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원주민은 아메리칸 인디언(Indigenous people of America)이다. 유라시아(Eurasia) 대륙에 살던 이들의 조상이 1만 5,000년 전에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대륙으로 이동했다. 북미대륙은 광활한 토지를 갖고 있다. 인구는 적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처음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 그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기 휠씬 이전부터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당시 인구는 2,000만명~3,000만명으로 추정된다.
1620년 9월 16일 영국 청교도인((Puritan)들은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미국 동부 해안에 상륙한다. 이민자 102명 중 청교도인은 35명이다. 1527년 헨리의 8세 이혼(이혼무효) 문제로 촉발된 교황과의 갈등은 1533년 잉글랜드가 종교개혁을 선포한다. 로마 카돌릭과 결별한다. 잉그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는 1533년 첫번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 한 후 앤 블런과 결혼한다. 1559년 영국성공회가 카돌릭 교회에서 분리된다.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믿음의 옹호자(에미리트)'로 인식한다. 왕위 지상령을 채택한다. 반대로 개신교적인 법을 폐지한다.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한다. 급진적 개혁을 추구한 청교도들은 성공화와 갈등을 야기한다. 종교적 박해로 이어진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미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한다.
15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이것이 세계의 기후흘 바꿔놓았다는 시각도 있다.
재래드 다아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를 통해 미시시피강 유역에 살던 원주민의 90%가 천연두로 전멸했다고 추정한다. 1671년에서 1619년 사이에 유럽에서 온 질병으로 사망했다.
현대 과학자들은 원주민 공동체가 유럽의 배에 실려온 쥐의 배설물로 인해 몰살됐다고 추정한다. 쥐의 배설물에는 온갖 박테리아, 렙토스피라증 바이러스가 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건너 온 전염병은 해당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없던 원주민들은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의 개척정신(frontier spirit, 프론티어 스피릿)을 강조한다. 서부 개척 시대에서 건국 시대의 독립 정신(independent spirit)로 이어진다. 서부 개척은 인디언의 수탈의 역사가 된다. 인디언 촌락은 대부분 불태워진다. 와스프에게 학살당한다. 인디언을 악마로 보고 거침없이 살해한다. 법보다 주먹, 법보다 총의 시대였다.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넓고 싼 땅을 요구하는 와스프가 인디인 땅까지 서진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미국의 최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89.4.30.~1797.3.3)은 미국 성립 이전에 아메리칸 인디언 말살 정책을 추진한다. 초토화 작전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서진에 살 땅을 잃고 강제 이주를 당하고 학살 당했다. 1622년부터 1924년까지 북아메라카 대륙에서 인디언전쟁(American Indian wars, American Frontier Wars)이 발생한다. 미국 와스프와 원주민간의 전쟁이다.
미국은 평등한가. 「미국 독립선언서」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중적 잣대이다. 인간의 범주에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Negro) 등 유색인종은 포함하지 않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에서 보듯이 흑인은 가축처럼 대했다. ‘미 대륙에 거주한 열등한 민족을 교화(학살)하는 것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와스프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1776년 7월 4일 영국 식민지였던 13개 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메이플라워서약(Mayflower Compact)’에 따라 독립을 선언한다.
정복자 백인을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ㆍ앵글로-색슨ㆍ개신교도)라고 부른다. 말벌을 가르키는 말로, 서로 유대 관계를 맺고 같은 집단끼리만 어우리고 꿀을 빨며 벌침 같은 무기로 떼를 지어 공격하는 특성에 빗댄 언어유희이다. 기독교 정신을 근간으로 토착민 인디언을 집단 학살하면서 신대륙을 개척했다.
비WASP 미국 대통령은 마틴 밴 뷰런ㆍ시어도어 루스벨트ㆍ프랭클린 D. 루스벨트(네덜란드계)ㆍ 도널드 레이건(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ㆍ드와이트D. 아이젠하워ㆍ도널드 트럼프(독일계)ㆍ존F.케네디(아일랜드계, 카톨릭)ㆍ바락 오바마(흑인)ㆍ조 바이든(아일랜드계, 카톨릭)등이다.
1920년대까지는 미국 200대 기업 대부분이 SASP계층 소유이다. 정치 권력도 공화당, 민주당 모두 이들 독점체제이다. 1930년 대공항 이후 유대인 등 신진 세력에 의해 재계 판도가 바뀐다. 유대인 등 신진세력에 의해 재계 판도가 바뀐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아일랜드계 출신의 존 F케네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는 등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된다. 조지 부시 부자는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다.
미국의 상징은 흰머리 독수리(Bald Eagle)이다. 흰머리는 백인(WASP)이며, 몸통은 인디언‧흑인‧유색인종을 지칭하고 있다. 고대부처 독수리는 힘의 표시로 여겨왔다. 로마 군단은 동물을 그들의 표준, 상징으로 사용했다.
◇와스프의 사명
원주민이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총을 가진 와스프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원주민 인구는 1860년대에는 4만 정도, 1870년에는 2만 5,000명으로 격감한다. 생존자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수용된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 했을 때도 필리핀 인구의 1/6 이상을 죽였다. 인도주의와 정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국시와는 전혀 다른 일면이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통치(1571.~1898), 일본 식민지(1942.~1045), 미국 군정시대(1945.2.~1946.7)등 외세애 의해 식민지를 겪는다. 1946년 7월 4일 독립한다.
와스프가 지닌 이런 야만적 기질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 와 노예로 부리던 버릇, 서부 개척 시절 인디언을 도살하던 버릇에서 생겨난 유전적 심리일 것이다.
◇미군 와스프 집단학살 책임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은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38도선 이하 한반도를 통치했다. 군정체제는 조선총독부에게서 한반도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어받아 통치한다.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U.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는 주한미군의 하부 조직이다. CIC요원. CIA전신이다. 국방경비대의 대대급, 해안경비대, 경찰 등에 고문 활동,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 활동이 원할하게 이뤄지는 일을 했다. 고문단의 통제는 주한미대사관이 담당했다. 미대사관 외교관과 같은 신분으로서 치외법권을 갖고 있었다.
고문단은 이승만 정권 등장, 친일군대와 경찰조직 채용, 한국인 민간인 학살 등이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군과 경찰에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했다.
군사고문단의 임무 규정은 1953년 6월 3일 명문화된다. <고문관의 처리지침(Advusor's procedure Guide)>이 발간된다. "한국군 총참모장의 선임고문관 역할을 하는 군사고문단장으로부터 한국군의 모든 제대에 배치된 미군 장교와 하사관은 군사작전에서 한국군 주요 지휘관의고문관으로 활동한다. 고문관의 임무는 한국군 부대를 지휘하거나 또는 실제로 한국군의 참모 기능을 수행하는것은 아니지만, 한국군의 계획,활동, 결정 등에서 한국군 상대자들에게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사고문단원들의 인내, 끊임없는 노력, 전문적 기술이 바탕이 되어야하며, 이를통해 한국군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는다"고 적고 있다.
군사고문단의 대표적 인물은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rry Hausman). 대위 시절인 1946년 미 군정청의 고문관을 맡은 뒤 1958년 중령으로 전역한다. 전역 뒤에 미 8군 사령관 고문으로 일하다 81년 정년 퇴임하여 미국으로 돌아간다.
국방경비대 고문관․미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냈고 1950년에는 채병덕과 이승만의 군사고문을 지냈다. 한국군 창설 과정에서 부터 군사독재 시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 전 대통령과 허물없는 관계를 유지한다. 한국군 창설에서부터 창군, 여수반란사건, 6.25전쟁, 5ㆍ16군사구데타, 12ㆍ12사태, 광주사태 등 한국 군부와 관련된 사건 현장에서 막후에서 역할했다. 한국군 고위층 인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미국의 커밍스는 저서<한국전쟁>을 통해 "하우스만이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가장 주요한 미국 요원이었다. 미국과 한국군부 간에 그리고 이들 정보기구 간의 연결자로서 활동했다"고 했다.
이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다. 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1908년 디트로이트 태생의 에드워드 랜스데일은 첩보공작원의 대부. UCLA를 다니다 입대해 2차 세계대전 때 OSS공작부에 근무한다. 1943년 미육군 중위로 임관한다. 45년 서태평양지역 육군항공대 사령부에서 정보팀(소령)을 맡아 48년까지 필리핀에서 활동한다. 필리핀군의 정보조직을 창설하고 실종상태인 연합군 포로를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1947년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하자 공군으로 전출한다. 군사정보학교 교관(중령)으로 활동한다. 1950년 필리핀 대통령의 개인적 요청으로 미군 원조 사령부에 배속되고, 필리핀군 정보조직 선임고문으로 일한다. 공산게릴라 후크단의 반란을 첩보활동을 통한 심리전으로 무력화 작전에 기여한다. 51년부터 53년까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의 미군고문단으로 활동한다. 남베트남에 첩보와 정보업무를 전수한다. 쿠데타를 막는 역할을 한다. 57년 본국 귀국한다. 이후 국방성과 국방부에서 특수작전 정보분야에서 고문으로 활동한다. 60년 공군 준장에 임명된 뒤, 61년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상대로 한 '몽구스'작전에 관여한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하우스를 한국판 에드워드 란스데일이라고 평가한 것은, 그가 한국의 현대사와 격동기에 발생했던 양민 학살 등에서 직ㆍ간접 관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 군정의 힌반도 통치 기간에 발생한 학살사건에 대부분이 미 군사고문단이 배후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한국 군과 경찰의 통치권을 군사고문단이 가지고 있었다. 지시·명령·승인이 있어야 실행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집단학살 행위의 근본 책임자는 와스프 미군이라는 것이 수정주의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학살하는 망나니짓은 한국인 경찰, CIC요원, 헌병, 기독교청년단원들이 집행하도록 직ㆍ간접 지시를 했다고 보고 있다.
노근리 집단학살사건, 신천 학살사건과 미공군 공습에 의한 학살사건 등은 미군이 직접 실행한 집단 학살 사건이다.
미군 학살책임자 중 두드러진 인물은 앞서 말한 제임스 하우스먼. 그는 35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 정치가를 다루었다.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을 수시로 자유 출입하면서 대통령을 조종한 책사였다.
집단학살사건의 한국인 최고위 책임자는 이승만 대통령, 조병옥 군정청 경무국장 그리고 1950년 6.25때 내무부장관 장택상을 든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출생, 기독교인, 미국 프린스턴대학 정치학박사이고, 조병옥은 1894년 충남 천안출생, 컬럼비아대학 철학박사다.
이들은 미국 박사라는 공통점을 지닌 인물이다. 어찌 그리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을까?. 영어에 능통했다. 기독교인이다. 종교와 언어의 소통이 가능해 군사고문관·정보원들에 주구 노릇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양민을 반공·빨갱이 타령하면서, 비기독교인을 악마로 보고 포악하게 학살했다는 게 수정주의 학자들에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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