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선언식
1974년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선언식

제작 거부에 돌입

한국일보 편집국 기자들은 총회 결의에 따라 즉각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또 부별 대표(17명)로 수권위원회(위원장 박실, 부위원장 김기경, 김환겸)를 구성하고 발행인, 편집국장, 편집부장(이상우 부국장 겸 종합편집부장), 권혁승 편집국 차장을 차례로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는 총회 결의 사항을 전달하는 한편, 중앙정보부가 발행인 등을 연행한 사실과 기자들의 농성 사태를 보고하도록 재차 요구했다.

제작 거부에도 불구하고 편집 간부진에 의해 결의 사항을 보도하지 않은 채 초판이 발행 되었다. 다음 판 역시 초판을 그대로 인쇄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기자들은 “제작 거부는 발행 중지를 뜻 한다”며 인쇄를 저지할 목적으로 지하의 윤전실로 내려가 집단 농성에 들어갔다.

한편, 수권위원회는 편집 간부들과 계속 협의했으며 발행인과도 네 차례나 회합을 갖고 기사 게재를 거부할 경우 사태가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통지했다.

이 같이 발행인 측과 협상이 원만히 진행되지 않는 동안 시간은 흘러 경기판과 서울판 인쇄 시간이 임박해졌다. 윤전실에서 농성 중이던 기자들은 경기판 인쇄가 시작되자 윤전기의 비상 스톱 스위치를 눌러 인쇄를 중단시켰다. 기사 게재를 반대해 온 발행인은 새벽 3시께 “윤전실에서 농성중인 기자들이 편집국으로 올라오면 결정을 내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자들은 윤전기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고 윤전기가 돌면 다시 스톱 스위치를 눌러 인쇄를 중단시켰다.

이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경기 판은 물론, 서울 판 인쇄 시간도 지나버렸다. 새벽 4시 30분이 되자 장강재 발행인이 직접 윤전실로 내려와 경기 판 인쇄를 위해 시동 스위치를 눌렀다. 이 번에도 이에 맞서 기자들이 스톱 스위치를 눌러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신문을 발행할 수 없다는 확고한 투쟁 의지를 보였다. 농성 중이던 기자들은 초판 내용을 그대로 인쇄하여 서울 시내에 배달하려고 하면 수송부에 나가 배달을 봉쇄하는 방안도 논의하는 등 분위기가 비장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발행인은 주요 간부들과 회의를 갖고 기자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고는 신문을 정상적으로 인쇄하여 배달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발행인이 현장에 내려가서 직접 기자들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터여서 달리 선택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기사 게재가 결정 났는데 그때가 아침 5시였다. 신문이 이미 배달될 시점이었다. 정판부는 많은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랴부랴 개판에 들어가 아침 6시 35분에야 발행이 시작되었다. 평소보다 3시간 이상 늦어서야 윤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일보 기자 일동은 언론 부재의 현실 앞에서

진실을 전달하는 사명을 다 하지 못했음을

국민 앞에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의 방관이나 주저는

우리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 되고 있음을 통탄한다.

지난 22일부터 철야로 진통해온 우리는

여기 굳게 서서 민주 언론을 사수할 것을 결연히 선언한다.

우리는 또한 언론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국가의 안보와 발전에 하등의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 앞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을 채택,

이를 확인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한다.

‘한국일보 기자 일동, 민주 언론 수호 결의’, 정말 길고도 긴 투쟁 끝에 역사적인 신문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경기판과 서울판 1면에 ‘한국일보 기자 일동, 민주 언론 수호 결의’라는 초호 고딕 활자 두 줄의 제목으로 1면 한가운데 3단 기사가 나왔다. 이른바 ‘배꼽 톱’이 된 셈이다. 사실상 머리기사와 같은 의미를 갖는 기사였다. 부제로는 ‘오늘 새벽 외부 간섭 배제 등 4개 지침 채택’이 달렸다. 연 사흘 80여 시간에 걸쳐 정판부와 윤전실에서 활자판과 윤전기를 끌어안고 싸운 끝에 유신 정권 언론 탄압의 실체를 독자에게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 한국일보사 기자 150여 명은 25일 새벽 본사 편집국에서 민주 언론 수호를 위한 결의문과 행동 지침을 다음과 같이 채택했다.

한국일보 기자 일동은 언론 부재의 현실 앞에서 진실을 전달하는 사명을 다 하지 못했음을 국민 앞에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의 방관이나 주저는 우리의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 되고 있음을 통탄한다. 지난 22일부터 철야로 진통해온 우리는 여기 굳게 서서 민주 언론을 사수할 것을 결연히 선언한다.

우리는 또한 언론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국가의 안보와 발전에 하등의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 앞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을 채택, 이를 확인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한다.

① 지난 22, 23일 이틀에 걸쳐 신문 제작과 관련 발행인, 편집국장, 편집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출두, 조사를 받은 사태를 언론 자유에 관한 중대한 침해로 간주한다.

② 우리 사회의 종교인, 지식인, 학생 등이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외부 간섭 없이 자유롭게 보도할 것과 자유 언론에 대한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③ 앞으로 신문 제작 관련되어 언론이 누구라도 부당하게 연행, 구금할 경우 이를 사실대로 보도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귀사할 때까지 편집국에서 기다리며 투쟁한다.

④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기관원의 신문사 출입을 일체 거부한다.

한국일보사 장강재 발행인과 김경환 편집국장, 이상우 종합편집부장 등 편집 간부 2명은 22일과 23일 각각 중앙정보부에 출두, 지면 제작과 관련된 조사를 받은 뒤 23일 밤 11시께 귀사 했다.

장 발행인은 23일 낮 이 편집부장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출두, 이날 밤 귀사했고, 김 편집국장은 중앙정보부에서 한국일보 22일자 3면에 보도된 언론 사태에 관한 홍승일 특파원의 취재, 송고 및 편집 경위에 관해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는 이 기사와 관련 홍 특파원이 보낸 영문기사 원문과 번역문을 참고자료로 제출토록 요구했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장 사장과 편집국 간부들의 소환은 신문편집권의 자유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고, 22, 23일 밤 등 연 3일 동안 철야 기자 총회를 열고 이번 사태로 제기된 여러 문제점을 심각하게 논의, 신문사 간부들의 연행 사실을 보도하기로 결의했었다.>

밤낮을 잊고 윤전기를 껴안고 60시간이 넘게 지루한 투쟁을 벌인 결과가 활자화되자 순간 기쁨에 벅찼다. 곧이어 고작 3단이냐는 허탈감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이 3단이 2년째를 맞은 유신정권에게 주는 의미는 중대했다. 유신 체제의 심장부를 겨냥한 비수나 진배없었다. 당시는 비상조치에 따라 옥외 집회는 물론이고 옥내 집회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런데 기자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정보기관의 언론 통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했으니 말이다. 결국 이 3단 기사는 모든 국민에게 유신 정권이 언론을 얼마나 조직적으로 통제하는지 알리는 역사적 기록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의 불을 지폈고 이 운동은 삽시간에 들불처럼 언론계에 번져나갔다.

1974년10월 장강재 한국일보 사장(왼쪽)과 이상우 편집부장. 가운데는 문희 회장부인

유신 체제의 혹정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이들이 민주화의 횃불을 높이 들었고, 대학가 등지에서 체제 저항 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지식인, 종교인 등 민주인사들이 비밀리에 모여 선언문을 채택하거나 대학생들이 학내에서 기습적으로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사건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철저한 통제와 봉쇄가 이루어지다 보니 참석 인원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도 취재기자들은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썼지만 거의 빛을 보지 못했다. 중앙정보부가 미리 ‘보도 불가’라는 지침을 내리고 편집 간부들은 순종적으로 따라갔던 시절이다.

그때마다 한국일보에서는 젊은 기자들이 편집국에 모여 기사 누락에 항의하고 기사를 게재하도록 편집 간부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간혹 기본적인 기사 요건도 갖추지 못한 아주 간단한 1단 기사가 더러 나가기도 했다. 학생들이 시위를 했는데 ‘왜’나 ‘무엇’을 했는지 따위가 없는 기사였다. 또 유신 정권의 언론 통제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성명서를 기사화하도록 요구하기도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따라서 당시 언론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은 언론사(言論史)에서 이정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철야 농성을 통해 기사 누락에 항의하는 현업자의 언론 운동은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서만 주로 이루어졌다. 또 경찰 출입 기자 사이에 특정한 사안을 놓고 성명을 발표하거나 집단적으로 기사 작성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사를 작성해서 송고해도 기사가 게재되지 않으니 출입기자들이 집단적으로 항의를 표시하는 사건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문사 단위로 유신 정권에 항의하는 경우는 한국일보와 동아일보를 빼고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같은 사실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보도되지 않으니 일반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현직 기자의 언론 운동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을 널리 알렸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언론통제에 항의하는 성명서가 신문에 게재되기는 한국일보의 10월 25일자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25일자 신문은 평소보다 3시간이나 늦게 배달되었다. 마지막 발송차가 아침 7시 25분에 회사를 출발했으니 많은 독자들이 집에서 신문을 보지 못한 채 출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보도됨으로써 언론계 내부에서만 진통을 겪고 있던 유신 정권의 악랄한 언론 탄압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성명서가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언론계에도 큰 충격을 던졌다. 유신 정권에 항의하는 언론 운동은 늘 내부의 행사로만 그쳐 자괴감을 느끼고 있던 언론인들에게 자각제의 의미를 던진 것이다.

한국일보가 10월 23일부터 편집간부 연행에 항의하여 농성을 벌이는 사이에 동아일보에는 10월 23일자 초판 사회면 1단 짜리 ‘서울 농대생 3백여 명 데모’ 기사가 실렸다가 다음 판에 빠졌다. 중앙정보부는 보도경위를 조사한다는 이유로 그날 오후 송건호 편집국장 등 편집간부 3명을 연행했다. 이에 항의하여 150여 명의 기자들이 편집국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는데, 밤늦게 이들이 귀사 함에 따라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그들은 10월 24일을 기해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날은 ‘유엔데이’라 공휴일이었다. 기자들이 출입처에 나가지 않아 편집국에 많은 기자들이 모인다는 점을 착안했던 것이다. 오전 아홉시가 조금 넘어 대회는 기자 18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박수로 선언문이 채택되었지만 선언이 선언으로 그쳐서는 안 되니 보도하도록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이 또한 박수로 채택되었다.

이상우(SANG WOO LEE) 신문인, 소설가

이상우 언론인
이상우 언론인

現) 한국추리작가협회 이사장ㆍ한국증권신문 회장

前) 굿데이스포츠 대표이사 회장, 경향미디어 회장. 파이낸셜뉴스 사장, 스포츠투데이 사장, 국민일보 사장, 중앙대학교 신문방학대학원 객원교수, 일간스포츠 사장, 서울신문 전무, 한국일보 부사장,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한국일보 편집부장, 영남일보 기자

수상: 대한민국문화포장(2019), 한국추리문학대상(1987)

저서: 세종대왕, 이도, 신의 불꽃, 이상우와 함께 미스터리 완전독파, 도적질에도 철학이 있다. 추리소설 잘 쓰는 공식, 김종서는 누가 죽였나, 악녀 두번 살다. 밤 무지개, 정조대왕 이산, 죽이는 이야기, 마지막 숙녀, 굿데이굿맨 이상우, 정조대왕 미스터리 왜 그의 혁명은 실패했는가. 불새 밤에 죽다. 화홍문 가는 길, 개와 시인. 변명, 아내를 죽이는 99가지 방법, 변명, 아내는 실종중, 북악에서 부는 바람 등, 공포특급열차, 시간의 미화작업, 안개도시, 여의도 알리바이, 악녀유희, 역사에 없는 나라, 설록홈즈 정보테크닉, 세 여자 네번째 살인, 악녀의 성, 악녀와 함께 여행을,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컴푸터살인. 악녀시대, 안개섬의 비밀, 파혼여행, 불새 밤에 죽다, 원효, 갈릴레이, 디즈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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