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최고 금자탑은 아마도 1980년대 폴란드 레닌 조선소에서 레흐 바웬사가 주도한 자유 노조 결성일 것이다. 1980년대라면 아직도 모스크바의 서슬이 퍼렇던 동서 냉전의 일촉즉발(一觸卽發 :건드리기만 하면 터지는) 위기가 이어지던 때였다. 폴란드 정부와 소련군의 탄압을 무릅쓰고 오직 노동자 권익만을 추구하는 자유 노조를 결성한 것은 결사의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불가능을 극복한 이가 바로 바웬사이며 폴란드 자유 노조다. 파장은 작지 않았다.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위성국가이던 동유럽으로 불길이 번졌다.
그리고 10년, 바웬사는 폴란드 대통령이 되었고 그 10여 년 뒤 고르바초프가 개혁과 개방을 기치로 내건 소비에트 연방은 볼셰비키 혁명 70여 년 만에 무너졌다. 소련의 붕괴가 바웬사의 자유 노조만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나 적어도 역사의 흐름에 방향을 바꾸는 데 일조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비단 노조만이 아니다. 사회적 압력 단체의 긍정적인 힘은 종종 역사의 흐름이나 그 사회 방향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적어도 한국 민주주의 뿌리에 흙을 바꾸고 거름을 준 것은 1960년 4월 19일의 학생혁명이다. 그러나 ‘학생혁명’ 이후 수많은 압력 단체가 결성되었으나 순기능을 발휘한 곳은 거의 없다. 오로지 ‘집단 이기주의’에 함몰된 채로 목소리만 높여왔다. 그 대표적 단체가 노총(노동조합 총연맹)이며 그 중심에는 민노총이 있다.
노총의 첫 번째 목표는 노동자 권익확대와 보호다. ‘투쟁’ 상대는 노동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을 때는 정부가 될 것이며 보장을 받고 있다면 기업이 다. 기업과의 투쟁 역시 기업 형편과 경제 상황을 참작한 상대적일 때만 비로소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 바웬사 자유 노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가지 요건에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한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 이후 노동운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 되었으며 문재인 정부 때는 노동 천국이 아니라 민노총 천국으로 불릴 정도로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도 노총이 한 일이 무엇인지, 노동자가 아니라 국민이 더 잘 안다. 걸핏하면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와 대정부 투쟁의 일상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과 함께 노조개혁을 주요 정책 과제의 하나로 삼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 안개 속에 묻혀 있던 회계의 투명성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었고 ‘노조원 고용’을 내세워 건설현장에서 행패를 부리던 민노총 간부들이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이른바 무소속 노동자와 건설현장을 울리던 이른바 ‘건폭’도 일단 숨을 죽였다. 회계 투명성을 통해 밝혀진 사실은 민노총과 대한노총이 각각 연간 2백 467억 원과 3백 92억 원의 수입을 올린 부자 단체라는 점이다. 이런 막대한 수입의 상당 부분은 ‘업무추진비’라는 이름의 쌈짓돈으로 쓰였다. 노동자 이익 확대를 위한 노총의 정책사업비의 두 배나 된다. 민노총이나 대한노총이나 노조원의 월급에서 의무적으로 징수한 막대한 돈을 간부들의 업무추진비로 낭비한 것이다. 그동안 회계 공개를 거부한 배경과 노조 간부들이 ‘신 귀족’으로 불린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회계 투명성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건폭’이 사라졌다고 해서 ‘한국식 노동운동’이 정상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노총 사무실은 정부, 지자체 건물을 무료로 사용하고 있다. 또 민노총의 경우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 집행도 거부한다. 또 민노총은 현 위원장을 새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문제는 연임된 위원장이 주사파의 경기 동부 출신이며 경기 동부는 해산된 통진당의 뿌리라는 데 있다. 그 때문일까, 연임된 위원장은 ‘대통령 퇴진’을 첫 번째 투쟁목표로 내세웠다. 민노총뿐만 아니라 노동단체가 이처럼 이념에 매몰된 상황에서 노동자 이익은 증발하고 오직 정치, 그것도 극단적인 이념과 이기주의로 포장된 정치만 남는다.
정부와 법원에게 등을 밀려 장부를 공개하고 건설현장 폭력이 숨을 죽인 것을 계기로 노동단체 특히 민노총은 이념과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 본연의 자세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계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바웬사를 왜 본받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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