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좌))과 더글러스 맥아더(우)는 한반도 정책에 관해 갈등을 빚는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을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한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좌))과 더글러스 맥아더(우)는 한반도 정책에 관해 갈등을 빚는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을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한다.

맥아더 38도선 월선 주장/국무부는 남침 주장

한국 현대사의 깊은 음영을 드리운 한국전쟁(韓國戰爭,Korean Conflict)은 개전(開戰)관련 정치적 시각에 따라 남침설,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으로 나뉘어 논쟁이 되고 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불법 남침하면서 발생한 한반도 전쟁이다.  해외에서는 '한국 전쟁(Korean War)'라고도 부른다.

북한군은 6월 28일, 남침 3일 만에 소련과 중국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서울을 접령한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UN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 북한군 침략 격퇴를 위한 '6·26결의안'을 통과시키며 UN군 참전을 결정한다.

한·미 연합작전 수행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은 7월 18일부터 UN군 사령관에 위임된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2주일 뒤인 9월 28일, 북한군에 피탈된 지 3개월 만에 수도 서울이 탈환한다.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다.

6.25전쟁의 경과 @두산백과
6.25전쟁의 경과 @두산백과

10월 7일 UN총회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된다. 10월 9일 국군과 UN군의 전면적인 북진작전이 시작된다. 북한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에 긴급 지원요청을 한다. 소련군이 참전하면 6.25전쟁이 3차 세계 전쟁으로 확전될 것이라고 우려한 스탈린이 이를 거절한다. 대신 공군을 압록강, 두만강 국경지대에서 활동하게 하게 한다.  

북한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는다. 다만 미국의 북한 점령을 경계한 중국 마오쩌둥은 10월 8일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으로 개편하여 북한에 중공군을 참전시킨다. 중공군의 집중적인 공세에 밀려 UN군은 38선 남쪽으로 후퇴한다.

1951년 1월 4일까지 한강 이북의 모든 부대를 철수시킨다(1·4후퇴). UN군의 철수 직후 서울은 중공군에 점령당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한다. 미8군사령부도 대구로 후퇴한다.  중공군과 UN군은 서로의 전력 손실과 장기전 우려로 인해 휴전회담을 계획한다. 이는 동서 간 냉전체제 속에 권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논리에 기인한 것이다.

휴전협상은 1951년 7월 10일에 처음 열린 이후로도 UN군과 공산군의 전투가 반복되며 약 2년간 이어졌다. 1953년 7월 27일 한국군 대표 없이 UN군 대표 클라크, 북한 대표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가 '정전협정서'에 서명한다.  3년 1개월 2일, 총 1129일 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휴전된다. 

38선 팻말 @자료사진
38선 팻말 @자료사진

◇6.25 전쟁 원인 논쟁

문제는 전쟁의 원인을 두고 남과 북의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누가 먼저 38선을 넘었는가?"라는 질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북군사분계선 '38선'을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일어나기 전까지 3년 1개월동안 일어났다.

북한군이 38선 너머 남진한 것을 ‘남침’이라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38선은 한반도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북위 38°선을 지칭한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다. 일본이 항복한다. 일본군이 무장해제된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소 점령군의 군사분할선(軍事分割線)이다. 이 가상선(假想線)을 중심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남과 북을 각각 신탁통치한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것을 두고 논쟁이 되는 이유는, 국경선(國境線)과 가상선(假想線)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국경선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선이다. 국경선을 넘었다면 남침이라고 정의하는 게 맞다. 다만 가상선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월선(越線)이라고 해야 한다. 

38선과 군사분계선의 비교 @나무위키
38선과 군사분계선의 비교 @나무위키

38선은 애당초 1945년 일본 항복 후 미·소 양국이 순수한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시적 편의를 위하여 책정한 ’가상의 선(imaginary line)‘이다. 당시 조선 반도에 국가는 없었다. 국경선으로 그은 선이 아니다. 따라서 조선군이 38도선 너머 내려온 행위는 내전에서 흔히 일어나는 월선(越線) 행위이라는 주장이다.

맥아더는 1951년 미 상원 연설을 통해 “김일성은 설정된 지 5년 된 38도선을 넘은 것"이라며 "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경계나 독일과 폴란드의 경계 같은 국경(an international boundary)을 넘은 것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남쪽으로 침략(aggression)한 ‘남침’이 아니라 38도선 너머 월선(the crossing of the parallel)한 행위, 즉 ‘내전(a civil’ war)이라는 주장이다.

영국의 한 외교관은 “모든 나라는 자신의 장미전쟁(파벌싸움)을 가질 권리가 있다”면서 "6.25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은 전쟁을 통하여 식민주의, 민족분단, 외세개입 등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국무부는 ‘침략’이란 용어 사용을 강요해 왔다. 미군의 한국전  참전과 주둔의 도덕적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전쟁을 예견했다.  비밀해제된 미국의 외교문서와 각종 증거에 의하면, 당시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를 대비한 상세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국 상원은 청문회를 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미국 국무부차관보 히커슨은 "6.25전쟁 당일 30명의 국무부 직원이 출근해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참석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는 미국이 북한군의 남침을 사전에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미국 국무부 북한군 남침 예상 유엔결의안 사전 작성 △남침과 동시 유엔안보리 상정 예정 사실 △남침 당일 30명의 국무부 요원 출근해 소련대표 말리크의 유엔안보리 복귀와 거부권 행사 가능성 대비 등을 밝혔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소련제 T-34 탱크와 모터사이클 정찰대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소련제 T-34 탱크와 모터사이클 정찰대

미국 중앙정보국(CIA) 초대 국장 힐렌퀘터도 의회 증언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히 예측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CIA는 북한군이 38선 주변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병력과 전차를 집결시키고 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북한군 남침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던 1950년 6월 19일자 문서가 포함돼 있었다.

맥아더의 후임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967년 출판한 책 <한국전쟁(The Korean War)>에서 "미 CIA의 1950년 6월 19일자 보고서를 읽었다"며 "북한군의 남침을 예측했다"고 밝혔다.

CIA의 보고서에 북한군이 38선으로 이동했다. 38선 부근 모든 북한 주민이 38선 이북 2킬로미터 넘는 지역으로 이주했다. 원산에서 철원으로 가는 모든 민간화물 노선이 전적으로 군용화물 운송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장한 군인들과 방대한 규모의 탄약과 장비가 38선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리지웨이는 "6월 19일자 정보보고서를 읽은 사람 가운데 북한군의 남침 임박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윌러비 극동군사령부 정보첨모부장(소장)은 1951년 12월 코즈모폴리턴이란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극동군사령부가 은밀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정보 수집 및 분석조직을 운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수집한 정보를 워싱턴으로 전달했다. 북한군의 남침이 있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북한군의 전쟁준비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도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1950년 5월 10일 외신기자회견을 갖고 "북한군 부대가 38선을 겨냥해 대거 이동하고 있다"며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했다"고 말했다.

북한군 병력이 18만3000명에 달하고 17대의 전차와 195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북한군 남침으로 확인된 결과, 그의 발표는 거의 사실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한 이틀후 6월27일 수원비행장에 나간 이승만(오른쪽 두번째)대통령은 맥아더가 급파한 처지 준장(왼쪽),  무초 미대사(오른쪽)와 함께 전황을 논의함. @공정뉴스 자료사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한 이틀후 6월27일 수원비행장에 나간 이승만(오른쪽 두번째)대통령은 맥아더가 급파한 처지 준장(왼쪽), 무초 미대사(오른쪽)와 함께 전황을 논의함. @공정뉴스 자료사진

이승만 대통령도 1950년 5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군이 38선 부근으로 집결하고 있다"라며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국은 이 문제를 유엔과 미국을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와 극동군사령부는 한국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남침 임박 주장을 묵살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징후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도 김일성로부터 전쟁 개전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미국과 러시아가 한국전쟁이 발발할 것을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냉전시대가 서막을 알리는 대리전 양상을 띄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냉전시대의 첫 도화선이 바로 38선에 있었던 것이다.

1947년부터 시작된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 본격화, 미국의 대소정책이 전환된다.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 마샬플랜(Marshall Plan)이 시작된다.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한다. 소수의 정부 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국가에 대해 군사적ㆍ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 소련(스탈린), 중국(마오쩌뚱)을 중심으로 한 공산 세력이 급격한 공산화를 저지하는 반공방위지대를 구축하는 냉전체제를 선언한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포기하는 대 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소(對蘇)봉쇄 노선을 수립한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애치슨은 극동방위선을 선언한다.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한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한반도와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한국과 대만을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미합참에서 태평양 지역에 공산화된 중국이나 소련이 불법 침략 야욕을 보인다면 미국이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양보해서는 안될 전략적인 중요거점을 표시한 것이다. 

한반도는 미국, 중국, 일본, 소련 등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특수 지역들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경우, 미국이 아시아 정책의 주축으로 삼고 있는 일본이 위험해질 수 있다. 소련은 1950년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의 체결로 태평양으로 향하는 유일한 항구와 부동항을 상실하면서 아시아에서 전략상 거점을 상실한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 개시에 동의했던 것은 승패 여부와 관계없이, 극동에서 설정했던 소련의 전략목표를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에 타이완 해협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도 ‘양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주도권으로 넘어갈 경우 중국이 두 군데 국경 지역에서 위협을 받게 된다. 일본은 2차 대전 패망으로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한국전쟁으로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수혜를 많이 봤다.  

 <정의전쟁론(Just and UNJUST WARS)>저자인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사회과학부 교수는 "트루먼이 38도선을 국경선이라고 보고 침략이라고 판단한 것은 옳다. 유엔(United Nations: UN)에 상정할 수 있었고, 유엔에서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건 논리가 아니라 궤변이다. UN은 미국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곳.미국은 1945년 전후(戰後) 세계평화와 안전 및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 LIO)를 구축하기 위해 다자주의(multilateralism)적 국제협력외교의 일환으로 UN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다. 

미국은 캄보디아, 모잠비크, 엘살바도르, 코소보, 동티모르 등 여러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도구로서 UN을 활용한다. UN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평화유지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한다.  미국은 UN의 다자 협력체제에 대해 때로는 무시하고 일방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북한군은 남침 3일만에 서울을 접령했다. 서울에 들어서는 북한군 @공정뉴스 자료사진
북한군은 남침 3일만에 서울을 접령했다. 서울에 들어서는 북한군 @공정뉴스 자료사진

38선을 국경선을 판단한 ‘남침’은 반공 교육을 받은 우리에게 굳어진 정설이다. 우리는 이를 근거로 남침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38선은 근현대사에 아픈 역사이다.  러일전쟁 직전 일본에 의해 그려진 가상선이었다. 일본은 재정 리서아(로마노프 왕조)에 38선을 중심으로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러시아가 이를 무시했다. 일본은 1902년 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었다. 이번엔 러시아가 39선으로 재분할을 제의한다. 일본이 러시아를 무시한다. 그 후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일본군은 1945년 5월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눠 북은 관동군이, 남은 조선주재 일본군(17방면군)이 관할하도록 한다. 이와 관련 일본이 남북분단을 유도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명확한 인과관계가 부족하다. 군사적분리선인 38선은 6.25전쟁으로 사라진다.  휴전선이 대신한다. 

6월25일(미국시간) 주미 대사 장면이 유엔 안보리 회의장에서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의 손을 잡고 긴급지원을 호소하고 있다.@공정뉴스 자료사진
6월25일(미국시간) 주미 대사 장면이 유엔 안보리 회의장에서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의 손을 잡고 긴급지원을 호소하고 있다.@공정뉴스 자료사진

◇6월 27일 유엔 조선군 침략 '남침' 규탄 결의안 통과

6.25전쟁이 발발한 당일 오전 8시, 무쵸(John J. Muccio) 주한 미 대사는 북한군의 전면 남침 소식을 듣는다.  이 사실을 전문으로 작성해 국무부에 발송한다. 이 전문은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4일 밤 10시 15분경 해독된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 집에 휴가 중이었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농장에서 쉬고 있었다.

대부분 워싱턴 정책 담당자들은 주말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6월 25일 일요일 밤 7시 30분 대통령관저에 급히 모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군에 추가적인 탄약보급, 7함대의 대만해협파견, 극동에 있는 미공군에게 적기에 대하여 “공세적 행동”을 취할 것" 등을 지시한다.

6월 27일 미국의 요청으로 열린 UN 안전보장이사회 '474차 회의'가 열린다. 북한군 침략을 막기 위한 UN군 참전이 결정된다. "북한이 남침하여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유엔에 도움을 요청해 왔다. 국제 평화와 지역 안전을 회복하는데 한국에 원조를 필요하다".  한국이 UN에 도움을 호소하는 결의안(제82호. 제83호)이 소련의 거부권 행사 없이 통과된다. 당시 소련은 대만으로 쫓겨난 장개석 정부가 중국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안보이사회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1950년 6월 27일부터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고 미국 군사사는 적고 있다. 1개 야전군 규모로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참전군은 1,789,000명, 전사자 36,940명, 부상자 92,134명, 실종자 3,737명이다. 대표적 전투는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오산 전투를 비롯하여 대전 전투, 낙동강선 방어전투, 인천상륙작전, 서울 및 평양탈환작전,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작전, 벙커고지 전투, 그리고 저격능선 전투 등이다. 미군 지상군은 알바니(Albany)작전을 비롯하여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코만도(Commando)작전, 킬러(Killer)작전, 파일드라이버(Pile drive)작전 등을 실시한다.

한국전쟁 당시 마릴린 몬로가 한국을 방문해 미군 위문공연하는 장면
한국전쟁 당시 마릴린 몬로가 한국을 방문해 미군 위문공연하는 장면

미국 공군은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안보 환경이 군축(軍縮, 군비 축소)으로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은 상태였다.

미국 내에서는 "병사들을 집으로 보내라(Bring Boys Home)"는 요구가 제기됐다.

2차 대전 종전 당시 해외 주둔군 포함 1200만 명이던 병력이 146만 명까지 감축됐다.   당소 소련은 175개 사단 430만 병력을 유지했다.

당시 극동지역의 극동군은 8군을 비롯해 극동해군, 극동공군이 각각 일본 및 인근 도서지역에 주둔했다.

일본 요코하마에 사령부를 둔 8군은 예하 부대로 1군단과 9군단이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 28일 국방부의 감축으로 군단이 해체된다. 사단으로는 훗카이도에 7보병사단, 혼슈 중부에 1기병사단, 혼슈 남부에 25보병사단, 큐슈에 24보병사단, 오키나와에 29연대+제9방공 포병단 등이 있었다. 미군들은 전승국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느라 전투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극동공군 전력은 18개 전투 및 전투폭격비행단, B-26 경폭격기로 편성된 1개 경폭격기 비행단, B-29 중폭격기로 편성된 1개 중폭격기 비행단, 그리고 몇 개의 병력 수송부대로 편성되었다.

극동공군의 주요부대로는 일본 나고야에 주둔한 제5공군,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주둔한 13 공군,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 기지에 주둔한 제20공군이 있었다.

극동해군은 해군 중장 터너 조이 제독이 지휘하고 있었다. 미 극동해군에는 상륙부대의 핵심인 제90기동부대와 소수의 전투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제96기동함대가 있었다. 이들 극동해군의 전력으로는 1척의 경순양함, 4척의 구축함, 6척의 어뢰정, 보조함 및 상륙용 주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별도로 필리핀 해역에 해군 중장 아더 스트러블 제독이 지휘하는 미 제7함대가 있었다. 보유 함정은 1척의 항공모함, 1척의 중순양함, 8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이 있다. 그리고 랜드리스 무기대여법으로 대여되었다 소련에게서 돌려받은 타코마급 호위함 27척,수송선, 유조선, 소해정 등이 있었다.

미국은 합동전략분석위의 보고서에 의해 국가안보에 중요한 지역을 주변지역(Peripheral)과 핵심지역(Vital)로 분류했다. 그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한 후 대외 원조를 실시했다. 한국은 주변지역으로 분류됐다. 우선 지원 순위에서 18개국 중 5위, 안보 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5위였다. 두 가지를 종합한 우선순위에서 13위를 차지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느라 북한 등에 의한 국지전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소련과 전면전을 위해서는 차라리 주한미군 2개 사단을 후방으로 돌리는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 이때 미군 극동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 한국의 공군 기지가 소련지역과 가깝지도 않고, 오키나와 기지처럼 안전하거나 편리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너진 한강 대교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1951년 폴리쳐상을 수상한 맥스 데스퍼의 작품.
무너진 한강 대교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1951년 폴리쳐상을 수상한 맥스 데스퍼의 작품.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침공 이후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한국과 미군의 지상군은 후퇴를 거듭한다. 당시 공군력은 공황 상태였다. 당시 10개 주요 비행장이 있었다. 대부분 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2차 세계 대전의 유물이었다. 콘크리트 활주로를 보유한 곳은 수원과 김포 두 곳 뿐이었다. 나머지는 자갈, 흙, 잔디 비행장이었다. 극동공군(FEAF)은 4,315개의 막사(Billet)중 절반을 약간 넘는 2,322개만 설치 할 수 있었다. 제트기를 운용할 수 있는 견고한 활주로는 없었다.  F-51, B-26과 같은 피스톤 엔진 항공기의 운용이 가능했다. 

6월 26일 일본 규슈에서 출격한 쌍발 야간 전투기인 F-82G 투윈무스탕(F-82G Twin Mustang)은 안양 상공에서 북한 공군의 야크(YAK7B)를 격추시킨다. 전쟁에서 공군의 역할을 보여준 것. 하지만 이후 미군의 오폭은 심각한 수준을 보여준다. 7월 3일 평택에서 한국군 화물열차, 수원에 있는 한국군을 공격한다.  미공군은 오폭이 심했다.

워싱턴과 뉴욕에서의 신속한 조치에 못지않게 맥아더 사령부가 있는 일본 동경에서의 행동도 민첩했다. 맥아더는 사령부의 전방지휘소를 한국에 설치하고 처치(John J. Church) 준장을 지휘소장으로 임명한다. 처치는 무쵸 주한 미대사와 협조하여 미군 군인가족 등 미국인 2001명을 일본으로 철수시킨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오전에 수원비행장에 내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다. 그리고 한강 남쪽 제방에서 쌍안경으로 전방을 둘러본 후 오후 18시가 넘어 수원 비행장을 떠난다.

맥아더는 한국에 지상군을 파견하여 삼군 협동작전이 필요하다고 워싱턴에 긴급 보고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30일 새벽,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온 지 5일 만에 미 지상군 투입과 해군의 북한 해역봉쇄 작전을 승인한다.

김일성, 1949~1950 소련 스탈린에 한국전쟁 허가 요청

김일성이 1949년 3월 박헌영 부수상 등 6명의 각료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군사 원조와 무기·장비 지원을 요청하고 ‘남침 전쟁’ 허가를 간청했다.@공정뉴스 자료사진
김일성이 1949년 3월 박헌영 부수상 등 6명의 각료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군사 원조와 무기·장비 지원을 요청하고 ‘남침 전쟁’ 허가를 간청했다.@공정뉴스 자료사진

1949년 3월 7일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난다. 전쟁 개전과 관련,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의사를 밝힌다. 소련이 붕괴된 뒤인 1994년 6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옐친 대통령이 '구 소련  비밀외교 문서'를 전달했다. 6·25전쟁 관련 216점, 548쪽의 문건이다.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 하는 대신 북한과 경제ㆍ문화 협정을 체결한다.  외견상이다. 실제 3월 17일 <조소 군사비밀 협정>을 맺는다.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부대, 8개 국경 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한다. 1949년5월20일까지 120명의 특별군사고문단 파견하기로 한다. 다음날 3월 18일에 모스크바에서 소련 당국의 주재 아래 조·중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측은 여하한 성질의 침략에 대해서도 공동 방위를 한다. 어떠한 제국주의 세력이든 북한 또는 중공의 일방을 공격하는 경우, 양국은 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동전쟁에 있어 공동행동을 취한다.” 이는 타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중공이 개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북한이 남침 전쟁을 도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협정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 :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우리가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남조선 반동세력은 평화통일에 결코 동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북조선을 공격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을 때까지 나라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다. 우리 군이 남조선군보다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조선 내에서 강렬하게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조선의 인민대중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 확실하다.

스탈린 : 북이 먼저 남침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조선인민군은 남조선 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내가 알기론 수적으로도 뒤진다. 둘째, 아직 남조선에는 미군이 있다. 적대관계가 되면 미군이 개입 할 것이다. 셋째, 38선에 관한 미소협정이 아직도 유효하다. 이 사실을 잊 어선 안 된다. 우리 측이 협정을 파기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김일성 : 그렇다면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를 통일할 기회가 없다는 뜻인가? 우리 인민들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반동정권과 미국 상전들의 멍에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고 있다.
스탈린 :  적에게 침략 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침략해올 것이다. 그들이 공격해오면 반 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때 반격하면 모든 사람이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지할 것이다.

소련은 김일성의 전쟁 계획과 무력 통일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개입 여부를 중요하게 고려했다. 소련은 전쟁보다 게릴라 전을 통해 남한 자체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무엇보다 남한 측이 먼저 도발하도록 한 뒤 공세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일성이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만나는 모습. 스탈린은 50년 4월 10일 남침 전쟁을 승인한다. @공정뉴스 자료사진
김일성이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만나는 모습. 스탈린은 50년 4월 10일 남침 전쟁을 승인한다. @공정뉴스 자료사진

이후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3월 30일에서 4월 25일에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국제 환경과 국내 상황이 조선통일에 적극적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환경이 바뀌었음을 강조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국민당은 미군의 지원을 받았고 중공보다 병력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에서 우세했지만 부정부패로 인해 패배했다.  미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됐다. 북조선 뒤에 소련과 중국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미국 스스로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 : 모택동 동지는 항상 조선 전체를 해방하는 우리의 희망을 지지했다. 중국 혁명만 완성되면 우리를 돕고, 필요한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조선통일을 이루겠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스탈린 : 완벽한 전쟁준비가 필수이다. 무엇보다 군사력의 준비태세를 잘 갖추어야 한다. 엘리트 공격 사단을 창설하고 추가 부대 창설을 서둘러야 한다. 사단의 무기보유를 늘리고 이동 전투수단을 기계화해야 한다. 이와 관련된 귀하 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겠다. 그런 연후에 상세한 공격계획이 수립돼야 한다. 기본적으로 공격은 3단계이다. ①)38도선 가까이 특정 지역으로 병력 집결, ②북조선당국이 평화통일에 관해 계속 새로운 제의를 내놓을 것, ③상대가 평화제의를 거부한 뒤 기습공격을 가할 것 등이다.

옹진 반도를 점령하겠다는 귀하의 계획에 동의한다. 공격을 개시한 측의 의 도를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북측의 선제공격과 남측의 대응공 격이 있은 뒤 전선을 확대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한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한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이 발발해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을 분석한 자료를 상세히 설명했다. 공격을 신속하게 수행하면 3일이면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조선 내 빨치산 운동이 강화돼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박헌영도 남조선 내 빨치산 활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20만 당원이 그곳에서 대규 모 폭동을 주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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