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개성, 문산, 파주를 방어선으로 구축하고 있던 백선엽 당시 대령의 국군 1군단은 독립군 출신의 방어산 북한 사단장이 이끈 6사단에 공격을 받아 패전한다. 방어산의 6군단은 한강을 도하한 이후 전 전선에서 가장 빠른 진격을 하면서 전쟁 초기 전선을 장악했다. 사진은 방어선(좌), 백선엽(우)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개성, 문산, 파주를 방어선으로 구축하고 있던 백선엽 당시 대령의 국군 1군단은 독립군 출신의 방어산 북한 사단장이 이끈 6사단에 공격을 받아 패전한다. 방어산의 6군단은 한강을 도하한 이후 전 전선에서 가장 빠른 진격을 하면서 전쟁 초기 전선을 장악했다. 사진은 방어선(좌), 백선엽(우)

백선엽 제1사단_인민군 공세에 무너졌다

필자의 고향은 마이산이 보이는 고원지대 전북 진안(鎭安) 산골이다. 주위에는 운장산, 덕유산과 장안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남쪽 멀리 지리산이 있다. 6.25 전쟁 전후 빨치산 활동이 많았다.

1950년 7월 초등학교 때, 인민군들이 트럭을 신작로 길가 포플러 그늘에 세우고 쉬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그들에게서 노래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인민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관촌을 거쳐 진안으로 들어왔다.  밤에 장수, 함양 가는 길로 내려갔다. 인민군은 제공권이 없었다. 때문에, 낮에는 길가 가로수 그늘에서 쉬고, 밤에만 이동했다. 

이들은 누구인가?.  후일 6.25 전쟁사를 공부하면서 그들은 인민군 제6사단 병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단장은 독립군으로 활약했던 방호산(方虎山ㆍ본명 이천부 李天富, 1913?~1959)이다. 중국공산당의 팔로군 출신의 북한 연안파 군인이다. 전쟁 이후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됐다. 최종 계급은 중장이다.

방호산은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독립운동을 한다. 소련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중국 예안의 항일군정대학 동부간부훈련반(1940)을 수료했다. 일제 강점 말기와 해방 이후에는 중국에서 팔로군 소속 장교로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에 참가한다.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난 후, 조선족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 166사단을 이끌고 귀국한다.

166사단은 병력을 충원한 후 조선인민군 6사단이 된다. 방호산이 초대 사단장으로 취임한다.  방호산 사단이라고도 부른다. 항일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 실전 경험이 풍부해 6.25 전쟁 당시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6사단은 국군 1시단이 담당하던 서부전선의 조공(助攻)을 맡았다. 개전 당일 6사단은  주공(主攻)으로 예상되던 곳에 집중된 국군 수비병력을 우회해 폐선 철도를 복구해 열차를 이용해 병력과 장병들을 개성까지 진격한다. 개성, 문산, 파주 등이 주요 방어 지역인  1사단을 공격한다. 당시 1사단장은 백선엽(白善燁, 1920.11.20~2020.7.10) 대령이다.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합동참모의장 등을 지낸 군인이자 교통부 장관등을 지낸 관료이다.  

백선엽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9기를 졸업하여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한다. 1945년 만주군 중위로 광복을 맞이한다.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소련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자 12월 월남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 제연대 중대장을 맡는다. 1949년 5시단장이 된다. 1950년 개성 1시단장으로 승진한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방호산의 부대는 하루만에 백선엽의 사단이 방어하던 지역을 접령한다.  26일 오후 한강을 도하한다. 북한군 부대 중 가장 먼저 한강을 도하한다. 28일 김포를 접령한다. 방호산의 부대는 다른 북한군 부대들보다 진격 속도가 빨랐다. 서부전선의 6사단은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충청남도와 전라도 쪽으로 내려왔다.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전력을 온전히 보전한 채로 빠르게 밀고 내려왔다.

방호산과 백선엽의 인연은 특별하다.  방호산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조직인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항일투쟁에 참전한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장교로 동북항일연합군 토벌에 참전한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2년까지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수행한다. 1944년~1945년 1월까지는 러허성(현 북경시)밀원현 석갑진 일대에서, 1945년 1월부터 특설부대가 해산되기까지는 하북성 난남현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한다. 주요 토벌 대상은 한족과 조선인,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일원인 양징위 저우바오중가 지휘자로 있는 동북항일연군, 김두봉 김무정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중국공산 혁명군,  팔로군 등이었다. 1939~1945년 사이 간도특설대와 동북항일연군 간의 전투에서 적(敵)과 적(敵)으로 조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다시 한반도 서부전선에서 만난 전쟁을 치른다. 백선엽 사단이 완패한다.

백선엽 사단의 패전은 지휘 부재에서 비롯됐다.  백선엽 대령은 전날 서울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에 참석한다. 술에 만취된 채로 6·25를 맞이한다. 다음 날 오전까지 부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휘자의 공백 상태에서 북한군 방호산 사단을 만난 백선엽 사단은 속수무책 패전한다.  설상가상 26일 미국 공군기가  아군인 1시단에 오폭(誤爆)으로 폭탄을 투하한다. 의정부 지구 인접 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까지 무너진다.  북한군은 보병3사단과 4사단,105전차여단을 투입한 적군의 맹공에 중과부적이었다. 유재홍은 1950년 7월 경북 함창(2군단장), 1951년 3월 경기도 현리전투(3군단) 등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한다.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에 등용되어 관료가 된다.  다행히  춘천 지역 6사단을 이끌었던 김종오(金鍾五)사단장(대령)이 춘천ㆍ홍천 전투(6사단), 백마고지 전투(9사단)에서 맹활약하면서 남진을 저지한다. 북한의 전쟁 초기 전략을 좌절시키는 동시에 국군 주력부대들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기여한다.  후퇴 중에 동락리 전투(음성무극리전투)에서 휘하 7연대[ 2대대가 단독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전멸시켜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는 국군이 최초로 인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그 뒤 계속 남하하며 수안보, 이화령 전투 등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계속 지연시켰다.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그는 1950년 7월 15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다.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이 형성된 뒤 영천 전투에서 6사단은 북한군 8사단에 재기 불능 상태가 되어버릴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힌다. 아군에게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공헌한다.  김일성은 "남조선의 사단 중 제대로 된 사단은 6사단밖에 없다.  그걸 깨부셔야 한다!"는 언급을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공격적으로 하는 와중 7연대 1대대가 10월 26일 최초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한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후송당한다. 1983년 국방부 선정 4대 영웅에 선정된다.

⚫한강 인도교 조기폭파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국군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한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폭파를 명령한 후에 시흥으로 향한다.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한다.

이날 서울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피란길에 나선 서울 시민들은 깜깜한 어둠을 뚫고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로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한강에는 단선 철교 하나와 복선 철교 두 개, 그리고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 등 다리가 모두 5개 있었다. 인도교는 서울 시민이 도심에서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피란민 4,000여 명과 피란 도구를 실은 소달구지, 군인 차가 뒤엉켜 한 발짝 떼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은 인도교와 철교를 폭발를 한다. 북한군의 도강 위험 요소를 미리 없애겠다며 인도교를 서둘러 폭파한 것이다. 이미 이승만 대통령,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대부분 각료들이 서울을 떠난 뒤였다. 

당시 국군 9만 8000명 가운데 7만4000명이 강북에 잔류한 상황이다.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 500~800명이 수장됐다. 1사단과 7사단의 퇴로가 차단됐다. 장병들은 중장비를 강북에 모두 버리고 민간인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왔다. 한강을 건너온 군인은 불과 2만 4000명뿐이었다.

전쟁이 발생한 뒤 지원 나온 미국 군사고문단의 처치(John H. Church) 준장은 미국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 시가전을 펼칠 것을 권고했다.  처치 뿐 아니라 다른 고문단 장교들은 서울 사수에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육군본부는 성급히 한강교를 폭파한다.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
이승만

◆이승만 대국민 라디오 거짓말 방송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승만이 6.25전쟁 당시 특별담화 방송으로 전문으로 알려져 있는 연설문이다.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미국 CIA 예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해외방송감청부서)의 일일 보고서에는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는 말은 없다. 

미국 CIA 예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해외방송감청부서)의 일일 보고서에 기록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방송 연설문 . 번역된 보고서에는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다.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이렇게 방송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다. 모든 우방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처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민국(民國]의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것이다"고 적고 있다.
미국 CIA 예하 FBIS(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해외방송감청부서)의 일일 보고서에 기록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담화방송 연설문 . 번역된 보고서에는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다.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이렇게 방송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다. 모든 우방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처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민국(民國]의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것이다"고 적고 있다.

대신 "국군이 적을 막을 수 없어 밀려났다"면서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어 전한다. 미군이 참전하기로 했다. 군인과 군수물자가 오고 있다"고 적고 있다. 국군이 열심히 싸운다"고 적고 있다.

문제는 이 방송이 나가는 시점에 이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다는 점이다.  6월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기 하루 전인  27일 새벽 2~3시경 서울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멀리 대구까지 내려갔다.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 충남지사 관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미리 녹음해 둔 내용을 대국민 라디오 거짓말 방송을 6월 27일 밤에 냈던 것이다. 

서울시민 상당수는 국방부의 허위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다 한강대교 폭파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상당 수가 서울에 고립됐다. 피난간 사람은 극소수였다.  정부 고위 인사, 국회의원, 서울 시민 대부분이 한강 이북에 남아 있었다. 이들을 ‘잔류파’라 불렀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마자 이승만 세력으로부터 ‘북한군 부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미아리 눈물고개 너머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1950년 6월28일 폭파된  한강인도교
1950년 6월28일 폭파된 한강인도교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 배후 미 군사고문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군 안팎의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갔다.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된다.  대통령, 정부고관, 육군 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한강 이남으로 도피한 뒤,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이 전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하책이며 반역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최창식(당시 30세) 공병감(대령)을 폭파 책임자로 지목했다. ‘적전 비행 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일관되게 결백을 주장한다. 3개월 뒤인 1950년 9월 21일 조기 총살형이 집행된다. 당시는 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해 역전되는 시기였는데, 이런 경향을 틈타 책임소재도 가리지 않고 처형한 것은 정치적 복선이 있다는 의심이 지적됐다. 공병감 독단으로 한강교를 폭파됐다는 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희생양이라는 평가이다. 1961년 최 공병감의 부인인 옥정애 씨는 재심을 청구한다. 6월 15일 육본 보통군법회의는 원심판결 무효를 선고한다. 1964년10월 23일 결심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된다.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재판장 황준환 대령)은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은 절대적 구속력이 있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의해 한강교를 폭파한 것이고 피고인은 이에 복종할 뿐 달리 폭파시간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인정되므로 조급한 폭파로서 초래한 한강 북방의 아군 인원과 장비의 손실은 피고인의 책임이라 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조급(早急) 폭파’를 인정하면서도 최 공병감의 책임은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  최 공병감의 위패는 2013년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수·순천사건( 麗水順天事件)이다. 군대 내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숙군의 칼날은 박정희를 피해가지 않았다. 박정희는 남도당에 가입한 혐의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다. 김창룡 소령이 조사한다. 박정희는 수사에 적극 협조한다. 박정희는 진압군의 고문관으로 광주에 파견된 하우스만, 백선엽 등의 도움으로 구명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수·순천사건( 麗水順天事件)이다. 군대 내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숙군의 칼날은 박정희를 피해가지 않았다. 박정희는 남도당에 가입한 혐의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다. 김창룡 소령이 조사한다. 박정희는 수사에 적극 협조한다. 박정희는 진압군의 고문관으로 광주에 파견된 하우스만, 백선엽 등의 도움으로 구명된다.

군사 전문가들은 한강 다리 조기 폭파 결정의 배후로 미군 군사고문단 제임스 해리 하우스먼(James Harry Hausman,1918~1996)을 지목했다. 한국 정치계의 배후 실력자로 군림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1년까지 한국에서 국제연합 고문으로 35년간 근무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한국에 부임해 전두환 정권이 12.12쿠데타 이후 5.18광주항쟁을 학살로 진압하고 독재를 본격화한 1981년 대령으로 퇴역한다.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7년 영국의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한 새끼들이다" (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라고 평가했다

당시 최장식 공병감의 고문이던 크포포드(Richard I. Crawford)은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폭파지시를 내린 사람은 미군 장교였다.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하우스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채병덕 참모총장의 군사 고문은 하우스만이었다.  하우스만은 채병덕과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하던 전속 고문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 군사고문단의 실질적 책임자는 하우스만이었다. 미국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전쟁 발발 수일 전 퇴역했다. 한국전 발발 직후엔 일본에서 본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트(Wright) 군사고문단 부단장도 일본에 있었다. 한국에 남아있던 군사고문단 장교 중 최선임은 통신장교 스튜리스였다. "한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며 하우스만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하우스만은 자기 회고록<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1995ㆍ정일화 번역)>에서 “내가 지프차로 인도교를 건널 당시 교량폭파가 준비 중이었고 나는 차를 세운 뒤 한국군에게 절대 폭파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넌 뒤 다리는 폭파된다. 사실상 책임자 였던 하우스만이 자신이 다리를 건넌 뒤 폭바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군사전문가들의 추정이다.

하우스만은 제주도4.3사건(1947.3.1~1954.9.21), 여수ㆍ순천사건(1948.10.19~10.27) 등을 진합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는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발생한 좌우 양측의 민간인 학살을 담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빨갱이를 사탄이라고 생각한다. 공산당원과의 투쟁을 성스러운 십자군의 활동으로 여긴다. 가솔린을 부어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다. 여자들을 능욕한다. 빨갱이 사냥을 감행한다. 비슷한 시간에 딴 곳에서는 똑 같은 보복 살인이 일어난다. 

⚫미 제24사단 붕괴, 딘 소장 실종

미군 제 24보병 사간은 미 지상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1950년 6월 30일 미국 국가안보회의에서 지상군 투입이 결정한다.

당시 극동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24보병사단 투입을 결정한다. 제24사단장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 Dean, 1899~1981) 소장은 1대대를 주축으로  400여명 정예의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를 편성한다.

부산 비행장의 활주로 상태가 좋지 않아 C-54 대형수송기를 이용하지 못한다.  작은 규모의 C-47 수송기로 부산에 공수된다. 7월 1일 밤에 부산역에서 기차에 올라 7월 2일 08시에 대전에 도착한다.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한다.  1948년 8월 15일 한국정부 수립 때까지 한국에서 10개월간 군정장관을 지낸 바 있다. 딘은 제주4.3학살사건, 여수사건에서 학살을 명령한 책임자이다.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은 7월 4일 오산북방 5km 지점 죽미령(竹美嶺)에 진지를 구축한다. 뒤를 이어 미 24사단 34연대가 7월 5일 평택·안성지역에 배치된다. 

당시 34세의 스미스 중령은 1939년 미 육사를 졸업하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대대를 지휘한 바 있다. 보병을 지원하는 52포병대대 A포대 병사 134명, 105mm포 6문, 포탄 1200발 그리고 차량 73대는 따로 LST에 싣고 7월 2일 부산항으로 들어온다. 

오산전투에서 스미스 부대 풍비박산

7월 5일 새벽 3시 오산 북방 죽미령에 배치되어 아침 8시 경에 북한군 제107전차연대, 제3보병사간을 상대로 전투를 치른다. 6시간 이상 진지를 지탱했한다. 결국 많은 피해를 입고 2시 30경 철한다. 제24사단 예하부대들은 평택, 천안, 전의, 조치원, 대평리. 공주, 대전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한다.

 7월 20일 대전에서 철수한다. 한 밤에 부상병이 물을 찾으니까 딘 소장이 직접 물을 구하러 나간다.  부관 클라크(Arthur M. Clarke) 중위와 부상병들이 7월 21일 하루 동안 기다렸지만 딘 소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종된 것이다.  7월 22일 영동에 배치된 미 제1기병사단에게 경부국도축선에서의 방어임무를 인계하고 재정비를 위해 전선 후방으로 이동한다. 7월 23일 할 수 없이 부관과 부상병들은 동쪽 산을 넘어 영동에 위치한 1기병사단 방어진지에 도착한다.

당시 24사단의 피해는 엄청났다. 딘 소장이 실종됐다. 투입 병력 3,933명 중 1,150명이 손실을 입었다. 야포와 차량 등 장비도 대부분 잃었다. 금산 가도를 지키던 34연대는 흩어져 개별적으로 대전을 탈출한. 1기병 사단사령부는 초비상이었다. 딘 소장을 구출하겠다고 급수용 기관차에 미군 결사대 30명을 탑승시키고 이원역에서 출발하여 대전역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세천 터널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결사대원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한다. 무모하게 벌인 작전은 실패한다. 미군 수뇌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24사단은 와해된다. 포항을 통하여 투입된 미 1기병사단이 영동에 진지를 편성한다. 24사단으로부터 전선을 인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준다.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룬 셈. 7월 22일 미 1기병사단은 영동 진지에서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3사단과 대치한다. 

 

인천상륙작전 개요
인천상륙작전 개요

인천상륙작전과 38도선 회복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26.~1964.4.5)는 1950년 9월 15일 인천항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만조시간에 맞추어 상륙작전이 감행된다. 오전 만조시간은 06시 30분, 오후 만조시간은 17시 30분이다. 사전에 미해군정보장교 Clark중위가 월미도에 침투한다.  팔미도를 점령하고 등대 불을 밝혔다. 불빛의 안내를 받아 맨 먼저 미5해병연대 3대대의 월미도 상륙을 시작한다. 일제히 월미도 북단해안과 남단 해안으로 1만 3천명의 병력이 상륙한다.  전사 21명, 부상 174명의 피해가 있었다.  300여명의 북한군 포로를 잡았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다.

당시 맥아더는 UN군 사령관이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사령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으로 이끈 상륙작전의 귀재이다. 장군의 산하 육군과 해병대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적 후방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적을 고립시켜 전황을 일거에 뒤집었다. 

당시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까지의 육상 보급로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탈환에 성공하면서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 보급선을 끊기면서 전세를 일순 역전시켰다.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한국군과 유엔군은 대반격작전에 나섰다. 동해안에서 반격에 나선 한국군 3사단이 9월 30일 가장  먼저 38선에 도착했다. 중국은 38도선을 국경선으로 간주하고 중요시했다. 중국 수상 주은래는 1950년 9월 30일 인민대회에서 “만약 외국군(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에 중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그 뜻을 주중 인도대사에게 공식적으로 전달한다.  인도 대사는 바로 영국과 미국에게 전달한다.

38도선 돌파 북진 항미원조(抗美援朝) 빌미 제공

당시 UN에서 소련이 제출한 휴전안을 논의하는 등 38도선에 대한 정치적 의미가 논의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9월 30일 육군 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을 부산 경무대로 불러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고 쓴 명령서를 내린다. 미8군 사령관(워커 중장)의 작전 지휘권을 무시하고 명령한다.

정일권 총장은 1군단장(김백일 준장)에게, 군단장은 10월 1일 다시 3사단의 23연대장에게 북진명령을 내린다. 사단장을 경유하지 않고 편법으로 연대장에게 직접 명령한다. 비정상의 지휘계통으로 북진명령을 내린다. 이날이 국군의 날 기념일이다.

미 8군 사령관도 10월 9일 09시에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라는 공격 명령을 내린다. 23연대  3대대는 이미 38선 북방 12km 지점의 양양(襄陽)까지 진출해 있었다. 10월 7일 유엔 결의안이 채택, 10월 9일 맥아더의 최후 통첩 발표에 앞서 북진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린 것. 중국은 38도선을 국경선으로 보고 23연대가 38선 북방 12Km지점까지 돌파한 것을 두고 북침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에게 ‘항미원조(抗美援朝)’의 빌미를 제공한다.

1950년 10월 24일에 6.25전쟁에 참전을 결정한다. 모택통 주석은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과 싸우는 북조선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중국 국가 안보를 위해 적극적인 차원에서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이다.

10월 25일 중공군과 미1기병사단 8기병연대가 운산(雲山)일대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야간에 포를 쏘아대고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공격한다. 11월 1일에 미1군단장은 중공군의 공격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최초로 철수 명령을 내린다. 미8군은 청천강 선으로 후퇴한다. 미군은 전차, 포병 및 항공의 화력에 의존하는 전투를 한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를 피하여 야간 산악전투를 중심으로 싸운다.  중공군의 최대 약점은 무기와 탄약 등 보급지원이 매우 빈약하다는 점 때문이다.

월리엄 프리시 딘  24사단장, 6.25전쟁 中 북한군에 생포...3년간 포로생활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 1899년 8월 1일 ~ 1981년 8월 24일)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 1899년 8월 1일 ~ 1981년 8월 24일)

월리엄 푸시디 딘은 미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한국 군정기 당시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청청의 군정장관을 지냈다. 한국전쟁 참전 중에 조선인문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끌려갔다. 휴전 이후 미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딘 장군이  한국전쟁에서 맨 처음 투입된 부대인 미8군 제24사단을 맡았다.  대전 전투에서 전선의 맨 앞에 나아가 3.5 인치 바주카로 T-34 탱크를 사냥했다.

사단장 딘 소장은 3.5"로켓포 반을 지휘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7월 21일 오후 34연대 지휘소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다.

딘 소장은 34연대의 마지막 소대와 함께 50여 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대전을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매복한 인민군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여 차량을 버리고 후퇴한다.

딘 소장이 탄 지프는 길을 잘못 들어서서 본대와 분리되게 된다. 딘 소장과 함께 있는 병력은 미군의 전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딘 소장은 함께 가던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 주기 위하여 어둠속에서 물을 찾아 계곡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한다.

36일 간의 방황 끝에 전라북도 진안(鎭安)읍 상전면 운산리에 이르러 농가에 내려갔다.  농민 박종구의 도움을 받아 숨어 지낼 있었다.  8월 25일 경에 농부 한두규(韓斗奎))의 밀고로 인민군에 생포된다.  이 과정에서 딘 소장의 전속부관이 사살된다.  이미 북한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이 진안을 거쳐 남쪽 진주로 내려간 뒤였다. 한두규는 후에 김일성 최고훈장을 받았다. 그가 살던 농가는 지금 용담땜 건설로 수몰됐다. 한두규는 9.28 수복 후 경찰에 체포된다. 1954년 9월 23일에 “불법체포죄”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그는 무죄를 주장한다. 복역 중에 딘 소장이 그의 감형을 탄원하여 1957년 좌익수전향자로 감형되어 출소한다.  딘 소장은 1953년 10월 4일까지 3년간 포로로 있다가 조선인민군 포로 최선임자인 총좌 리학구와 맞교환됨으로써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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