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통은 한국전쟁 참전을 허용한다. 동맹국을 돕겠다는 명목이다. @자료사진
모택통은 한국전쟁 참전을 허용한다. 동맹국을 돕겠다는 명목이다. @자료사진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이 남침하면서 발생한다. 서울이 함락된다.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한다.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전선이 뒤바뀐다. 10월 1일 한국군 3사단 23연대가 38선을 넘어 북한 땅으로 진격한다. 이날을 기념해 10월 1일을 국권의 날로 정했다. 이틀날 양양을 접령한다.  수정주의(修正主義) 역사학자들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北進)한 것을 두고 북침(北侵)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전쟁을 내전(內戰)이라고 보는 시각 때문이다.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고 있다.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 남으로 향하고 있다. @자료사진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고 있다.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 남으로 향하고 있다. @자료사진

한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은 것이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단초가 된다. 

중국 마호쩌둥(毛泽东, 모택통, 1893.12.26.~1976.9.9)은 미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北進)에 대해 경고한다.  10월 3일 중공 외교장관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유엔군 병력이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하면 중국군이 개입하겠다”고 선언한다. 10월 9일 중공 외교부 대변인이 전쟁 개입을 되풀이 한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26.~ 1964.4.5.) 원수는 이 문제를 두고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해리 트루먼(Harry Shippe Truman, 1884.5.8.-1972.12.26) 대통령을 만난다.  

트루먼은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의 개입을 걱정한다. 한국 전쟁에 대한 미국내 여론이 좋지 않았다. 전쟁 초기 미국인의 78%는 트루먼의 군사 지원을 찬성했다. 반대눈 18%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은 급변했다. 미국 국민은 대체로 한국전쟁이 3차대전에 시작이 될 것이라고 봤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0.14.~1869.3.28)가 1953년 대통령이 될 당시 주요공약이 '6.25전쟁 중단'이었다.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고 냉전체제를 굳혔다.

맥아더는 오판한다.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트루먼에게 같은 내용으로 보고한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은 12만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다.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무 접경지역에 집결한 상태였다.

1950년 10월 군악대의 연주속에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1950년 10월 군악대의 연주속에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중국은 유엔군, 미군,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자 10월 19일 북한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  당시 북한은 소련 스탈린에 긴급 지원을 요청한다. 스탈린은 3차 세계대전 확전을 우려해 거절한다. 중국은 단독 참전을 결정한다. 모택통은 한반도 출병을 '중국 공산혁명의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 정세상 북한의 존속이 필요했다. 북한이 패망하면 미국 영향력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과 국경을 맡닺게 되는 위험이 있다. '입술(북한)이 없으면 이(중국)가 시리다'는 순망치한 이론을 내세워 파병을 결정한다.  평더화이(彭德怀, 1898.10. 24.~ 1974.11. 29)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중화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쑹수룬(宋時輪, Sòng Shílún, 1907. 9. 10. ~ 1991. 11. 29.)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전쟁에 참전한다.  중국은 휴전 협정 후 현재까지도 중공군의 6.25전쟁 개입을 향미원조조(抗美援朝: 북한을 도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함)라고 주장한다. 

맥아더 원수는 당시 유엔군ㆍ미군ㆍ한국군을 지휘하는 통합군 사령이다.  한국전쟁을 지휘하면서 서부전선은 월턴 위커(Walton Harris Walker,1989.12.3.~1950.12.23.) 8군 사령관(중장)에게, 동부전선은 애드워드 아몬트(Edward Mallory "Ned" Almond, 1892.12.1.-1979.6.11) 10군 단장에게 각각 작전권을 주어 지휘체계를 양분한다.

10월 19일 한국군 1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이 평양을 접령한다. 10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능라도 비행장에 내려 평양시민들 앞에서 연설한다. 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 온 맥아더 원수도 비행장에서 미군 1기병사단 5기병연대 F중대를 사열한다. 평양이 한국군과 유엔군에 접령되면서 북한 정권은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동부전선에서 한국군이 이미 원산과 함흥을 접령한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중국 국경까지 진격을 앞두고 있다. 

10월 25일 미 15연대는  운산 바로 북쪽의 전투에서 중공군 한 명을 생포한다. 아군이 생포한 첫 중공군 포로였다. 포로는 근처에 2만 명의 중공군 병력이 있다고 말한다. 

공격전 상황판을 설명하는 중공군 소대장은 수류탄 4발을 파우치에 메고 있다. 수류탄은 약한 흑색 화약을 다량으로 사용해야 했기에 무척 크게 무거웠다. @자료사진
공격전 상황판을 설명하는 중공군 소대장은 수류탄 4발을 파우치에 메고 있다. 수류탄은 약한 흑색 화약을 다량으로 사용해야 했기에 무척 크게 무거웠다. @자료사진

미군 8군 지휘부는 중공군 포로의 진술과 백준엽 준장(1사단장)의 중공군 개입 보고를 묵살한다.  소규모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유엔군이 잇달아 전투에서 밀린다. 워커 중장은 평양에 머물던 미군 1기병사단에 운산을 지나 압록강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10월 30일 1기병사단의 선봉인 8기병연대가 운산에 이르러서 한국군 12연대의 임무를 맡는다. 12연대는 구룡강 남쪽 입석의 재집결지로 이동한다.  11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궤멸된 한국군 2군단 8사단과 접촉하기 위해 동쪽으로 움직인다.  북쪽의 15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맥아더는 평양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해 추수감사절(11.13)전에 전쟁을 끝내 겠다는 선제공격을 단행한다는 작전을 감행한다. 동부지역을 담당했던 알몬드 10군단 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북진을 결정한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한다. 운산지역 삼탄강을 경계로 동서로 나뉜 한국군 1사단과 미군 8기병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고립된다. 이미 미 1군단 오른쪽의 한국군 2군단도 중공군의 공격에 와해된 상태였다. 철수 명령이 내려진다. 퇴로도 접령되어 철수도 어려운 상태였다.

11월 2일 생존자들은 항공기가 떨어트린 전문을 받는다. 구원의 시도가 실패했으므로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밤에 탈출하라는 명령이었다. 3일 낮엔 항공지원이 없었고 밤엔 중공군의 공격이 이어졌다.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됐다. 운산 전투는 중공군의 승리였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은 없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46만 명, 한국군과 유엔군은 53만 명이었다.(1950년 10월 기준) 병력 숫자로만 보면 아군이 많다. 한국전 참전 병력은 중공군은 30개 사단 약 33만명이다. 이 병력으로 인해전술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군사학자들의 설명이다. 일부 제한된 지역에서 인해전술을 이용한 것이다. 구대전법(口袋戰法)을 확용했다.  적이 깊숲이 들어 올 때까지 매복해 있다가 퇴로를 차단하고, 겹겹이 포위해 섬멸하는 전술이다.

항일 전젱과 중국 내전에 참전한 전쟁 경험이 많은 중공군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전술은 없었다. 다만 빠른 행군 속도를 이용한 구대전법을 펼쳐 한국군과 유엔군을 위험에 빠트렸다. @사진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항일 전젱과 중국 내전에 참전한 전쟁 경험이 많은 중공군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공군의 전술은 없었다. 다만 빠른 행군 속도를 이용한 구대전법을 펼쳐 한국군과 유엔군을 위험에 빠트렸다. @사진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중공군의 구대전법을 소개한 KBS'역사저널 그날_한국전쟁 비화'의 한장면 @KBS 캡처
중공군의 구대전법을 소개한 KBS'역사저널 그날_한국전쟁 비화'의 한장면 @KBS 캡처

당시 중공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의용군 형태로 참전한다. 항일 전쟁과 중국 내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중공군은 빠른 행군 속도를 이용해 많은 병력을 한 곳에 모아 공격했다. 하루 20㎞ 속도로 행군했다. 항상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전투가 벌어질 때 중공군이 더 많아 보였던 것이다. 

중공군이 한국에서 이른 승리를 보여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포스터 @자료사진
중공군이 한국에서 이른 승리를 보여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포스터 @자료사진

당시 중공군은 무기도 모자랐다. 세 명에 한 명씩만 총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꽹과리를 치며 뒤쫓아 오다가 앞사람이 죽으면 총을 들고 뛰어들었다. 무기의 열세를 꾕과리 소리의 공포로 대신했다.  70%가 산악인 한국 지형, 영하 30도의 겨울 추위, 게다가 중공군의   '구대전법'의 빠른 행군과 매복 공격이  한국군과 유엔군을 위협하기 충분했다. 이를 막아 내기 위해 엄청난 화력으로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중국군의 9.1배나 되는 포탄 소모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 사상자는 약59만명이다. 미군 사상자는 13만 명이다. 

미중 전쟁에 빠질수 없는 것이 장진호전투(長津湖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이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국 해병대와 중공군이 2주간 벌인 전투이다.   2차 세계대전의 모스크바 전투(1941.10.2-1942.1.7),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8.21.-1943.2.2)와 함께 3대 동계전투(冬季戰鬪)의 하나로 꼽힌다.

미군 제 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지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사단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한 철수작전이다.  

장진호는 한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인공 저수지이다.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한랭전선으로 영향으로 기온은 영하 37도까지 내려가는 곳이다. 

1950년 11월 27일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해병대가 포위된 뒤, 성공적으로 탈출하고 있는 모습
1950년 11월 27일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해병대가 포위된 뒤, 성공적으로 탈출하고 있는 모습

맥아더 원수의 최종공세 명령에 따라 11월 24일 일제히 반격으로 전환한다.

11월27일 동부지역의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 집결하고 있는 사단에 공격명령을 하달한다. “장진호에서 무평리(武坪里 : 희천과 강계 중간지점) 방향으로 공격, 제8군과 연결 후 강계 방향으로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동부와 서부전선 사이에 생긴 간격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미 10군단장은 미 사단이 서부지역으로 신속히 진출해 서부지역의 적을 8군과 함께 두 개의 방향에서 공격해 줄 것을 원했다.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사단의 주보급로가 확보되기 위해 비행장이 건설돼야 사단의 진출을 보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도로 확장공사와 함께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에 비행장 활주로 공사를 병행한다. 그로 인해 사단의 진출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11월 25일 스마스 사단장은 7해병연대를 유담리(柳譚里)까지 진출시킨 후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가담하기로 한다.  내륙공격의 발판이 되는 유담리를 저항 없이 점령한다.  다음날 제5연대가 유담리에 도착해 7연대와 합류한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된다.  비극의 장전호전투가 시작된다. 공간이 협소한 유담리 일대는 화염에 휩싸이면서 아비규환의 장소로 바뀌고 만다.  중공군은 하갈우리~황초령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나머지 사단을 예비로 확보해 둔 상태로, 미군을 포위ㆍ섬멸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포위망 속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27일~28일 밤 장진호 포위망 속에 갇힌 미군은 유무선 통신이 단절됐다. 연대 별로 제각기 중공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때문에 피해가 컸다.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은 3개 사단(79, 89, 59사단)이 미국 1해병사단을 세 개의 조각으로 분산시켜 각 부대를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각각을 고립시겼다. 부대 간의 연결도로도 차단했다. 5해병연대와 7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해병 5연대 2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한다.  좌는 7해병연대 3대대, 우는 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친다. 중공군 58사단이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해있고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하갈우리를 포위한다. 유담리, 고토리와의 연결을 차단하여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UN軍 최대 반격선 (1950.10.초~11.말)
UN軍 최대 반격선 (1950.10.초~11.말)

11월 30일 유엔군사령부의 철수명령이 접수된다. 장진호 서쪽의 160km 지점에서는 미 8군단 보병 제2 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한다. 오후 7시 30분 군단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하고 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하달된다.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담당하고 제7 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해병 7연대와 5연대는 하갈우리로의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한다.

12월 1일 미 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해서 제 5, 7 해병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하도록 명령한다. 오전 8시부터 해병 5연대 3대대를 시작으로 철수를 시작한다.

12월 2일 새벽 6시경, 해병 7연대 1대대는 5일동안 고립되어 있던 F중대 구출을 위해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F중대와 합류에 성공한다.

2월 3일, 전선에 눈이 내려 약 13cm의 적설량을 기록한다. 해병 7연대 1대대는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위치한 중공군 1개 대대를 공격하여 오전 10시 30분 경에 진지를 점령한다.  오후1시, 해병 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해병 7연대 1대대와 합류한다.  항공지원단의 엄호를 받으며 해병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하여 철수한다. 저녁 8시 경에 선두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한다.

12월 4일 오후 2시경에 해병 7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 진지에 도착 완료한다. 155mm야포 9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지프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킨다. 이날 한국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 수도였던 평양에서 철수한다.

12월 5일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후퇴한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평양-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 평양에서 철수한다.

12월 6일 미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1해병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공군 9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한다.

2월 7일 자정 무렵에 1만여 명의 병력과 1천대 이상의 차량이 하갈우리를 빠져나와  40시간 만에 고토리에 모두 도착한다. 이때 하갈우리에서 공산군의 격퇴를 위해 협조했던 1500여 명의 민간인도 함께 철수했다. 해병사단에 남은 과제는 영하 32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함께, 중공군이 사단의 철수로 차단을 위해 파괴시킨 수문교에 조립교를 설치하는 것과 황초령을 통제할 수 있는 1081고지를 사전에 확보였다.

12월 8일 고토리에서 철수준비를 마친 해병사단은 오전 08시, 황초령을 향해 철수를 시작한다.  12월 9일 미 10군단은 모든 유엔군은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된다. 사단의 공병대대는 군단의 지원을 받아 항공기로 수송된 조립교를 파괴된 수문교에 설치한 뒤 밤을 이용해 병력과 차량들이 유도병의 안내를 받으며 통과한다. 해병대는 살인적인 흑한과 사투를 거듭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황초령을 넘는다. 

12월 10일 오전 6시, 미국 제1해병사단의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한다. 12월 11일 저녁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한다. 해병사단은 11월 27일 유담리에서 철수를 개시한 이래 12월 11일까지 17일간의 철수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기간 중 인원손실은 전사 393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으로 총 손실은 2621명이었다.

철수 직후, 폭파되는 흥남항 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철수 직후, 폭파되는 흥남항 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 Hungnam evacuation)는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흥남구역에 위치한 흥남항에서 미군과 유엔군, 피난민을 구출할 목적으로 실행된 철수 작전이다. 당시 유엔군의 작전 암호명은 비공식적으로 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로 알려져 있다.  철수 작전이 큰 피해없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크리스마스의 기적(Miracle of Christmas)이라고도 불린다.  유엔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해상으로 철수한다.  한국영화<국제시장>이 흥남철수가 배경이다. 

피난민
피난민
피난민
피난민

1·4 후퇴 유엔군 반격

중국은 12월에 중공군과 북한군을 통합 지휘할 수 있는 연합사령부를 설립한다. 팽덕회가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계속 공세를 취하기로 결심한다. 한국군을 집중 공격하여 방어선의 균형을 무너뜨린 후에 미군 등 다른 유엔군을 분할 섬멸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임진강을 도하하고 문산 지역까지 남하한다.

매슈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1895. 3. 3. ~ 1993.7. 26.)미 8군 사령관은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한다. 1월 3일 정오에 서울 철수를 결심한다.  이승만 정부는 이미 부산으로 옮겨갔다. 유엔군도 1월 4일  13시경 한강 남쪽으로 철수를 완료한다.

매슈 리지웨이는 12월 23일 월턴 워커(Walton Walker)8군 사령관(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후임 사령관의 중책을 맡게 됐다. 임명 직전까지 미 국방부 육군의 운영 및 관리 담당 차석 보좌관을 일했다. 

1950년 1월 4일 중앙청을 점령하고 환호하는 중공군
1950년 1월 4일 중앙청을 점령하고 환호하는 중공군
1.4후퇴 피난길에 얼어붙은 한강 얼음판에서 부모를 잃고 울고있는 아이들의 모습 @자료사진
1.4후퇴 피난길에 얼어붙은 한강 얼음판에서 부모를 잃고 울고있는 아이들의 모습 @자료사진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 본토 폭격을 주장한다. 미국 합참본부는 소련 개입을 우려하며 반대한다. 현 전선 방어가 어려우면 일본으로 철수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안을 받아 들인다.  

1951년 1월 중순경, 유엔총회 제1위원회에서 휴전안을 제시한다. 중국이 거부한다. 그러자 미국은 1951년 2월 1일 중국을 “침략자(aggressor)”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여 통과시킨다.

전쟁으로 파괴된 용산기지 내 국방부와 육본청사를 둘러보는 이승만 대통령(중)과 밴플리트 미국8군 사령관(좌)
전쟁으로 파괴된 용산기지 내 국방부와 육본청사를 둘러보는 이승만 대통령(중)과 밴플리트 미국8군 사령관(좌)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1월 25일 반격을 지시한다. 서부전선에서 한강진출작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중동부전선 반격작전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저항으로 저지된다.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계속된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이 처음으로 중공군을 제압한다. 3월 23일경 서울을 탈환하고 춘천을 점령한다. 3월 31일  38도선에 근접한다.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승리’를 주장한다. 트루먼 행정부는 정치적 협상에 의해 ‘명예로운 휴전’으로 종결되길 바란다. 결국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 주일 연합군사령관 등 모든 직에서 해임된다. 후임에 8군사령관이던 리지웨이가 임명된다. 그리고 밴플리트 중장이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유엔군에 포로로 잡힌 중공군
유엔군에 포로로 잡힌 중공군
유엔군에 포로로 잡힌 중공군 문화공작대 여군들의 모습 @자료자산
유엔군에 포로로 잡힌 중공군 문화공작대 여군들의 모습 @자료자산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괴멸

유엔은 중공군 개입이후 전쟁을 '휴전(休戰)'으로 종전(終戰)시키려는 정책을 진행한다. 미군과 중공군은 숭리보다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려는 개념 아래 전투을 계속한다. 1951년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될 무렵  4월 24일 밤 경기도 파주시 파주시 적성(積城) 설마리(雪馬里)와 감악산(紺岳山 675m)지역에 배치된 영국 29여단 글로스터(Gloster)대대는 임진강을 도화한 중공군  63군의 1개 사단에 공격을 받는다. 
완전 포위 당한다. 25일 영국군은 탈출을 시도한다. 아군이 있는 남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26일 적군이 있는 북쪽으로 일단 탈출한 후에 남쪽으로 내려온 1개 중대 67명은 무사히 생환한다.  대대병력 전원이 전사, 부상 또는 포로가 된다. 글로스터 대대의 설마리전투는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실시된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사로 기록된다. 영국 글로스터시는 이 전투를 기억하기위해 시의 강변 도로를 '파주길'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북 분단 여전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停戰協定 , Korean Armistice Agreement)이 체결되면서 끝을 맺는다.  정전협정서는 유엔군(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사령원 펑더화이) 간에 체결된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작성된다. 대한민국은 협정의 체결 주체가 아니었다. 

정전협정 서명자 사인 @자료
정전협정 서명자 사인 @자료

이 전쟁은 유엔군, 미군, 한국군과 북한군, 중공군 간의 전쟁이다. 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 사령관인 맥아더 미 육군원수에게 대한민국 국군 지위권을 위임했다. 한국군이 유엔군사령부 휘하에서 전쟁을 치렀다. 유엔군이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 16개 참전국을 대표해 서명한 것이다. 당시 한국이 유엔회원국이 아니었다는 점을 들어 정전 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미군과 중국군의 전력 비교

미중 전쟁은 한반도에서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핵무기로 종식시킨 미계은 세계 최강의 전력을 갖게 된다. 대영제국이 몰락하면서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다.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다. 이로써 소련도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갖게 된다. 미소 냉전시대가 시작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중국이 한국 전쟁이 참전한다.  당시 중국은 항일 전쟁과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신생국이었다.  전쟁터는 한반도 였지만,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 지역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된다.

미국과 중국의 첫번째 교전은 한국전쟁 이전인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미합중국 해군이 청나라 군대와 교전한다. 베리어 전투이다. 청나라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참패한다. 이외 청나라와 의화단(義和團)이 서구 8개국 연합군과 벌인 국제전쟁인 '의화당 운동(義和團運動, 1899.10.18-1901.9.7.)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이 참여해 청나라 군대와 교전한바 있다. 

8개국 연합군
8개국 연합군

1949년 마오쩌뚱은 초대 국가 주석으로 하여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의 성립을 선포한다.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문공화국은 분단국가로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의 합법 정부는 자국임을 표방한다. 중화민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부흥기(1949~52)→제1차 5개년계획기(53~57)→제2차 5개년계획기 (58~60)→ 조정기(61~63)→제3차 5개년계획기(66~70)→제4차 5개년계획기(71~75)→경제발전 10개년계획(76~85)등 경제가 급성장한다.

한국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땅만 큰 변방국이었다. 일제와의 항일 전쟁과 국민당을 이끄는 장개석 군대와의 내전으로 피패해진 상태였다. 전쟁을 치를 만한 여럭이 없었다.  어떠한 형태로 전쟁을 하더라도 중국군이 미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었다. 재래식 전력부터 비대층 전력까지 모든 면에서 대부분 미군이 압도적이었다. 전략/전술적 경험과 정찰 지원이나 실전 경험에서도 미군과 비교가 안됐다.

◆미군 화력, 중국군 20배

1950년 중국의 GDP는 미화 155억$(426억 원(元)), 미국은 3,001억$이다. 비교할 수도 없었다. 중국군은 전방 병사 1명을 위하여 후방에서 1명이 보급 지원했다. 반면 미군은 전방 병사1명을 위해 후방 9명이 지원했다.  첨단무기, 따뜻한 방한복, 휴대용 통조림, 사탕, 코카콜라, 커피 등을 충분히 보급 지원한다. 11월 23일 추수감사절에 미군은 압록강 변의 혜산 전장에서 새우 칵테일, 칠면조 요리로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미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공군과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는 세계 최강의 대국이었다.

◆중국군 무엇으로 싸웠나?

중국군은 별로 쓰지도 못하는 가련할 정도의 무기와 원시적 보급체계, 신발은 운동화를 신고, 옷은 누비옷을 입고 식사는 메고 다니는 말린 옥수수가루 먹으며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싸웠다. 중국군은 굶고 동상으로 죽은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 발생한 사상자

 

美ㆍ中 貿易 戰爭 속 中國 '향미원조(抗美援朝)'강조

중국 단동 향미원조 기념관
중국 단동 향미원조 기념관

미중 갈등은 새로운 냉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미ㆍ소 냉전 체제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중국이 냉전 체제의 주체로 등장한다.  세계 경제 1ㆍ2위를 차지하고 있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이, 한국 전쟁을 통해  중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2020년 10월23일 시진핑 총서기는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70주년 기념대회에서 ”적은 무력은 강하지만 기백(氣魄)이 적었고(敌人是钢多气少) 우리는 무력은 약했지만 기백이 강했다(我们是钢少气多).”고 강조했다.

비록 열악하고 잔혹한 전장 환경에 처했었지만, 강한 기백으로 역경을 이겨냈다고 했다.

시진핑은 "항미원조전쟁에서 얻은 귀한 유산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진귀해진다"고 하면서 "위대한 고난의 정신을 고양하고,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한다"(不忘初心)고 말했다.

전후 제기된 전쟁범죄

▶거창 양민학살 사건

▶조선인민군: 소위 인민재판 등의 조직적인 전시 민간인 학살,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 함흥 학살 사건, 영광군 학살 사건, 303고지 학살, 대전교도소 학살 사건(상호간)

▶한국군: 한강 인도교 폭파,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보도연맹 학살,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대전교도소학살 사건(상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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