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역사의 뒤뜰에 감춰져 있다. 한반도는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제에 의해,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군정 통치 과정에 왜곡된다. 근현대사는 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미 군정은 상해 임시 정부를 해체 시킨다. 대신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다. 친일 청산 대신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을 만든다. 일제와 미제에 의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당했다. 저자는 역사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한반도를 맨 끈을 풀고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 이 글은 저자의 견해이며 본지와 관련없다. (편집자주)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은 1947년 3월 12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서 선언한 외교 정책 원칙이다.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자에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국가에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 

미국 외교정책의 급격한 새 전환점이다. 서반구가 이제 더 이상 유럽 식민화에 예속되지 않은 것임을 천명한 1823년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의 세계적 확대판이다.

소련은 트루먼 독트린을 소련 지배지역 및 소련 확장에 대한 미국의 공공연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미소 냉전 체제

당시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가 주도하는 질서가 몰락한다. 세계 질서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다. 

1·2차 세계대전을 치른 영국이 터키·그리스 등 지중해 국가들에 더 이상 원조를 제공할 여럭이 없다고 발표한다. 체코·폴란드·루마니아·유고 등 동유럽에 이은 다른 유럽 국가마져 공산화를 우려한 트루먼이 자유국가의 방위를 지원한다는 외교원칙을 수립한다.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당시 공산세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그리스·튀르키예의 반공정보에 대해 미국은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 

마셜 플랜에 의한 원조 물자에 사용된 식별 표지(좌), "날씨가 어떻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는 내용을 담은 마셜 플랜 당시 미국이 선전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좌)
마셜 플랜에 의한 원조 물자에 사용된 식별 표지(좌), "날씨가 어떻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는 내용을 담은 마셜 플랜 당시 미국이 선전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좌)

트루먼 독트린은 외교정책의 기초가 되었고, 유럽 부흥 계획·북대서양 조약기구가 창설된다.  서유럽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마셜플랜(Marshall Plan)이 진행된다. 정식 명칭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마셜(G. C. Marshall)이 처음 공식 제안하였기에 ‘마셜 플랜’이라고 한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국에 행한 대외원조가 진행된다. 마셜 플랜의 특징은 '어느 나라든 공산주의에 반대만 한다면 무차별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당시 공산주의 소요로 혼란을 겪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 같은 국가들의 반공 정부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원조를 받는다. 이탈리아도 당시 정치세력 가운데 공산주의를 완전히 배격하는 조건으로 미국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그 결과 진보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기독교민주당 장기집권이 시작된다. 특히 동·서로 나뉜 서독에 가장 집중 지원을 받는다. 미국의 경제적 원조로 서유럽은 2차 대전 피해에서 일찍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동시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경제 종속관계에 형성된다.  이렇게 미국 패권주의가 만들어진다.

기본적으로 유럽 전체로 설정됐지만 참가국이 수용해야 할 일정 조선을 단서로 붙여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실질적으로 배제한다. 

트루먼독트린에 이은 마셜정책은 결국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뉜 미소(美蘇) 냉전 체제를 형성한다. 

역코스 정책

미국은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전부터 일본에서 역코스(everse course·逆コース )정책을 실시한다. 

당시 소련이 동구권 국가들을 공산화하고, 중국의 모택통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장개석을 대만섬으로 고립시키며 중국을 완성한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변화를 예고된다. 미국은 장개석의 중국 대신에 일본을 아시아의 방공(防共) 보루로 삼는다.  일본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루라도 빨리 재무장시키고 경제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데 중점을 둔다.

일본의 '민주화'도 이런 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급속히 역행한다. 이 역행(逆行)하는 정책, 즉 역정책(逆政策)을 역코스 정책이 실행된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민주화·비군사화 정책에 역행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정책을 펼친다.

역코스는 요요미우리 신문이 1951년 11월 2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특집 기사에서 유래했다.

애초에 일본을 점령한 미 점령군은 전쟁에 책임 있는 관료들 숙청하고 재벌억압 및 토지개혁 등으로 민주화를 추진하려 했다. 이것이 정도(正道)였다. 그러나 냉전이 도래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봉쇄하고 처벌하는 대신에 거꾸로 전범들을 도와주는 쪽으로, 정책을 바꾼 것이다. 이는 정도에 역행하는 반민주화 정책이다. 일본에서 전범들이 살아났다

트루먼과 천황

일본 현대사를 알기 위해서는 천황에 대한 위치를 알아야 한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 안쪽에 정박한 미전함 미주리(Missouri)호 선상에서 일본 정부는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국제법상의 대일 점령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연합국 측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일본 측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외상과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참모총장이 서명한다.

당초 히로히토(裕仁·1901-1989)천황이 서명할 예정이었다. 미국측은 천황에게 굴욕을 안겨 일본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될 것과 대일 접령에 지장할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명자를 바꾼 것이다. 당시 일본 제국헌법에서 통수권(군대의 최고 지휘권)은 독립되어 내각과 의회가 개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 대표(외상)가 항복 문서에 서명해도 통수부가 반대하면 무효가 될 위험마저 있었다. 천황은 입헌군주이자 대원수 직책을 가지고 있어 천황이 서명하면 일본의 정식 대표(원수)의 의사 표시가 되지만 천황이 출석할 수 없다면, 정부를 대표하는 외무대신과 대본영을 대표하는 참모총장의 서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아시아 냉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 지역이 된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패전국 일본에 관심을 집중한다. 하지만 소련으로선 일본에서 전쟁을 할 명문이 없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과 항복 문서에 기초해 GHQ의 점령을 받게 된다. 당초 GHQ는 일본의 민주화와 비군사화를 추진한다. 하지만 1947년 일본공산당이 준비하던 2·1 총파업에 대해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점령 정책이 전환된다.  이는 일본을 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삼고자 한 미국 연방 정부의 의도에 따른 것. GHQ가 발포했던 공직추방령, 단체 등 규정령, 점령 목적 저해 행위 처벌령과 같은 명령들은 원래 민주화와 비군사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사회주의 운동을 단속하고 감독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뀐다. 

당시 제3차 요시다 내각은 GHQ의 이러한 의향을 받아들인다. 레드 퍼지(Red Purge·レッドパージ)의 명분으로 일본공산당 소속 당원이나 동조자의 공직추방령으로 활용한다. 이를 계기로 보수 세력이 세를 늘린다. 1950년 미국에서도 공산주의자의 추방이 이루어졌는데,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의 선동으로 이루어져서 매카시즘으로 불린다.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일본에서의 역코스 전략에 정점을 이룬다. 전쟁은 한반도에서 발생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가장 큰 변화를 겪는다. 개전과 동시에 주일미군이 한반도로 출동하면서 일본은 바로 기지 국가가 된다.  미일동맹의 토대를 마련하여 냉전 기간 동안 일본이 미국 진영에 잔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주일 미군이라는 장치를 제공한다.

1950년 6월 26일 저녁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미 해군과 공군의 한국 출동을 명령한다.  맥아더는 주일미군 제8군 가운데 고쿠라에 있었던 24보병사단을 파견한다. 28일부터는 미 극동공군의 폭격이 시작된다.  한국전쟁 동안 일본의 15개 공항이 미 극동공군의 기지가 된다. 전쟁 초기 전투에서 북한군에 패배하면서 논란이 되었던 스미스 부대는 7월 1일 규슈에서 출발하여 한국 전선에 투입된다.

전쟁 막바지인 1953년 1월 31일 시점에서 일본 내 미군기지는 733개. 그 넓이는 전 국토면적의 0.378%이다.  구 일본군이 사용 하고 있었던 면적의 50%에 달하는 것. 해상 훈련장은 규슈 넓이에 필적했다.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곳은 오키나와. 일본 기지에서 출격한 공군이 72만 회를 상회했다 해군이 16만 여 회, 네이팜탄과 로켓탄의 양은 공군이 47만 6,000톤, 해병대와 해군기가 22만 톤에 달했다.

재벌은 사실상 해체되지 않은 채 게이레쓰(系列·재벌집단)의 주도 하에 부분적인 개혁을 할 수 있게 된다.

태평양전쟁의 전범들에 기여했던 일본의 기업들에게도 한국전쟁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니혼타이어, 후지모터스, 니혼강관 등을 포함하여 ‘BIG 5’와 ‘BIG 9’으로 명명된 기업들은 한국전쟁 시 미국의 보급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기업들이다. 이를 통해 전후에 다시 살아나 일본의 전후 부흥을 이끌었다. 무기 생산이 재개되면서 군수산업이 부활한다.

트루먼과 한반도 역사 

헤리S. 트루먼
헤리S. 트루먼

헤리S.트루먼( Harry S. Truman·1884.5.8.~1972.12.26)미국 34·35대 대통령이다. 45년 4월 1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30.~ 1945.4.12.) 대통령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트루먼은 1945년 8월 6일, 루스벨트 때 리틀 보이(Little Boy)별명으로 완성된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한다. 42만명이 피폭을 당한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해 27만명이 피복 피폭피해자를 양산한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는데는 성공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트루먼은 미국 내에서 페어 딜(Fair Deal)이라는 정책을 펼친다. 루스벨트가 추진했던 뉴딜정책을 연장 확대한 것으로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의 미국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트루먼의 등장은 루스벨트가 신봉했던 파스즘의 종식을 전제로 한 미국 외교 정책의 전면적 변화가 일어난다.  트루먼은 반소 감정이 매우 강했다. 상원의원 시절에 "독일군과 소련군들이 피가 다 빠질 때 까지 싸웠으면 좋겠다."고 독설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국제주의적인 협상과 타협을 비도적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해 소련이라는 '깡패'에 대해 십자군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트루먼 집권 초기인 1947~48년 미소 양대 진영 간의 냉전이 점점 격화되어 갔다. 아시아에서도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1949년에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미국이 지원해 온 장개석의 국민당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 섬으로 고립시켰다.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됐다. 북은 소련 군정이, 남은 미군정이 들어섰다. 미군은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을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공식 출범시까지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을 수립해 다스렸다.

트루먼 독트린

1947년 3월 29일 트루먼은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트루먼독트린을 선언한다. 미국은 외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국가의 인민들을 지원한다>는 것. 이 선언은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의 정치인들이 환영한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자 남한의 정치인들은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이 정책을 수용하게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미 군정의 정책을 포기하게 하도록 권한다.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송한다. 김성수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전보를 보냈다. 장덕수는 '이것은 트루먼에게 큰 불빛이다. 긴 터널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성과없이 해산하자,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 한국문제 해결을 위탁한다.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한다. 소련의 반대로 인하여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이루어진다.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미군정은 통치권을 이양하고 해체된다.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발발 당시 유엔군 조직을 주도하여 대한민국 편에 참전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1951년 9월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의 주권과 국교를 정상화한다. 그 해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조인한다. 

트루먼은 냉전의 체제 속에서 유엔이라는 집단 안전보장체제만으로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집단 방위체제와 상호 방위체제의 구축한다. 소위 봉쇄정책이 등장한다. 이는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둔다.

한국은 냉전체제 72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국가이다. 트루먼 독트린이 만든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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