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권력 행보 반발 의열단 출신 김시현-유시태...이승만 암살 미수
대통령 선출 방식 간선제→직선제 변경 헌정사상 첫 개헌은 친위 쿠데타

 

한국전쟁 중에 부산에서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이승만과 조봉암이 대결해 이승만이 당선된다.
한국전쟁 중에 부산에서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이승만과 조봉암이 대결해 이승만이 당선된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이승만 세력이 참패한다. 극우 반공세력이 몰락한다.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된다.  국회의원 의석 210석 중에 무소속이 126석을 얻는다.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은 각각 24석을 얻는다. 기타 국민회가 14석, 대한청년단 10석, 대한노동총연맹 3석, 일민구락부 3석, 사회당 2석, 민족자주연맹 1석, 기타 3석이었다. 이승만 지지세력은 다 긁어모아도 57석에 불과했다. 국회의장엔 민국당 소속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ㆍ1894.~1956.5.5.민국당)가 재선된다. 부의장엔 장택상((張澤相)과 좌파 무소속 조봉암(曺奉岩)이 선출된다. 이승만의 참패였고 무소속의 승리였다.

이승만의 참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재헌 국회를 대부분 자산의 계파로 채운 이승만 정부는 불과 2년 만에 민심을 잃고 여론이 악화된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무산 사건으로 친일민족행위자 청산이 좌절된다. 제주4·3 사건과 여순 학살사건의 배후, 백범 김구몽양 여운영 등의 암살이 이승만과 연관되어 있다는 여론 확산됐다.

이승만은 여당의 패배가 우려되자 49년 8월 15일 치러져야 할 지방선거를 연기한다.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도 12월로 미루고 민심 수습한 뒤 선고를 치르고자 한다. 미국의 간섭으로 좌절된다.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4.11. ~ 197.10.12.) 미국 국무장관의 경력한 경고로 5월 30일에 예정대로 치러진다.  

애치슨은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으로 알려진 미국의 외교 정책에 기본적인 특정을 만들었다. 마셜플랜(Marshall Plan)으로 알려진 유럽에 경제원조 프로그램을 설계자이다.  트르먼 독트린과  마셜계획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반공 정부에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해 궁극적으로 미국의 경제 부흥이 목적이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1950년 5월 30일)를 전하는 경향신문 기사
제2대 국회의원선거(1950년 5월 30일)를 전하는 경향신문 기사

이승만은 의회 권력을 빼앗긴 뒤 정치적 위기 의식을 느낀다. 여소야대로 끌려다니며 탄핵설까지 대두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이승만의 재선도 여의치 않은 상황.

1952년 7월 2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선제로 직선제로 개헌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 헌법 개정이다. 헌정 사상 첫 번째 친위 쿠데타이다. 이승만의 재선을 위해 실시된 개헌이다.  헌법을 위반한 개헌이다. 그것도 한국전쟁 중에 자신의 권력욕에 의한 개헌을 한 것이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1952년 1월 18일 개헌안은 국회에서 부결된다. 정부는 국회를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 운동을 주도한다.

이승만은 5월 25일 부산, 경남, 전남, 전북 등 23개 시군에 계엄령((戒嚴令)을 선보한다.  계엄령은 쿠데타, 내전, 반란, 전쟁, 폭등, 국가적 재난 등 초비상 사태로 인해 국가가 일상적 치안 유지와 사법권 유지가 불가하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과 국가원수,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의 동의 아래 군대를 동원해 치안 및 사법권을 유지하는 조치이다. 

다음날 5월 26일 개헌에 반대하던 무소속을 포함한 야당 국회의원 50여명이 탄 통근 버스를 헌병대로 강제 연행한다.

당초 이승만이 2개 대대 병력을 부산에 배치하려던 것을, 이종찬(李鐘贊, 1916.3.10.~1983.2.10) 육군참모총장이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며 병력 배치를 거부하자 원용덕 헌병사령관에게 따라 명령해 국회의원들을 연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육군본부 훈령 217호'를 전 육군에 하달한다. 결국 전쟁 중에 사임한다.

이승만은 국회의원 10명을 국제 공산당과 관련있다는 혐의로 구속한다. 제헌헌법에 회기 중 국회의원에 대한 불체포특권을 명시하고 있다. 이승만은 현행범은 제외한다는 구절을 이용해 국회의원을 현행범이라고 체포해 구속한다.  

국회는 의원 석방과 계엄 해체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이승만은 이를 묵살한다. 김성수 부통령이 사표를 낸다. UN한국위원단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다. 당시 UN군 참전한 미국, 영국의 언론들도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판한다. 이승만은 국내외 비판을 깡그리 무시한다.

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한다. 6월 20일 이시영(李始榮), 김성수(金性洙), 김창숙(金昌淑) 서상일(徐相日)조병옥(趙炳玉)등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부산의 국재구락부에서 개최하던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 대회' 거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중단된다. 참석자 30여명이 연행된다.

이승만의 권력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6월 21일 장택상 국무총리의 주도 아래 '발췌개헌((拔萃改憲)'이 추진된다장택상은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가 해산될 수도 있다”며 의원들을 협박한다.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을 보고한 미군 정보부 문건 @자료사진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을 보고한 미군 정보부 문건 @자료사진

이승만의 행보에 반감을 가진 의열단(義烈團) 출신 김시현 의원(민주국민당)은 암살을 계획한다.

김시현이 이승만 암살을 계획한 것은 "전쟁 처리를 잘못해 젊은 청년을 다 죽게한다" "전쟁에 져서 부산으로 쫓겨온 대통령이 군왕처럼 날뛰고, 대통령을 더 해보겠다는 그 태도는 옮지 않다" 등이다.

독립운동을 함께 한 최양욱을 찾아가 '살해'를 모의한다.

최양욱이 배신하고 내부부 정보과 박춘개 경감에게 밀고한다.  

이후 김시현은 최양욱 대신 대구의 한 여관에서 의열단 출신 유시태를 만나 포섭해 암살을 감행한다. 

유시태는 김시현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행사장으로 잠입해 이승만을 저격한다. 탄환이 모두 불발되고 저격은 실패한다. 김시현 등 연루자 12명은 전원 구속된다.  김시현 등은 1960년 4.19혁명 직후 석방된다.

이승만의 권력 야심은 끝없다. 결국 야당이 압박에 굴복한다. 구속된 국회의원 10명이 석방된다. 피신 중인 의원들에 대해서도 신변 보장을 약속하며 국회 등원을 호소한다. 군경을 이용해 국회로 연행한다. 7월 4일 밤 국회는 군경의 포위 속에서 기립 표결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된다.

대통령, 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대통령, 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이승만은 개헌이 끝나자마자 7월 말에 계엄이 바로 해제한다. 결국 이승만은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조봉암(11.35%)과 대결해 74.61%를 얻어 재선에 성공한다.

이승만은 정권유지를 위해 반공(反共)을 이용한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복종을 강요한다. 사장적 기반은 무시된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 고취만이 중시됐다. 정부를 비판하고, 정권을 반대하는 정적(政敵)에게 이념의 덫을 씌우고 빨갱이로 몰아 군과 경찰을 앞세워 제거한다. 공산주의 체제나 북한 체제를 옹호하지 않더라도 찬양, 고무, 동조의 조항을 통해 포괄적 처벌했다. 죄없는 사람들이 빨갱이 누명을 써서 갇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반공은 이승만 정권에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성격으로 강화됐다.

미국에서도 1950년부터 1954년까지 공산주자를 색출하는 매카시즘(McCarthyism) 광풍을 몰아쳤다.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1957)는 1950년 공화당 당원대회에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 297명 명단이 있다."라고 주장한 게 단초가 됐다. 상원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매카시는 연일 폭로를 계속한다. 언론은 매카시의 폭로를 사실 여부에 관계 없이 헤드라인으로 삼았다. 매카시의 폭로를 다룬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대중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청문회에 1년간 소환된 증인은 214명이다. 비공개 청문회에 395명이 소환됐다. 1953년 공화당이 민주당 정권을 뒤집고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1954년 에드워드 머로 CBS기자는 시사프로그램 <See it New>을 통해 매카시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상원청문회에서 매카시가 제출한 문자가 애초 작정한 적이 없는 가짜 문서로 밝혀지면서 매카시즘 광풍은 사라진다. 

이승만은 매카시 바이러스를 자신의 집권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것.  이승만 정권을 시작으로 한국의 매카시즘은 보수정권의 위기 때마다 정권을 보호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작용했다. 정부나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인사들이나 국민들을 종북이나 좌파로 낙인하는 일이 공공연히 자행됐다. 

1987년 민주화 이전 문인간첩단 사건(1974년), 구미간첩단사건(1986), 삼척고정간첩단사건(1979년), 진도간첩단사건(1980년), 학원침투간첩단사건(1975년), 남매간첩단사건(1993년)등 간첩ㆍ용공 사건에 대부분이 재심에서 군사 정부, 안전기획부 등에 의해 조작에 의한 사건이라고 밝혀졌다.

이승만이 권력욕에 매카시즘을 이용한 것과 관련 반공을 외치며 양민을 학살하는 ‘영혼 없는 노예’ 좀비가 된 것이라는 일부의 비판적 시각도 있다.

2019년 11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 발생해 보고된 새로운 유형의 변종 바이러스인 'SARS-Cov-2'에 의한 발병한 급성호흡기 전염병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패러다임을 바꿔났다. 그 중 문화계에는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가 OTT(Over the Top)를 통해 전파됐다. '좀비'에게는 안타까운 역사가 있다. 미국의 아래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Haiti)가 좀비의 고향이다. 17세기 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아이티에는 처절하고 끔찍한 흑인 노예의 역사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흑인 노예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착취와 확대에 시달렸다. 100만 명의 흑인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흑인 노예 수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처점한 곳에 등장한 게 좀비였다. 흑인들은 부두교라는 종교를 믿었다. 마법사 보코가 마술을 부려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흑인들은 좀비보다 좀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좀비가 되면 죽어도 죽어서도 평생 노예로 살아야 했기 때문. 노예주들은 '자살하면 좀비가 된다'는 공포심을 조성했다.  식민지배가 끝난 후에도 아이티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이 공포심을 이용했다. 

이승만은 아이티의 자도자들이 좀비 공포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했던 것처럼,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반공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미국 외교 기본 정책인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도 이승만이 반공 매카시즘을 뒷받침하는 힘이 됐다. 당시 트르먼 대통령은 세계 각국의 공산화를 심각한 자본주의의 위험으로 받아들였다. 일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ㆍ공산주의 혁명의 열기가 분출됐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구워할 반공주의 주역을 자임한 미국은 공산주의 혼란을 겪는 자본주의 국가에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책을 '독트린'에 담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저자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을 군사고문으로 둔 이승만은 미국의 '반공 정책'에 발맞춰 공산주의 색출 작전을 벌인다. 하우스만은 극악무도한 반공 광신자였다.

하우스만은 이승만 뿐만 아니라 정치, 군ㆍ경찰을 움직였다. 한국군을 실상 지휘했다. 경무대(지금의 대통령실)의 대통령 집무실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었다.  군 장성 인사에도 개입한다.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장성, 고위급 인사문제까지 눈의했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 신성모(국방장관), 채병덕(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해 여는 군사안전위원회 회의에도 매주 윌리엄 로벗츠 미국군사고문단 단장과 함께 참석한다. 이승만이 하우스만의 꼭두각시였고, 채병덕은 하우스만의 허수아비였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전쟁 중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1951년 거창에서는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균) 병사들이 내탄 부락 계곡에서 136명, 박산 계곡에서 527명의 주민을 무차별 학살한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함께 조병옥 내무부장관이 물러난다. 사단장과 연대장을 처벌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들을 바로 사면 복권한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심하게 탄압(학살)할수록 미국의 지원을 더 많이 받았다. 미국이 이런 지시를 내린 것에 책임이 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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