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老斤里 良民 虐殺 事件, No Gun Ri Case)은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이다.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북 영동면 항가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으로 민간인 400여명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학살당한 이들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였다. 폭격 이유가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잠입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아래는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노근리쌍굴다리
노근리쌍굴다리

7월23일, 미군의 소개 명령에 따라 충북 영동면 항간면 노근리 인근의 임계리 주민들이 경부선 철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데,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고 노근리 쌍굴다리로 피신했다가 26~29일 미군 기관총 가격을 받았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사망자 150명, 행불자 13명, 후유장애자 55명에 유족 2170명이 발생. 대형 참극이었다. 쌍굴다리는 철도 밑을 통과하는 두 개의 다리로 폭 5미터, 길이 25미터 정도이다. 피난민 400여명이 밀집되어 있었다.

주민들이 임계리에서 떠나올 때가 미 24사단이 대전과 옥천부근에서 북한군에게 붕괴되고 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되던 때와 비슷하다. 다음 날 미군이 주민들을 이동시켜 노근리 쌍굴다리 인근 철로 위로 주민들을 올려보냈다. 미군들이 다가와 피난민 보따리도 죄다 검사했다. 수색을 마친 미군들이 어딘가로 무전을 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정찰기가 지나가더니 나중에 폭격기가 와서 철로 위에 있는 피난민들을 향해 반복적으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폭격기 몇 대가 와서 반복적으로 폭격을 했다. 700명 정도 되는 피난민 중에 절반 이상이 그곳에서 사망했다. 살기 위해 움직이면 어딘가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이미 자리를 잡고 우리를 표적으로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노근리 쌍굴다리 총격 흔적
노근리 쌍굴다리 총격 흔적

미군들이 다가와서 착검을 하고 사람들을 찌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겠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아프니까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미군이 쌍굴다리 밑으로 들어가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철로 위에서 있었던 일이 더 기억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어머니와 누나 때문이다. 내가 다친 어머니와 누님을 부축해서 쌍굴다리로 내려가면서 참혹하게 죽어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쌍굴다리 속에서 3박 4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숨어있었다.

피난민 중에 임산부가 있었다. 쌍굴다리에 고립되어 있는 와중에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다가 그 어머니가 총을 맞아 죽었다. 아이도 죽었다. 이 모습이 노근리 평화공원에 흉상으로 만들어져있다. 7월 29일에 미군들이 철수했다. 700명 정도 되는 피난민들 중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살아 나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7월 29일에 미군이 철수하자 그날 인민군들이 쌍굴다리에 들어와서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이 나쁜 놈들. 민간인을 이렇게 많이 죽였어."라고 말하면서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참고자료 : 양해찬 노근리 희생자유족회 회장 증언

노근리 평화공원 기념탑
노근리 평화공원 기념탑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된다. 미국 극동공군이 6월 26일부터 한국전쟁에 참여한다. 북한 공군과 방어전 교전을 벌인다. 6월27일 미국 정부의 해군과 공군의 참전이 결정된다. 6월30일 항공작전 범위가 압록강ㆍ두만강까지 확장된다. 미 극동해군은 6월 27일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밸리포지를 중심으로 한 제77항모기동부대가 서해에 도착한다. 7월3일부터 23일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 서북상공에서도 독점적인 작전권을 받아내 38선 이북 지역의 폭격업무를 수행한다. 제5공군은 7월초 제24사단 예하 부대를 이끌고 대전에 도착한다. 제24사단 사령부가 대전에 설치된다. 7월 5일 합동작전본부도 대전에 설치, 운용된다. 

한국정부는 금강방어선이 붕괴되자  7월 14일 대전을 떠나 대구로 이동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웛 17일 국군의 지휘권을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서 위임한다. 7월 18일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이 한국전에 투입된다.

워커 중장은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1899.8.1.~1981.8.24) 소장에게 7월 20일까지 대전을 확보를 명령한다.  제1기병사단장호바트R.게이(Hobart R. Gay) 소장에게 부대를 충북 영동 방어를 명령한다.  적 게릴라 침투로부터 후방병참선이 차단되지 않도록 강력 경고한다.

딘 소장이 이끈 미 제24사단이 대전 전투(大田戰鬪)에서 북한군에게 괴멸된다.  후퇴한다.  매복한 인민군 공격을 받고 딘 소장은 길을 잘못 들어서서 본대와 분리되어 실종된다. 인민군에 포로로 잡힌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3년 10월 4일 조선인민군 포로인 총좌 리학구와 맞교환됨으로써 풀려난다. 

게이 사단장이 이끈 제5기병연대의 선발대는 7월 20일 09시 관리에 도착한다. 7월 21일 사단사령부 및 지원부대들이 김천으로 이동한다.  오전 제8기병연대 제1대대는 영동에 도착한 후 서쪽 진지(군사좌표 1075.5-1476.9)를 점령한 후 제24사단 제21연대와 교대한다.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위원회의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보고서'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위원회의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보고서'

제1기병사단은 적 게릴라 침투와 후방 병참선을 지키기 위해  작전을 시행한다.  사단지역 내 민간인 통제를 위한 검문소가 설치되고, 철수를 명령한다.  이와 유사한 피난민 통제 절차를 시행했다.

게이 소장은 한국 도착 후 기자회견에서 "공산군의 침투전술에 대한 대응책은 사단 작전 내역 내의 모든 한국인들을 마을로부터 내보내는 것"이라며 "그후 발견된 모든 한국인은 적의 첩자로 간주한다"고 밝힌다. 

7월 23일 정오 경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에 미군장교 1명과 한국경 찰관 1명은 “이 곳이 전쟁터가 될 위험이 있다. 오늘 중으로 마을을 비우라” 고 주민들에게 소개(疏開)를 명령한다. 이에 따라 주민들 대부분 남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산간부락 임계리로 피난한다.  일부는 보다 남쪽으 로 피난을 떠난다.

이날 시작된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미군은 7월 25일 영동을 철수한다. 이날 북한군은 영동읍 진입을 개시한다. 미군은 임계리로 들어온다. 이곳에 피난을 와있던 주곡리 마을주민 및 기타 피난민 500-600명에게 대구 방면으로 피난시켜 준다고 피난을 떠날 것을 강제한다. 

24일 제1기병사단 작전참모부는 피난민의 전선통과를 정지시킨다. 전선 통과하려는 피난민의 사격을 명령한다. 단 여성과 어린이의 경우 신중을 기하라고 지시한다. 

피난민들은 미군이 없는 틈에 대구 방면 피난길을 계속한다. 횡간 쪽으로 가다 서송원 입구에서 미군을 다시 만난다. 미군은 피난민을 대상으로 짐을 압수수색을 한다. 위해를 가할 물건은 나오지 않았고, 낮과 칼은 압수한다. 짐 검색이 끝날 무렵 미군 정찰기가 선회하다 돌아간 얼마후 피난민을 향해 정찰기가 접근한다. 미군이 몸을 피한 뒤, 비행기에서 폭격과 기총소가 쏟아진다. 다수 피난민이 사망하고 부상 당한다. 미군 폭격을  피해 노근리 앞 철로 밑 쌍굴로 숨어든다. 미군은 쌍굴 터널 양쪽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기관총을 설치하고 터널을 향해 사격을 시작한다. 26일부터 저녁부터 시작된 사격은 밤새 계속된다. 청년과 장년들은 가족을 두고 어둠을 이용해 탈출한다.  쌍굴에는 부상자, 부녀자, 그리고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27일에도 사격은 계속된다. 쌍굴을 탈출해 산길을 따라 황간 쪽으로 가려던 탈출자들도 미군 방어진지선으로 들어가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쌍굴 생존자들은 이날 오후 북한군이 쌍굴 입구에 접근해 옴으로써 쌍굴에서 구출된다. 

1999년 9월 30일 AP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 이후 국ㆍ내외에서 주목을 받는다. 미국은 한국과 공동으로 이 사건을 조사에 나선다.  

2001년 1월 11일(현지 시각)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한다. 빌 클린턴은“노근리에서 한국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라고 말한다.  누가 왜 민간인을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하지 않는다.  미국의 비밀문서엔 분명히 나와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그 비밀문서를 보았기에 2001년 1월 11일 유감표명을 했던 것. 이미 비밀이 해지된 그 문서를 찾으면 알 수 있다. 다만 찾지 않고 있을 뿐이다.  

노근리 학살에 미군에 의한 전쟁범죄이다.   미군애 의한 보복 범죄이다.

1950년 7월 24일 미국 제24사단 전투 일지에는 "전투지역에 있는 원주민은 우회적으로 증명되기 전까지 적으로 간주된다.(Leaflet drops will be made north of U.S. lines warning the people not to proceed south, that they risk being fired upon if they do so. If refugees do appear from north of U.S. lines they will receive warning shots, and if they then persist in advancing they will be shot)"고 적고 있다. 

1950년 7월 25일 미군 제8군사령부의 요구에 의해 한국의 내무부청사에서 개최 된 회의에서는  “미군의 방어선 북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남쪽으로 전진하지 말라는 경고의 전단이 제작되어 뿌려질 것이다. 만일남쪽으로 전진한다면 사격을 받을 것이다. 피난민들이 미군방어선 북쪽에서 나타나면 경고사격을 받을 것이다. 계속 전진하려고 하면 사격을 받을 것이다.(Leaflet drops will be made north of U.S. lines warning the people not to proceed south, that they risk being fired upon if they do so. If refugees do appear from north of U.S. lines they will receive warning shots, and if they then persist in advancing they will be shot)고 한다. 이 회의에는  미국 대사관에 의해 대표된 제8군의 행정인사부(G-1), 정보부(G-2), 군사 감독관, 첩보관 등과 한국 내무부장관, 사회부장관 및 경무국장이 참여한다.

당시 미군 지휘부는 전투지역인 대전의 남동지역에서 민간인 복장의 민간인이 확인돼도 사격을 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린 사실이 여러 문건 증거를 통해 밝혀졌다. 필자는 노근리 학살이 왜 발생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대전전투에서 제24사단이 패배하고 딘 소장까지 실종된 상태에다, 23일 북한군과 전투에서 영동전선을 빼앗긴 제1기병대가 민간인을 상대로 집단학살의 보복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이다. 

호바트R.게이(Hobart R. Gay)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R.게이(Hobart R. Gay) 제1기병사단장

당시 제1기병사단 사단을 이끈 게이 사단장(소장)은 인권보다 전쟁광에 가까운 인물. 전쟁 승리를 위해 무고한 인명 살상은 어쩔수 없는 것이라는 사고와 철학을 가진 군인이다. 그는 노근리 학살 사건과 관련 "남쪽으로 피난하는 피난민에 대부분이 북한 첩자"라며 "미군 작전지역을 넘으려는 피난민에게 발포하라"고 명령한다. 학살을 '공정한 게임'으로까지 표현한다. 게이의 전쟁광적인 횡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50년 8월 4일 미군이 낙동강 을 건너 철수하자 왜관 다리 폭파를 명령한다. 다리를 건너려던 피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노근리 학살 사건은 1968년 3월 16일 베트남전쟁 중에 발생한 남베트남 미라이학살(미라이虐殺, My Lai Massacre)과 유사하다.  희생자는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다. 17명은 임산부이며, 173명은 어린이다. 5개월 미만의 유아 56명이다. 희생자 중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했다. 미군 26명이 가담했다.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소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마라이학살
마라이학살

"그는 45구경으로 아기를 쐈지만 빗나갔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는 서너 발자국 더 다가가 다시 총을 쐈지만 또 빗나갔다. 우리가 다시 웃어대자 그는 꼭지가 돌아버렸다."  미라이 학살 예비 조사 보고서 , 미국회도서관

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동안 꽝응아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8대대가 미군을 공격한다. 그 결과 미라이를 비롯한 여러 촌락이 흩어져 있는 꽝응아이의 손미 지역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미군은 이 촌락들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한다. 오런 K. 헨더슨 대령은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고 지시한다. 프랭크 A. 베이커 중령은 1대대에게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농경지를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라고 명령한다. 

3월 16일 아침 찰리 중대는 공격용 헬리콥터를 통해서 소구경 대포와 함께 미라이에 진입한다. 적군을 찾을 수 없다. 미군들은 가옥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몰아 세우고 자동화기로 학살한다. 1소대는 70명에서 80명의 사람들을 2소대는 미라이 북쪽 미라이 4 촌락에서 60명에서 70명의 사람들을 학살한다. 3소대는 도피하는 '적'을 추적하여 12명의 여성과 아동을 사살한다. 4대대가 미케 4 촌락 도착해 90명 이상을 학살한다. 이후 이틀간에 걸쳐 두 대대는 작전지역의 가옥과 우물을 파괴한다.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는 미라이 학살에 대해 특종 보도를 한다. 미국 정부는 미라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선다.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재판에 회부된다. 재판에서 총 26명의 군인이 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된다.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캘리 중위뿐이다. 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캘리 중위도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는다.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낸 이후 사면된다. 

한국정부는 미군에 의해 자행된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전쟁 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여 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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