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등 역대 대통령중에 가장 호불호가 갈린다. 친일 행적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쥔 독재자를 부정적 평가와 함께 일제36년·한국 전쟁을 딛고 경제 부흥을 만든 경제 대통령이라는 긍정 평가로 엇갈린다.
1942년 3월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만주국육군학교) 졸업식장에서 졸업생 오카모토 미노루(關本實)는 '어전강연'을 주제로 답사한다. 일본 천황과 만주 괴로국 황제 부의(輝儀)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내용이다. 대동아공영권 이룩위한 성전(聖戰)에서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다고 선서한다. 조선인·중국인 생도 240명 중 수석을 차지한 오카모토 미노루는 박정희이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박정희는 1940년 학교를 사직한다. 신경군관학교(만주국육군관학교)에 입교한다. 당시 지식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과 다른 행보를 걷는다. 입신을 위해 일본 군대에 투신한 것이다. 1942년 졸업한다.
박정희는 같은 해 이한림, 김재풍(金在豊), 이섭준(李燮俊) 등과 함께 일본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당시 일본 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장군은 박정희를 칭찬한다. 쥬이치는 "다가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은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웠다. "고 생도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는 박정희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일본식 이름.
박정희는 1944년 4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다.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상을 받는다. 그는 독립군과 대척되는 만주극 육군 장교가 된다. 만주국 제 8단에서 근무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다. 그는 8단에 근무하던 박정희는 신현준 대위·이주일·방원철 중위 등 조선인 장교 4명은 중국인 장교에 의해 무장해제된다. 박정희는 이들과 북경으로 간다. 북경에서 만난 동북판사처장 최용덕(崔用德) 장군은 박정희를 비롯해 학병청년 4백여 명을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이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시킨다. 말이 광복군이었지만 고향에 돌아오기 위한 임시로 만든 귀향대 형태였다.
1946년 5월 박정희는 미군이 이 제공한 LST(상륙작전용 수송함)를 타고 천진을 출발해 부산에 도착한다. 박정희의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해 9월 서울로 올라온다. 육군사관학교가 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제2기로 입학한다. 10·26 때 박정희와 악연을 맺게 된 김재규를 만나게 된다. 그해 12월, 경비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한 그는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된다. 춘천 제8연대에 배치된다.
박정희는 47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중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대위로 승진한다. 여기에서 소령까지 진급한다. 박정희는 5·16군사 쿠데타 때 중추적 역할을 했던 5기생의 교육을 맡게 된다.
박정희는 48년 11월 경비사관학교 근무 중 여수· 순천 사건으로 광주의 토벌사령부에 내려간다. 11월 11일 숙군 작업을 벌이던 군 수사당국에 체포된다. 남로당의 비밀 당원이라는 죄목. 친형 박상희 친구인 이재복의 권유로 가입한다. 당시 김창륭의 숙권 작업으로 전군의 5%인 4700여명이 처벌 받는다. 수백명이 총살 또는 징역형에 처해진다. 박정희만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순순히 털어놓는다. 좌익 색출에 협조한다. 김창룡·김안일이 당시 육본 정보국장이던 백선엽에게 구명을 요청한다. 백선엽은 하우스만(J. Hausman) 대위와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츠(W. Roberts) 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한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형 집행 면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한다. 백선엽은 육본에 재심사를 요청한다. 만주군 출신 정일권, 원용덕 등도 규명에 관여한다.
박정희는 12월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소한다. 불구속 상태로 군사 재판을 받는다. 이듬해 2월 8일 무기징역을 선고된다. 하지만 형 집행정지가 내려진다. 육본 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군복을 벗는다. 백선엽의 선처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된다. 문관 근무 당시 5·16군부 쿠데타 핵심 육사 8기생을 만난다. 육사8기 1000명이 넘는 졸업생 중에서 성적 25등 내에서 선발된 김종필, 이영근, 석정선, 이병희 등 15명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된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구테타를 일으킨다. 일단의 무장 병력이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로 진입한다. 중앙청,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을 점령한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혁명'을 알린다. 박정희를 실질적 지도자로 하는 5·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것. 박정희는 과거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인물들을 쿠데타에 참여시킨다. 만주군관학교 선후배, 동기생인 육사 2기생, 육사 중대장 시절 그가 가르쳤던 육사 5기생, 문관시절 인연을 맺은 육사 8기생 들이 주축이다. 3000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감행된 5·16군부 쿠데타는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다. 2년간 군정을 거친 후 대통령에 입후보한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박정희는 권력을 장악한 뒤 사상 논쟁에 대한 정치적 위장을 위해 이승만의 반공 체제를 이어받아 반공과 친미 일변도의 길을 걷는다. 63년 대선 당시 윤보선((尹潽善)대통령 후보는 유세 중에 박정희가 과거 여수·순천 당시 남로당과 연관됐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박정희는 자신의 사상적 결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공을 내세운다. 북과의 적대관계를 강화한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재임했던 19년 동안 한국경제는 비약적 발전을 한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외향적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우리가 잃은 것도 많다. 1965년 한일 협정을 맺는다. 경제개발계획에 충당할 자금이 긴급히 필요했던 박정희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청구권·경제 협력의 명분으로 일본으로부터 8억 달러(무상 3억 달러·재정차관 2억 달러·유상 3억 달러)를 받는다. 야당과 학생들은 굴욕 외교에 시위에 나선다.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례식에 처한다. 계엄령을 발동한다. 차관·유상 5억 달러는 나중에 갚았다. 실제 3억 달러를 얻고 3억 달러에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헐값으로 넘겼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졸속 처리된 문제가 한일 문제에 단초가 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월 15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피고 기업의 배상을 명령한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과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입장을 밝혀 문제가 되고 있다.
박정희는 1960년대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국경제에 10억 달러로 추산되는 '월남특수(特需)'를 만든다. 1만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다. 파병 군사들의 고엽제 후유증을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파병 역시 명분으로 볼 때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박정희에 대해 유신 독재라고 평가한다. 긴급 조치와 빈틈없는 통제에 숨막히는 사회였다. 긴급조치 , 민청학련, 인혁당, 서울대 김상진 할복자살, 민주구국선언, YH사건,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제명, 김대중 납치사건 등 정권에 의해 자행된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민주화 운동의 대응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숨을 거둔다. 김재규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고 말했다.
박정희의 외형적 경제 성장 정책은 정경유착이라는 폐단이 만들어지고 재벌의 탄생으로 사회 양극화를 만든다. 재벌이 권력에 중심이 된다. 지연·혈연·학연을 중심으로 이권 카르텔이 만들어진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해외 자원 외교,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개성공단 폐쇄 등도 박정희가 만든 정경 유착이 만든 폐단에 연속성이다. 권력과 자본은 유착은 부정부패로 만들고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는 원인이 된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그리고 윤석열 현 대통령까지 공과를 바로 알아야만 대한민국은 바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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