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Did America Fight the Korean War? ( 미국은 한국전쟁에 왜 참전했나?.).

미군은 1950년 6월 27일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1군 야전군 규모의 178만9000명이 참전한다. 3만6940명이 전사한다.  9만 2134명이 부상자가 발생한다. 실종자만 3734명이다.  전쟁 기간 동안 대표적인 전투는 스미스특수임무부대의 오산전투를 비롯해 대전전투, 낙동강선 방어전투, 인천상륙작전, 서울 및 평양탈환작전, 장전호전투, 흥남철수작전, 벙커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등이 있다.  지상군은 알바니(Albany)작전을 비롯하여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코만도(Commando)작전, 킬러(Killer)작전, 파일드라이버(Pile drive)작전 등이 있다. 

역사학자인 빅터 데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 스탠포드대학 후보연구소 선임연구원(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고전학과 명예교수)는 " 한국전쟁에 대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5년 후에 발생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첨예한 전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정립 전쟁이라고 미국인들은 믿고 있다."고 말한다. 

2차 세계 대전 후 민주주의·사회주의 이념 대립에 따라 미·소 냉전((the Cold War) 체제가 전개된다. 미·소는 냉전 상태에서 군비 경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정부-군-방산업체의 상호의존 체제)가 냉전을 이끈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방비를 삭각한다. 인력과 장비도 부족했다. 소련의 원자탄 개발과 중국 모택통의 승리 등 공산주의의 팽창을 대처하기엔 국방력이 열세였다. 소련은 미국의 상황을 인식하고 김일성을 통해 한국전쟁 발발을 부추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서울이 함락된다.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울 27일 미군이 참전한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결정한다. 비록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를 얻었지만, 애치슨이 시행한 다음에 이뤄진 일이다.

한국은 냉전이 시작될 당시 미국의 정잭에서 중대한 존재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봉쇄정책과 마셜플랜이 만들어지는 시기에 한국에 걸린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를 확인했다. 국방부는 한반도가 전략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무부 차관이던 딘 애치슨과 신임 국무장관 조지마셜은 일본 경제를 재건하고 남한에 봉쇄정책을 적용한다는 맥락에서 한반도의 가치를 평가한다. (중략). 트루먼과 애치슨은 1950년 4월 공산주의 확산과 저지, 즉 봉쇄를 최우선 목표로 군비 중대와 수소폭탄 개발, 동맹국에 대한 군사지원 확대 등 내용을 담은 비밀 문서 국가안정보장회의 문서 제68호을 작성한다.  (중략) 애치슨은 "한국전쟁은 미국을 구한 위기였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때문에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문서 제 68호가 최종적으로 승인된다.국방비를 네 배로 늘리는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한다.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근간이었던 엄청난 해외 군사기지 체계와 이에 장비를 공급할 국내 군산복합체의 동인이 된 것도 2차세계대전이 아니라 한국전쟁에서 였다. -브루스커밍스의 한국전쟁(P283~285)

 

전쟁이 일어난 그해 1월 12일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이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선을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하는 '애치슨 라인'을 선언한다. 미국은 그때까지 한반도에 별 관심이 없었고 잘 알지 못했다.

냉전 해체 이후 사회주의권에서 나온 자료들을 많이 인용하는 역사학자인 베른트 슈퇴버(Bernd Stover)포츠담대학 교수는  애치슨 선언이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동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스탈린이나 마오저뚱은 한반도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실제 미군정은 남한의 권력을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에 맡겨 지배했다. 미국은 독립운동을 했던 항일 투쟁 세력이 장악하는 것보다는 친일파 세력이 지배하고 있어야 일본경제 부흥과 방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승만도  미국의 뜻에 따라 일제 부역자들을 대거 등용한다. 이승만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애치슨의 충복이었던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 참전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미국의 위신과 정치경제(American prestige and political economy)에 관련해서 참전 결정했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와는 무관하다.

둘째, 일본경제를 부흥(Japan’s industrial revival)시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회복시켜주는데, 한국은 일본 부흥을 위한 보조기능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군은 일본을 부흥시켜주기 위해 참전했다.  -브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43)

미국은 한국전쟁에 대해 공식적으로 '전쟁'용어를 쓰지 않는다. 미국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모두 전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6‧25전쟁을 ‘전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자가당착이라는 비판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온 행위를 미국 국내의 질서 소란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을 점령지(적지·식민지)라고 보고 선전포고 없이 미군을 참전시킨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 29일 기자회견을 열어, 미군을 보낸 것은 북한군이 내려와 소란을 피우니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찰(군대)을 보낸 경찰 행위라고 설명했다. 군사 조치가 아니라 경찰을 보낸 조치라는 것이다. 아무튼 미국은 전쟁을 시작한다는 ‘선전포고’가 없었으니, 정상적으로 ‘종전선언’도 못한다. 

THE KOREAN WAR: 남침인가‧북침인가?

한국전쟁(韓國戰爭·THE KOREAN WAR)을 두고 남과 북은 각기 남침(南侵)·북침(北侵) 주장을 한다.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을 두개로 시점으로 봐야 한다. 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스포츠 경기처럼 전·후반으로 나눠 봐야 한다는 것.  전반전은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의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남침(1950.6.25.~1950.10.1)이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유엔군)이 월선으로 북으로 올라간 것은 북침(1950.10.1.~1953.7.27)이라고 봐야 한다는 게 수정주의자들의 판단이다. 전반전은 남과 북이 전쟁을 치룬 내전 성격이고, 후반전은 미군(유엔군)과 중국군이 개입한 국제전 성격이다. 

 

남침·북침 문제는 38도선을 국경선으로 보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국경선으로 보고 전반전을 남침으로 정의한다면 후반전은 미군(유엔군)이 북침이라는 것이 주정주의 역사학자들의 판단이다.

우린 반공교육에서 전반전만 보고 남침이라고 말하고, 중국은 후반전만 보고 북침이라고 주장한다.

둘 다 한쪽 경기만 보고 말한 것이다. 필자는 전반전(내전)은 6‧25동란이고, 후반전(국제전)은 미‧중전쟁이다. 이름이 간명하지 못해 혼란이 야기된다. 편의상 이 두 개념인 6‧25동란과 미‧중전쟁을 혼합하여 6‧25전쟁으로 부른다.

한국 전쟁에서 당사자인 한국군은 전‧후반전을 통틀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14일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넘겨준다. 한국군은 전쟁에 참전했지만 미군의 지휘를 받아 전쟁에 치른 것이다. 한국군은 창피한 일이지만 미군의 용병에 불과하다. 1953년 7월 27일에 작성된 정전협정((armistice) 문서에 김일성(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평더화이(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남일(조선인민군·중국인민군대표던수석대표, 조선인민군대장)ㆍ월리엄K해리슨(유엔군대표단 수석대표, 미군 육군중장)등 4명이 서명자로 참여한다. 한국군은 서명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를 비롯해 국민들은 휴전회담에 반대한다. 북진 통일을 통한 정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군사작전권문제로 독자적인 전쟁을 이어갈수 없었다. 당사자인 남한 정부가 배제된 채 정전협정은 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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