와 집행유예 정도의 판결을 주장하는 변호인의 의도가 나변(那邊: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 변호인인 법률가로서 상식에 벗어난 말을 하는 것은 유감이다. 좀더 법률을 ……

(이렇게 변호인의 반박에 역반박하는 검사에게 판사는 발언을 일시 중지시키며……)

판 사 : 검찰관은 변호인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개인 인신공격 같은 말은 삼가 달라.
검 사 : 그러면 무죄란 말을 곧 취소시켜주면 공격 않겠다.

(이때 방청객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검사는 아직도 흥분한 빛을 보였다)

판 사 : ……
검 사 : 피고 안두희는 전번 공판에서 진술하기를 김구 선생을 살해하고 자기 자신도 죽겠다고 했으니 이는 즉 범죄의식이 잠재적으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는 법률적 해석을 가지고서 논박하였다)
검 사 : 변호인의 변론 중 피고의 자수는 본 검찰관도 인증한다. 그러나 엄연한 군기를 무시하면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때가 때이니만치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더욱 삼가야 한다. 자칫하면 우리 국군을 전부 파괴시킬 우려가 이 정치관여에 있다. 정치를 위한 군인인지 군을 위한 군인인지 그것부터 명확히 파악하여야 한다. 바라건대 재판장은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무시하고 어디까지나 공정무사한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더구나 피고는 어제까지도 우리와 같은 군인 동지이고 전우였으나 오늘은 서로 숙명적으로 각각 다른 입장에 섰다. 같은 군인이 군인을 구형하고 재판하게 되었으니 여기에 감상적인 인정에 끌리는 일이 없이 동정심에 끌림이 없이 어디까지나 냉정한 처단을 ……

(여기까지 말하는 검사의 언권을 중지하며 재판장을 노기 띤 낯으로……)

판 사 : 그런 검사의 말은 우리 심판관을 모욕하는 말이니 취소하라.
검 사 : 취소합니다.
판 사 : 계속해 말하라.
검 사 : 피고 안두희가 군인이기 때문에 또 상대방이 노 혁명투사이기 때문에 절대로 용서할수 없으니 최극형에 처하라. 마땅히 군인 기본 원칙에 비추어 총살형을 받아야 한다.
판 사 : 일반 방청객이 있는데서 검찰관은 법관을 모욕하는 언사를 하는 것은 앞으로 삼가라.

(검사는 두 번 강조하는 판사의 말에 재차 미안한 뜻을 표했다)

무기명투표로 종신형 판결!

변호사 : 검사가 피고를 우국지사라면서 극형을 내리는 것은 두뇌의 혼돈이다.
검 사 : 살해동기가 주관적 우국지성에서 나왔을지 모른다고 했지 우국지사라고 한 일은 없다. (이때 재판장으로부터 5분간 휴정을 선언한 후 11시 19분에 속개하였다)
변호사 : 본 변호인은 피고를 애국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반역자가 애국자를 살해할수도 있고 애국자가 애국자를 살해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검 사 : 피고가 최후적으로 선생의 심정을 알려고 경교장에 갔다는 진술을 보아도 상당한 의식적 결심을 가졌던 것이 명백하다.
변호사(민간, 이상기) : 사행집행만 제외하고 적당한 형을 바란다.
검 사 : 피고 안두희를 총살형으로 구형한다. 절대 총살형으로 구형한다.

(검사는 시종일관 열렬히 논고하였다. 오후 0시 5분)

안두희 : 한독당의 행위는 위선이라고 본다. 5・10선거를 반대하고 군사고문단 반대, 경제원조를 반대한 한독당을 반정부의 정당이 아니라고 말하는 검찰관과 심판관에게 유감히 생각한다. 만일 이 자리에서 공산당과 한독당이 같은 노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라.

(피고는 소리를 있는 대로 높였다.)

판 사 : 이로써 피고의 진술은 전부 마쳤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국방경비법의 고충은 형언할 수 없으나 어쨌든 동법은 법인 이상 법에 의거하여 공평무사한 판결을 내려야겠다. 제 심판관들은 법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냉정한 판결이 있기를 바란다. 피고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은 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양심에 간직하라. 군인이 군인을 재판하는 심판관들의 고충을 알아야 한다. 군인이기 때문에 군인을 위하여 군을 재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최후로 주의를 말한 주심은 십분 간 휴정을 선언하였다)

판 사 : 피고 안두희

(최후 판결 직전의 호명이다)

안두희 : ……

(피고는 심판관 앞에서 검사의 인정심문에 다시 답변했다.

판 사 : 육군소위 안두희에 대한 최후 판결에 있어 심판관들의 합의를 본바 죄과1에 유죄 죄과2에도 유죄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고, 종합 판결을 무기명투표로 본 결과 과반수의 동의로 피고 육군소위 안두희에 대하여 종신형을 판결한다.(오후 0시 52분)

(방청석에서는 죄과1을 말할 때 또 다시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피고는 헌병과 감시병의 안내로 법정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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