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적ㆍ여권 사용 일본인 행세한 잔인한 독재자 평가
김상웅 "이승만 정체성 친일ㆍ친미의식으로 물들었다"

버치문서의 박스 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여운형 관련 사진은 많은 반면, 이승만 관련 사진은 거의 없다. 아마도 '코리아(Korea)'라는 사진집 안에 있는 이 사진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너무나 다른 이승만과 김구의 복장과 신발, 그리고 사진기 앞에서의 자세는 이들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버치문서의 박스 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여운형 관련 사진은 많은 반면, 이승만 관련 사진은 거의 없다. 아마도 '코리아(Korea)'라는 사진집 안에 있는 이 사진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 너무나 다른 이승만과 김구의 복장과 신발, 그리고 사진기 앞에서의 자세는 이들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소장

이승만(李承晩ㆍ Syngman Rheeㆍ1975.3.26.~1965.7.19)은 대한민국 1~3대 대통령(1948.7.25.~1960.4.27.)이다.

1875년(고종12년) 황해도 평산군 대경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남(雩南). 서울로 이사와 자라면서 한학을 배운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한다.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1898년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에서 주필과 논설을 담당한다.

899년 박용호의 고종황제 폐위 역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은 24세부터 29세까지 종신죄수로 복역한다.ⓒ자료사진
899년 박용호의 고종황제 폐위 역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은 24세부터 29세까지 종신죄수로 복역한다.ⓒ자료사진

이승만은 1899년 박영효(朴泳孝ㆍ일본명 山崎永春ㆍ1861.6.12.~1939.9.21)일파의 고종황제 폐위 역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투옥된다. 박영효는 대표적인 친일파.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2002),  민족문제연구소(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년)등이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포함됐다. 

이승만은 박영효 일파의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고종의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 생활을 한다. 옥중에서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한다. 기독교 포교 활동을 한다. 

이승만은 같은 해 11월 4일에 미국으로 건너간다.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고종의 밀사로 파견됐다는 것.

이승만의 고종 밀사설을 부정하는 의혹이 많다. 흥선대원군의 처남인 민태호의 아들인 민영환의 주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에 맞서 스스로 자결한다. 그의 자결로 이승만의 고종 밀사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학업에 전념한다. 조지워싱톤대학(1907ㆍ학사), 하버드대학(1908ㆍ석사), 프리스턴대학(1910ㆍ박사)에서 유학을 마친다.

1913년 미국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교장 겸 한인기독학원 원장을 맡는다. 1919년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맡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다.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낸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광복 이후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한다.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이 된다. 1948년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독립당 김구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된다.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직선제로 바뀐 2대(1952)ㆍ3대(1956년)대통령 선거에 연이어 당선된다. 12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한다.

독재 권력을 추구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산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혁명이 발생한다. 대통령직에서 하야한다. 미국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낸다. 1965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이승만이다. 평생 독립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승만에 겉과 속 다른 이면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독립운동가로 추앙받지 못하고 독재자, 권력을 좇는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라고 비판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이승만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전 작업을 이어온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독부’(獨夫) 이승만 평전>을 통해 미주 망명 시절을 보면, 독립운동보다 친일적인 언행이 적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독부는 독립투사였던 유학자 김창숙이 자유당 정권 시절 이승만을 부르던 말로 “인심을 잃어 잔적(殘敵)이 된 한갓 사내”라는 뜻이다.  

김삼웅은 <독부 이승만 평전>을 통해 "이승만은 미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분열시키고, 윤봉길 등의 의열투쟁을 테러 행위로 비난했다"며 '검은 머리 미국인'이라고 적고 있다. 

 

"일련의 언행을 살펴보면 반일, 배일, 독립운동 같은 의지나 개념을 찾기 어렵다.

그는 경술국치를 당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 망명길에 나설 때 ‘금의환향’을 결행하고,

105인사건을 오히려 비판하면서 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심지어 미국 언론을 상대로 일제의 무단통치 상황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이 시기 이승만의 정체성은 ‘뼛속까지’는 몰라도 상당한

친일ㆍ친미의식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김상웅<독부 이승만 평전>P88

이승만은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파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판다"(신채효),  "당신이 사퇴해야만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된다"(안창호). "이승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자기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켰다.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김규식을 미군 정보당국과 민간 첩보기구에 급진적인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박용만 평전)

하바드 대학원 학생들과 이승만(윗줄 왼쪽) 앞줄 가운데 국제법교수 윌슨 @공정뉴스 자료사진
하바드 대학원 학생들과 이승만(윗줄 왼쪽) 앞줄 가운데 국제법교수 윌슨 @공정뉴스 자료사진

이승만의 미국 행적에 대한 의혹이 있다. 이승만은 1905년 조선에 선교로 왔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도움으로 미국  국무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존 헤이(John Milton Hay, 1838.10.8. ~ 1905.7.1.) 장관과 월리암 하워드 테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 9.15. ~ 1930. 3. 8.)를 면담하면서 미국  국무부에 길을 튼다.

브루스커밍스(Bruce Cumings)시카고대학 교수는 저서 <한국전쟁>(P165~166)을 통해 "하지장군은 (1945년 남한에) 간판으로 내세울 애국적인 우두머리 한 명을 찾으려 했다.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이 찾은 인사가 수십년간 국무부를 들락거리며 괴롭혔던 망명 정치인 이승만이었다. 전략사무국은 국무부의 반대를 넘어 이승만을 군용기에 태워 도쿄로 보냈고, 그곳에서 이승만은 비밀리에 맥아더를 만났으며 이어서 1945년 10월 중순 맥아더의 준용기 '바탄(the bataan)을 타고 서울에 내렸다. 이승만은 미국인과 그들의 무분별하고 무지한 반사적 반공주의를 이해했으며, 이를 한국 국민의 대중 붕기로 마침내 축출되는 1960년까지 자신의 정치적 밑천으로 삼았다"고 했다.

당시 미국 국무부는 독립운동가인 몽향 여운영(1886.5.25.~1947.7.19.)을 지지했고, 전략사무국이 이승만을 내세운 것이다. 여운영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된다. 

이승만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간 미국 국무부를 자주 들락거렸다.  37대 국무장관 존 헤어에서 48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2세 장관까지 11명의 장관이 교체되는 동안 이승만은 국무부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D.C에 사무실을 열고 '대한민국 대통령' 명칭을 사용한다. 영어로 'Dr, Syngman Rhee,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라고 표기한 명함을 가지고 출입한다. 이승만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에는 의혹이 많다.

러일전쟁이 막바지였던 1905년 8월 4일,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온 윤병규 목사와 함께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여름 백악관을 찾아가 시어도니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다. "한국의 독립 유지에 힘써 달라"는 고종의 뜻을 전달한 밀사설의 근거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1905년 윤병구와 이승만(오른쪽)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왼쪽) 면담 내용을 보도한 등 당시 미국 신문 기사@ 美國 의회도서관
1905년 윤병구와 이승만(오른쪽)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왼쪽) 면담 내용을 보도한 등 당시 미국 신문 기사@ 美國 의회도서관

2011년 한겨레는 <이승만 고종'밀사설'깨졌다>제하 기사를 통해 1905년 8월 4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이승만과 윤병구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부정하고 일진회 대변인을 자체해 만났다. 그는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고 일본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된 당시 신문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 일진화는 친일단체이다. 옛 독립협회가 모태이다. 동학 계열 세력이 1904년에 결성한 대중조직이다. 1905년 11월 일본에 조선의 외교권을 맡기는 것을 찬성한다. 이후 친일 대표 단체가 된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 1905년 8월4일치 7면에 실린 ‘오이스터 베이의 한국인들’이란 제하 기사에는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온 윤병구와 이승만이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할 것을 위임받았다”고 말한 것을 인용·보도한다. 또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며 “수천명의 회원들로 이뤄진 일진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곧 국무를 장악하고 정부 구실을 할 것”(will take hold of affairs and conduct the government)이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스타크 카운티 데모크라트> 8월8일치는 “윤병구와 이승만은 자신들이 러시아 영향력 아래 놓인 황제를 대표하고 있지 않으며, 힘있는 단체인 ‘일진회’의 대변인이라고 밝히고 있다”고 했다. <워싱턴 타임스> 8월4일치는 “이들은 ‘일진회’로 알려진 한국의 거대 진보정당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 언론의 보도는 이승만의 ‘고종 밀사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병구·이승만이 루스벨트를 만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러 일본으로 향하던 육군 장관 태프트가 하와이 한인 대표인 윤병구에게 써준 소개장이었다.  그 외에는 뚜렷한 대표성을 내세우기 어려웠기에, 실질적 연관은 없지만 신흥 정치세력인 일진회를 내세워 취약한 대표성을 보강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당시 이승만의 노선은 뚜렷하게 ‘반대한제국, 반고종, 반러시아, 친일본’ 등이었다.

이승만이 미국 체류시절 자신의 자필로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징집서류가 논란이다. 2013년 10월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제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서류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Syngman Rhee)의 국적은 일본(Japan)이다. 나이는 44세와 음력생일(3.26),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으로 표기했다. 주소지는 하와이이다. 가장 가까운 친척은 누이로 한국 주소와 함께 작성됐다. 인종은 ‘아시안(Oriental)’이라고 표기했다 

이승만은 1918년 징집서류에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했다. 이 카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했다. 당시 44세이던 그는 음력생일(3월 26일)과 함께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주소는 ‘하와이’로 돼 있다. @ 이승만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
이승만은 1918년 징집서류에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했다. 이 카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했다. 당시 44세이던 그는 음력생일(3월 26일)과 함께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주소는 ‘하와이’로 돼 있다. @ 이승만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

당시 '세계 1차 대전 징접 카드'는 전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 작정된 징집 카드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18~45세 남성을 대상으로 작성했다. 시민권자는 물론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 남성을 포함했다. 미국 전역에서  2400여만 명의 개인정보가 수집됐다.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식민지로 전략한 시점이지만,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주장하는 이승만이 신상 정보난에 국적을 일본으로 밝힌 것은 아이러니라는 지적이다.  동 시대의 절대 다수 미주 한인들은 국적을 ‘Korea’로 표기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ㆍ민찬호 등 90% 이상 한인이 국적란에 ‘Korea’로 표기했다. 나머지는 ‘China’, 드물게 ‘Japan’으로 표기했다. 

이승만의 친일 행적을 공박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의 기회주의적 행태로 미뤄 개인 서류에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승만이 1919년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될 때까지 일본 국적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3년 프랑스에서 미국에 입국할 당시 서류에는 직업을 박사ㆍ교수, 인종은 한국인, 출생지는 한국 등으로 표기한 것으로 확인된다. 

1920년 12월 28일 열린 이승만 임시 대통령 환영회. 단상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
1920년 12월 28일 열린 이승만 임시 대통령 환영회. 단상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

한미군사협정 체결(1948.8.24)

조선의 신탁은 오래전 기획된 것.  일본의 패망이 짙어 진 1943년 12월 1일 북아프리카 카이로에서 미ㆍ영ㆍ중  3국 정상은 카이로회담을 갖는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패망을 앞둔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대응과 아시아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다.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유념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롭게 독립적인 나라로 할 것을 결의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8월 9일 대일참전ㆍ나가사키 원폭투하→8월 14일 포스타 회담(종전조서)→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 항복 선언.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1주일 동안 조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 승전한 미국과 러시아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했다.  8월 9일 러시아는 붉은 군대를 앞세워 만주국과 조선으로 진격한다. 이에 미군은 당황한다. 미국 정부는 미군에 조선분할안을 지시한다. 데비드 딘 러스크(David Dean Rusk)대령 등은 내셔널 지오크래픽 지도를 사용해 한반도 중앙부의 잘룩한 부분을 가로지르는 선으로 긋는다. 북위 38도선이다. 이렇게 분할안을 마련된다. 이 분할한을 러시아가 받아 들인다. 이렇게 남과 북으로 둘로 나뉜 것이다.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 군정 하에 놓인다.  분단의 역사가 시작됐다.  소련을 김일성을, 미국은 이승만을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당초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남한을 통치하던 미국 군정청장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ㆍ1893.6.12-1963.11.12)  중장이 이승만을 선택한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을 위해 종복(從僕 Puppet) 노릇을 자청하고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 반공의 본질은 “미국에 대한 사대”를 의미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출범한다.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한국군에 대한 통수권을 인수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에 대해 '하지의 퍼핏(Puppet: 인형)’라고 불렸다.

하지와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점을 분명히 문서화한다. 1948년 8월 24일 <한미군사협정 South Korea-U.S.Military Accord>을 체결한다. 핵심은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는 것.  미군에는 미군사고문단의 군인이 포함된다. 미군이 철수해도 군사고문단이 여전히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행사한다는 의미이다.

이승만은 6.25 전쟁 발발 후 한 달이 조금 안 되던 1950년 7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을 맥아더 극동사령관 겸 UN군 사령관에 위임한다.  7월 16일에 이를 확인한다. 6.25 전쟁 때 작전지휘를 한다. UN군 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갖게 됐다.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 이후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 있다. 전작권 환수는 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과 동맹국의 결정적인 군사능력이 갖춰지고 한반도와 역내 안보환경이 안정적인 전작권 전환에 부합할 때"까지 무기한 연기됐다.  전작권의 개념은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이 가지는 통수권의 차하위, 합동참모총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위임받아 행사하는 지휘권의 하위 개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없이 국가원수로서의 역할만 해오고 있다.  일본의 경우 주일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전시에는 일본 정부가 자위대를 지위한다. 2015년 9월 19일 집단자위권 개정으로 전시와 평시 중간지대인 그레이존에서도 타국으로 제한적인 군사행동이 가능해졌다.

2010년 3월 19일 미군 DDG 56이 동해항으로 입항할 때 해군 병사가 성조기와 대한민국 국기를 흔들고 있다. @자료사진
2010년 3월 19일 미군 DDG 56이 동해항으로 입항할 때 해군 병사가 성조기와 대한민국 국기를 흔들고 있다. @자료사진

1948년 8월 15일, 미 군정기를 지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일제 식민 통치와 미 군정 통치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다.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제1공화국의 출범은 결코 순단치 않았다.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 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 경찰로 변신한다. 민생이 피혜한 상황에서도 군정 관리들은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에 좌우 이념대결 등이 제주 4.3사건, 여순사건의 도화선이 된다.

제주도는 일제에게 수탈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결7호 작전이 시행되어 섬 전체가 폭격으로 초토화될 위기에 처했다. 1945년 이후부터 7.27 정전협정 이전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는 사상 최악의 지속적인 기근에 시달렸다.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었다.  1948년 4월 3일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반란을 일으킨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들과 반란 진압을 명목 삼아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서북청년단 등 극우 폭력단체가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이다. 

당시 미 군정이 남한의 중앙정부 역할을 했다. 미 군정은 해방정국의 혼란상이 있었다지만 우리 국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영 논리에 근거한 편파적인 판단을 내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미군 군사고문단장이 직접 작전 지휘했고, 경찰의 과잉진압이 불러 온 현대사의 비극이다.  여순사건도 유사하다.  6.25 전쟁이 시작하던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승만은 주권국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이 아니다. 미군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복(從僕) 대통령으로, 그에게 종미(從美) 충성은 있어도 대미외교가 성립할 수 없었다는 일각의 비판을 받고 있다.

대통령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한 연합국(48개국)과 일본은 1951년 9월 미국 샌드란시스코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체결한다. 일본이 자국 독립의 조건으로 한반도에 관한 모든 권리를 명시적으로 포기한다. 한국의 법적, 외교적 독립을 확인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다.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청구권을 포기한다.

이승만은 소외됐다. 미국 국무부는 1951년 3월 27일 조약 초안을 한국 정부에 보낸다.이 중요한 초안을 대통령비서실 책상 서랍 속에 2주간이나 방치된다. 이 때문에 ‘독도’ 이름을 조약에 명기할 수 있는 검토 시간을 놓친다. 뒤 늦게 주미 양유찬 대사가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을 찾아가 ‘독도’ 이름을 조약에 명기해주길 요구한다. 하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국무부에서 요구를 받아주었다면, 해상에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며 호들갑 떨 필요도 없었다. 오늘의 한일 간 독도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미CIA 공작원처럼 침투시켰다

하지 장군은 미국 육군 제24군단장과  남한의 미군정 사령관( 1945년 ~ 1948년)을 역임했다.

군정 사령관에 취임한 초기부터 인민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를 일방적 해산시킨다. 편향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섣불리 미곡가격자유화를 강행한다.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재기용해 식민 잔재 척결을 방해한다.  한국인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한다.  4.3 사건, 대구 10.1 사건 등 여러 대형 사건들을 수습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한다.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정치가, 행정가로서는 평가절하를 받는 인물이다.

하지가 남한에 군정 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 조선통치를 위해 특별정치보좌관 퍼펫(puppetㆍ인형) 즉, 충복(忠僕))이 필요했다. 그는 정보과장(CIC) 세실 니스트Cecil W. Nist) 대령에게 항일투쟁경력이 없고 영어를 잘하며 미군정방침에 순종하면서도 조선인으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세실니스트는 정보와 보안을 담당하는  G-2의 초대 책임자이다.  G-2에는 미군군장교 10명, 사병 16명, 미육군부 민간요원 45명, 한국인 3백63명 등이 소속되어 있다.  기구는 행정과 남한과  북한과 군사실 정치고문부 평양(平壤) 연락사무소 등을 두고 있다.G-2에 배속된 가장 포괄적인 정보부대는 물론 CIC다. 

해방정국에서 남한의 어느 정치지도자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CIC는 49년5월 남한에서 떠났다.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의 직접적인 정보활동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다. 한국 군대내에CIC후신으로 특별조사과(Special Investigation Section: SIS)를 만든다. 49년6월 美극동군사령부 G-2는 서울에 對북한 첩보공작의 일환으로 한국연락사무소(Korean Liaiso n Office:KLO)를 개설했다. 한국전쟁시기 귀신잡는 KLO로 이름을 날렸던 이 특수부대는 한국전쟁 이전 이미 1년동안에 총 1195건의 북한첩보를 극동군사령부에 타전한다.

세실니스트는 미국 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주체의식이 뚜렷하고 능력 있는 민족주의자들을 배격한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승만을 찾아 낸다.  민족혼이나 주체의식, 항일투쟁경력이 없다.  기독교인에 친미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미 군정 입맛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이승만의 기회주의적 행보는 친미 성향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여실히 드러난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자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도 무시 실권을 쥔 맥아더에 편지를 써 먼저 구애를 한다.  소련을 싫어하는 맥아더를 심리를 이용해 "대일전 참전하고자 했으나 소련의 방해로 좌절됐다"고 거짓을 편지를 띄운다. 맥아더는 답신을 보내 "이 박사의 숭고한 정신에 깊이 감명받았다"고 말한다.  이후 세실 니스트 대령가 찾아낸 이승만을 미 군정 대리인으로 승인을 한다. 

맥아더의 극동사령부(GHQ)의 국내 입경허가서를 받는다. 니스트 대령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군용기에 태워 10월 12일 도쿄로 보내 맥아더와 하지를 면담케 한다.  CIA가 공작원을 포섭하여 침투시키듯이 10월 16일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이용해 김포공항으 입국시킨다.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입국이다. 미 군정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10월 17일 오전 하지의 지원 하에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다. 저녁 7시 30분 경성중앙방송국에서 환국 기자회견을 한다. 그는 "3천만 동포가 일심협력하고 자주독립의 양성에 전국민이 대동단결하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 군정에 의해 이승만은 통치자로 성장한다.

미 군정 정보요원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rry Hausman, 1918. 2. 28. ~ 1996.10.5) 대위를 이승만 파트너로 지정한다. 하우스만은 1946년 7월 28세의 나이로 한국으로 파견된다. 미군 조직법을 번역해 군 조직법을 만든다. 군 조직에 있어 '실전경험'을 우대하는 인사를 한다. 자연스럽게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의 군인들을 중용한다. 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 등이 군 요직으로 진출한다. 반대로 광복군 출신은 홀대한다. 하우스먼은 이승만을 통해 수렴청정한다. 한국 정치계의 배후 실력자로 군림하면서 영향력을 미친다. 한국 군장성의 승진과 보직, 항일민족투사의 제거,  양민학살 등이 그의 배후조종으로 이뤄졌다. 제주 4.3 사건 당시,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그의 머리에 권총을 한 번 더 쏘기도 했다. 제주도 시민들까지 무차별적 총살하는 장면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제주도민 20여명 총살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몇개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대꾸하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35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정치를 주물렀다. 1987년 영국의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끼들이다" (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라고 평가했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이승만

이승만은 독립에 기여했다. 하지만 항일독립투쟁의 최 전선에서는 활동하지 않았다. 독단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여러 차례 일이켰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 친일파 청산을 방해했다. NL세력이나 브루스 커밍스식 수정주의 사관을 추종하는 입장에서는 "남북 분단과 민족 상잔의 원흉'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서북청년당 등 정치 강패를 이용해 반대파 억압, 제주4.3사태, 보도연맹 사건 등과 같은 양민학살, 전쟁대비 미흡 등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대통령으로서 간접적 책임이 존재한다. 재임 당시 국회 프락치사건,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진보당 사건, 3.15 부정선거 등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한 독재 행위, 이로 인해 발생한 4.19 혁명으로 하야하고 권력에서 물러났다.

커밍스식 수정주의 사관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이승만에 대해  영어를 잘 하고 권모술수에 빼어난 재주, 그리고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꺼워 뻔뻔하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꺼메 염치를 모른다. 후흑학(厚黑学)의 달인다운 면모를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고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쫓겨나자, 이승만은 재빨리 동경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편지를 보내 하지와 함께 만난다. 여기에서 해방 후 조선역사의 대세가 결정된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워 스스로 트루먼의 주구가 된다. 그리고 탈북 기독교인과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권력을 쟁취한다. 반공 이름으로 “미국에 대한 사대”를 선언한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1947년 4월)한 직후 하지 미군정사령관과 만나는 모습. 앞서 하지는 미국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이승만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토로하는 편지를 자신의 고문인 굿펠로에게 보냈다.
이승만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1947년 4월)한 직후 하지 미군정사령관과 만나는 모습. 앞서 하지는 미국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이승만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토로하는 편지를 자신의 고문인 굿펠로에게 보냈다.

이승만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까닭이 무얼까?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것이 항일투쟁 경력이 없는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가리기 위한 연막작전이라는 지적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열렬하게 반공을 외친다. 이념적인 이유로 반공을 주장한 게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일제에 부역하고 신사참배를 했던 기독교인들도 친일에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민족의 염원인 자주 독립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수정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기독교 장로의 탈을 쓰고 기꺼이 미군정 퍼펫으로 활동했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을 악마로 본다. 악마는 사람이 아니므로 살인하는 게 정의의 실현이다.

이승만은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국가 보안법을 제정한다. 국가 보안법이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그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다.

1949년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때, 국가보안법 제정에 극렬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반대파 소장의원 13명을 이 국가 보안법을 통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했다.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가둔 사람의 숫자가 12만 명이 넘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를 보면, 국가보안법 제정 1년 만에 경찰은 확대된 법적 권위를 이용해 18만 8,621명을 체포했다. 군대는 모집과 동시에 숙청을 감행했다. 준군사 우익 집단의 무장이 가속화 됐다. 이승만 정부는 정치범 숫자에 있어서 일제 시대와 미군정 시기를 추월했다. 이 가운데 대략 80%가 공산주의자로 간주됐다. 이승만 집권기에 터진 민간인 학살은 사망자가 최소 수십만 ~ 최대 113만 정도에 이른다. 반대 세력을 사회주의주 빨갱이로 몰아 살인공작을 했다.

1945년 송진우의 죽음, 1947년 여운형과 장덕수의 죽음, 1949년 김구의 죽음 배후에는 이승만이 있다는 게 정설로 굳어졌다.

이승만은  기독교 서북청년단원을 앞세워 제주와 여‧순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정용욱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미군정의 존 하지를 인용해가며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배경을 위해 활동했을 뿐 외교에서마저도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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