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공군 무차별 화염공습 민간인 100만 명 소살(燒殺)

한국전쟁에서 군인 65만명과 민간인 260만명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민간인 희생자가 군인의 희생자의 4배이다. 대부분 전선이 아닌 후방에서 발생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해 발생한 살해, 즉 집단학살에 의한 것이다. 학살 희생자는 남한에서만 무려 100만명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이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는 말의 뜻에는 미증유의 비참한 학살사태가 발생했다는 사실도 같이 함축되야 한다. 

민간인 학살은 1948년부터 남한에서 국지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1948년 제주4ㆍ3항쟁 진압과정에 3만 여명이, 여순사건에서 주민 2000~5000여명이 피살됐다. 그리고 1949년 빨치산 토벌작전 중에 남원ㆍ문경ㆍ영덕 등에서 학살사건이 발생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과 더불어 민간인 학살은 남한 전역에서 발생한다.  보도연맹원학살, 거창양민학살, 고양금정굴학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미군도 참전 초기부터 학살의 공동정범이 됐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①피난민 대열에 대한 총격ㆍ폭격, 통행중 교량 폭파 ②피난민 야영지와 민가 마을에 대한 전폭기의 포적폭격과 무차별 기간총 난사 ③적군과의 조우전 상황에서 총기난사 등이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뒤 방파제를 넘는 미군 해병대(좌), 네이팜에 쑥대밭이 된 월미도(우) @자료사진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뒤 방파제를 넘는 미군 해병대(좌), 네이팜에 쑥대밭이 된 월미도(우) @자료사진

미군은 한국전쟁이 시작과 동시에 한반도의 하늘을 장악한다.  미 공군은100만 회 이상 출격한다. 도시와 마을, 산업관련 시설을 무차별 폭격한다. 네이팜, 폭탄을 비롯해 기총 사격을 한다. 네이팜 3만2500만톤을 포함해 폭탄 63만 5000톤이 남북 전역에 투하된다.  2차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에서 보다 많은 양이다.  3년 간의 전쟁에서 20년 베트남 전쟁 보다 인구 당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한다.  400만 명의 사상자 중 반 이상이 민간인이다. 전쟁 당시 가장 위협적인 건 미군의 폭격이었다. 

초토화작전에 따라 미국 공군의 B-29 폭격기 등은 1950-1953년 한국전쟁 기간에 북한 전역 도시를 폭격해 모든 건물의 85%를 파괴한다. 주요 댐도 파괴한다. 주민들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했다.

극동공군(FEAF) 폭격기들은 개전 초 전쟁 수행에 긴요한 산업 시설과  철도 등 교통 통신 수단 등에 대해 정밀폭격을 실시한다. 무차별적인 폭격이다. 북한의 군수시설 등이 인구밀도가 높은 주요 도시에 세워져 있다.  미군 폭격 시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피해를 키우는데 한몫했다.

1950년 9월 10일 새벽, 미군 공군은 인천상륙작전(9월15일)을 앞두고 인천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을 섬멸하기 위해 폭격기 43대가 3차례에 걸쳐 93개의 네이팜을 투하한다. 무차별 공격을 한다. 해상에서도 함포가 불을 뿜었다. 월미도 일대가 초토화된다. 사전 경고 없는 무차별 공격에 당시 월미도에 살고 있던 주민 600여명 중에 228명이상이 희생된다. 

닷새에 걸친 폭격 뒤 미 해병대 등 유엔군이 15일 새벽 6시 월미도 접령을 시작으로 인천상륙에 성공한다. 낙동강까지 밀리던 아군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다. 

한국전쟁 당시 요코하마 기지에서 출격한 B-29기가 북한 평양 상공에서 여러 발의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 @주한 UN군 사령부 홈페이지
한국전쟁 당시 요코하마 기지에서 출격한 B-29기가 북한 평양 상공에서 여러 발의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 @주한 UN군 사령부 홈페이지

11월 5일 맥아더 사령관은 북학의 도시, 농촌지역도 군사목표로 간주해 불태우라고 명령한다.  미군의 전쟁 초기 군사목표로 한정한 '정밀폭격 정책'을 추진한다. 하지만 당시 전투기는 항속거리가 짧아 목표지역에서 정찰 수 폭격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전폭기를 안내하는 전술항공시스템도 불안정했다. 조종사의 육감과 우연, 자으이적 판단에 의해 표적을 식별, 공격했어야 했다. 때문 오폭률이 높았다.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전황의 악화되자 정밀폭격 정책은 무차별 폭격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연구자 김태우가 미국 국립분서보관서와 미공군역사연구실 문서 10만장을 분석한 <폭격: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창비)를 통해 공개된다. 

그해 11월 5일 22대의 B-29가 출동해 강계에 출동한다. 도시의 75%를 파괴한다.  그 후에도 여러 도시에 대한 공격이 실시된다. 종전 당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는 대부분 60~95% 정도 파괴된다.

정전협정 2개월 전인 1953년 5월까지 미군은  정전 협정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북한 지역에 있는 수력발전 시설이나 관개용 댐을 공격한다.  농지에 홍수가 나거나 작물을 파괴한다. 독산댐, 자산댐, 구원가댐, 남시댐 등을 공격해 수 백 만 명의 북한 주민을 굶주리게 했다.

일본에서 생산된 네이팜이 한국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운송되는 모습
일본에서 생산된 네이팜이 한국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운송되는 모습

미 공군은 한국전쟁에서 32,557t의 네이팜탄을 제외한 635,000t의 폭탄을 투하한다. 미군이 2차 대전 당시 유럽에 106만t을,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 투하한 16만t을 포함해 총 50만t을 투하한 것과 비교된다. 참고로 미국이 참전해 폭탄을 가장 많이 투하했던 국가는 캄보디아 50만t, 라오스 200만t, 남부 베트남 400만t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군기의 출격 횟수는 공군이 72만 980회, 해병대 공군이 10만7303회, 해군(항모 발진)이 16만7552회였다. 한국전쟁 중 공중전은 일본 공군기지 15곳에서 발진한 폭격기와 전투기에 의존한 것이었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 도시는 최소한 50%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평양 75%, 청진 65%, 함흡 80%, 흥남 85%, 사리원 95%, 신안주 100%, 원산 80% 등이 사라졌다. 

1951년 2월 4일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을 받고 화상을 입은 피난민들이 수원 인근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
1951년 2월 4일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을 받고 화상을 입은 피난민들이 수원 인근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 대한 화염공습으로 북한 민간인 99만 5천 명(최저 64만 5000명~최대 15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초래한 것이다.

미 공군이 화염 공습은 알루미늄 비누와 휘발유를 혼합해 만든 고농도의 네이팜탄을 사용했다.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행해지는 공습에 전체 도시가 1500~2000°C의 고온 속에 화재폭풍에 휩싸인다. 건물을 파괴한다. 소방관들조차 불길을 진화하지 못하고 질식케 한다. 

1950년 9월 16일 인천기계제작소 앞 거리에서 한 여자 아이가 울고 있는 모습 @공정뉴스 자료
1950년 9월 16일 인천기계제작소 앞 거리에서 한 여자 아이가 울고 있는 모습 @공정뉴스 자료

전략적으로는 도시공격용이다. 전술적으로는 참호나 벙커 공격용이다. 기갑 차량 공격용으로도 사용된다. 현재 미군은 MK77이라는 소이탄에 네이팜 대신 다른 소이제를 넣어 사용한다. 

네이팜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음 사용된다. 이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된다. 필요이상의 살상을 한다는 점과 조합에 사용된 물질이 자연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에 국제협약에 따라 민간인 거주지역 사용이 금지됐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강행된 북한에 대한 공습은 미국이 타 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하나"이면서 "미국인들이 그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 당시 핵폭격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브루스 커밍스는  B-29 폭격기가 1951년 9월부터 두 달간 핵무기 모의폭격을 실시했다. 오키나와에서 B-29폭격기가 한 대 씩 발진하여, 가상의 핵폭격 비행으로 북한 상공을 날려면서 '가짜' 핵폭탄이나 TNT중성자탄을 투하했다. 당시 북한 지도부는 떨어지는 폭탄이 핵무기인지 재래식 폭탄인지 분간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불과 6년전 일본 히로시마와 나카사키를 폐허로 만든 B-29의 공격을 보면서 심장을 떨었다. 그 폭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매번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개발 집착은 공중폭격으로 형성된 ‘트라우마’와도 무관치 않다는 식의 견해도 있다.

1951년 3월 10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서 공군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공객 개시일의 핵무기 재량권(D-Day atomic capability)'을 요청한다. 소련은 한국 인근으로 공군 사단을 이동시킨다. 만주의 공군 기지에 폭격기들을 배치 준비를 마친다. 중국도 한국 국경에 거대한 병력을 집결시킨다. 미군의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는 핵 폭탄 부품이 도착해 조립된다. 핵탄투(갭슐)만 장착하지 않은 상태이다. 4월6일 오마 브래들리 합동참모본부 의장(장군)은 마크 4를 원자력 위원회에서 군대로 이관해도 좋다는 트루먼의 승락을 얻는다. 대통령은 중국과 북한의 포적에 핵폭탄을 사용하는 명령서를 서명한다. 제9폭격기가 괌에 배치된다.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한다. 중국은 전쟁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전술작전 지역에서 핵무기 사용이 숙고됐다.  

브루스 커밍스<한국전쟁>중 P221~P223

'친일파 군인 대부' 제임스 하우스먼, 민간인 집단학살 망나니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rry Hausman 1918~1996)은 1948년 초대 정부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군사정권인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시대까지 한국 대통령을 움직이는 한국 정치의 실세였다. 자신의 저서 <한국의 대통령을 움직이는 미군대위>을 통해 한국 정계와 군부의 배후 실세로 군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칭 남한 국군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군사쿠테타 세력들 정착에도 관여한 인물, 친일파 장교들을 유독 선호하고 그 출세를 도운 인물, 이승만의 동족 대학살 현장 어디든지 나타나 진두지휘했다. 박정희 쿠테타를 미국에 가서 설득한 인물, 전두환 쿠테타를 미국에 이해시킨 인물도 바로 하우스만이다.

1918년 미국 뉴저지 러니미드에서 출생해 79세 일기로 미국 택사에서 사망한다. 1946년 7월 26일, 28세 나이로 한국에 파견된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거쳐 한국에 들어온다. 경찰을 보조하는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Barros) 대령의 수석보좌관 역할을 맡는다. 남한군대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한다.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한다.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공산주의자를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OSS(CIA 전신)대위에 불과 함에도 베로스 대령이 제주도지사로 발령이 나자 하우스먼이 사실상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임무를 수행한다. 미 군사고문단장 고문을 지낸다. 1950년에는 이승만과 채병덕의 고문을 맡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까지 하우스만을 신임한다. 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 등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중용해 충견으로 부린다. 

정보장교로서 그의 소속과 역할이 불명하다. 한국에서 30년 넘도록 장기간 주둔하면서 한국통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신임 부대 지휘관들은 그를 찾아 한국상황을 들었다. 

하스만의 전쟁 광기가 한국전쟁 전후 드러난다. 민간인 학살에 배후로 등장한다.  제주 4·3사건 (2만여 명), 여순 사(3만여 명) 때 민간인을 집단 학살을 주도한다. 학살 장면을 녹화해서 훈련용 교재로 활용하기도 한다. 미국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그를 교활한 공작원이라고 평가한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봉기 때부터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가 주관한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하지간에 체결한 협정에 따른 것. 실제로는 고문단 G-3인 하우스먼이 채병덕 참모총장, 정일권 작전참모부장, 백선엽 국방경비대 G-2 책임자를 지휘하여 작전을 수행한다. 고문단장이 송호성을 진압 사령관에 임명한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서울에 있었고, 모든 일은 G-3 하우스먼 대위가 광주에 머무르면서 수행한다. 수송기와 10대의 L4 경비행기를 관리한다. 송호성을 직접 지휘 감독한다.

당시 지휘체계는 로버츠 단장ㆍ무쵸 대사→하우스먼 대위→이승만 대통령→채병덕 국방장관→송호성 진압 단장 순이다.

전방 38선 경비부대만 제외하고 모든 부대를 총동원된다. 순천은 24일, 여수는 27일 완전히 제압한다.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 만을 대상으로 한 전투가 아니었다.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됐다.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한다.  여순지역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다. 진압군은 시내를 포위한다. 시민을 집 밖으로 몰아내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킨다. 민가를 샅샅이 수색해 사람은 사살하고 집은 불을 지른다. 반란군 협력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이승만 정권은 이때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다. 학도호국단을 만든다.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을 조직한다.

하우스만은 여순사건을 진압했다는 공로로 미 국방부로부터 훈장을 받는다. 민간인 집단학살했다는 공로인 셈이다.

제주ㆍ여수ㆍ순천에서 발생한 봉기의 근본 원인은  미국 국무부의 조선반도 분할 정책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 만의 단독선거 때문.  이런 사실을 반공 이데올로기로 위장하고 대대적 숙군을 실시한다.

숙군작업은 육군본부 정보국(국장은 백선엽 대령) 특무과(SIS) 김창룡(金昌龍) 대위가 총괄한다. 김창룡은 남로당 조직을 수사하던 중 박정희 소령을 체포한다. 박 소령은 자술서에 자신이 알고 있는 남로당 조직원의 명단을 죄다 자백한다.  그가 교관 근무했던 육군사관학교에서 남로당 조직원들이 많이 적발된다. 박 소령은 명단을 자백한 댓가로 숙군에서 살아난다.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던 박정희를 구명한 것도 하우스먼이다. 

박정희 소령이 자백한 명단으로, 그의 일본 육사1기 선배이자 조선경비대 초대 작전과장을 맡았던 김종석(金鍾碩, 日原正人, 1918.~1949)도 체포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한다. 일본 대위 복무하다 해방을 맞이한다. 미 군정의 군사영어학교 1기(1946년)를  졸업한 뒤 국군에 참여한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학교 교장을 지낸다. 조선경비대 초대 작전과장을 지낼 때 하우스만의 투터운 신임을 받었다. 1949년 공산주의자로 분류된 다른 군인 사형수들과 함께 미아리고개를 넘어 수색에서 처형당한다. 하우스먼은 이 처형 장면을 16밀리 무비 카메라에 담아 반공 교재로 활용한다. 가수 반야월은 훗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지어 불렀다. 

역사학자들은 하우스먼은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한 주범이라고 평가한다.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정부가 들어선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하우스먼은 군사고문단 단장을 맡는다.  이승만 대통령과 채병덕 참모총장은 하우스먼을 고문으로 선임한다. 이승만의 책사(策士)역할을 한다. 경무대와 군을 오가며 군 인사와 작전을 개입한다. 한국군 장군의 승진, 보직은 물론 숙군작업을 지휘한다. 반공을 무기 삼은 '하우스먼-이승만-김창룡'에 삼각편대가 형성된다.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에 이승만 자유당 후보와 조병옥 민주당 후보가 출마한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과 80대 노인인 이승만 서거 시에 대통령직을 대행할 부통령에 이기붕을 추대하는 공작을 병행한다. 정치깡패를 동원한 부정선거와 개표 조작을 단행한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전국에서 일어난다.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을 시켜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게 한다. 4월 26일 이승만은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하야를 밝힌다.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한다. 국회가 즉시 수리한다. 28일 이승만은 경무대에서 짐을 꾸려 서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간다. 헌정사장 최초의 대통령 하야 절차는 신속하게 마무리 된다.

박정희 소장이 1961년 5월 18일 쿠데타를 일으킨 후 맨 먼저 하우스먼을 미8군 영내에 있는 숙소로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1949년 여순사건 당시 남로당 명단에 올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던 박정희를 구명한 인연이 있다. 하우스먼은 미국 워싱턴 정가에 가서 박정희의 쿠데타 정당성을 로비한다. 18년 간의 박정희 군사정권이 탄생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전두환을 거쳐 노태우 정권 때까지 한국 정치에 영향력을 크게 끼친다.  81년 7월 1일 한국을 떠난다. 그때까지 대령 계급장을 달고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으로 지냈던 것이다.

하우스먼은 한국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을 누리도록 도와준 책사, 일제 시절 만주군과 일본군출신 친일파 장군들의 대부, 김구·여운형 등 민족주의자들을 암살한 암흑가의 두목, 미국의 식민지 노예로 살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극우 보수 프레임으로 그루밍(Grooming)한 범죄자,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집단 학살하고 한미(韓美)양국에서 훈장받은 학살 주범이라는 부정 평가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권력유지를 하기 위해 하우스먼과 유착한 이승만, 기회주의 성향을 가진 친일파  출신 군경이 새 권력으로 등장한 미국인 하우스먼에 충성경쟁이 일개 대위인 하우스먼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을 움직이게 했고, 군과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파워를 준 것이다. 이는 친일청산에 거대한 걸림돌이 됐다. 한반도의 시시콜콜한 정무를 미군정이 운영하기 보다, 기존 한반도를 통치했던 친일파를 그대로 기용해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하우스먼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의 역대 육군참모총장 경력을 보면, 초대 총장 이응준으로부터 21대 총장 이세호까지 21명 모두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다. 그래서 하우스먼을 친일파 장성들의 대부로 부른다. 이승만과 하우스먼은 친일파 문제를 복잡하게 꼬이게 만든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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