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해동 육룡이 나르샤'
드라마'해동 육룡이 나르샤'

서운관 관리 김용세가 고개를 들어 정안군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고 세자는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는 이 나라에서 가장 깊이 있는 장풍법(臧風法)을 공부한 사람 아닌가? 그러니 취현방의 유택(幽宅)을 좀 설명해 주게.”

장풍법이란 명당을 가려내는 법을 이름이다. 상감이 저지를 터무니없는 일을 규탄하고자 하는 것이 틀림없다. 

“소인을 과찬해 주셨습니다. 그 유택에 대해 옛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아뢰겠습니다. <설심부> (雪心賦)에 이르기를 용(龍)의 행지(行止)에 지처(止處)를 진혈(眞穴)이라 하였습니다. 지처란 용, 즉 산의 연봉이 그 흐름을 다한 곳을 의미합니다. 태조 산으로부터 받아온 정기가 조산 또는 분벽(分碧)을 거쳐 주산에 이르고 그 주산 기슭에 명당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취현방 북쪽의 산은 연봉에 연결된 것이 아니고 평지 중에 혼자 돌출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용의 기를 받을 맥이 없습니다. 또한 앞에 있는 안산 격인 목멱산(南山)과 조산 격인 관악은 주산보다 낮아야 하는데 주산인 취현방 언덕보다 훨씬 높은 산입니다.”

(졸저 역사소설 <해동 육룡이 나르샤>에서)

최창조 교수
최창조 교수

이성계 조선 태조가 왕후 신덕 왕후 강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묘소를 한성 성안인 취현방 정릉에 정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선정 경위를 풍수 전문 관리에게 묻는 장면이다. 태조는 계비이며 방석 세자의 어머니인 신덕 왕후 강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대단히 슬퍼했다. 신비의 능을 산기슭에 정하는 관례를 깨고 한성 성내인 취현방 정동(현재 중구)으로 정했다. 경복궁 앞의 동십자각 망루에 올라서면 정릉이 바로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태조는 왕후를 생각이 날 때마다 망루에 올라 정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풍수지리는 신라 때부터 <비기>(秘記)로 전해왔다고 하는데 실물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태조가 신비의 능을 성 안에 정한 것이 풍수지리의 명당(明堂)과 거리가 먼 흉터라는 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정동이 능 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김용세는 “백두대간을 타고 온 정기가 대관령을 거쳐 조산(朝山)인 북한산에 이르고, 그 정기는 다시 북악을 거쳐 한성의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남산(목멱)을 바라보는 명당이지만, 정동은 명당의 정기가 뚝 끊긴 외톨이 언덕에 불과한 땅이라 흉지(凶地)”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민속 풍습 중의 하나가 ‘풍수지리설’이다. 우리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누구도 과학적 근거를 대지 못했지만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은 많았다.  

한국의 풍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한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가 지난달 31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풍수쟁이는 많았어도 진정한 풍수 학인은 없었다. 최창조 교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1980년대 상황이다. “지리학”이란 명칭으로 ‘국학(國學)’의 자격을 누렸던 풍수는 조선이 망하면서 공식 지위가 폐지되었다. 일제는 조선 풍수를 의도적으로 폄훼했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대한민국 전역과 북한의 평양과 개성을 모두 가봤지만 통일한국의 수도로 서울에 견줄 만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조선일보)

1950년생인 고인은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토개발원 주임 연구원을 거쳐 전북대,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를 지냈으나, 서울대로 간 지 4년 만에 교수직을 내던지면서 학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 교수는 1984년 '한국의 풍수사상'을 발간해 ‘잡술(雜術)’ 취급을 받던 풍수를 학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풍수사상가로 평가 받았다. 

풍수지리학을 믿건 안 믿건, 평생을 받쳐 한 학문의 토대를 만든 촤창조 교수의 노력을 높이사며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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