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사회 주역인 MZ세대 인식 반영해야 사회 발전 가능
국민 모두 전 근대적 사고 탈피해 내부고발자 보호해야

두산그룹은 100년 역사를 가진 국내 재계 서열 16위 기업이다. 1896년 8월 서울 종로에서 창업한 박승직 상점이 시초이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이 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두산(斗山) 사명은 창업주 박승직이 "쌀을 한 말(斗) 두 말 쌓아서 큰 뫼(山)를 이루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두산은 △창업주 박승직 친일행위 △박가분의 납 성분 함유 논란 △낙동강 폐놀 유출 사건 △형제의 난 등의 논란과 사건 사고를 겪는다.  두산의 기업 신뢰를 무너트린 사건은 2005년에 발생한 형제의 난이다. 박승직-박두병에 이어 3세 경영이 시작된다. 형제 경영을 추구한다.  장남 박용곤 전 회장을 시작으로 차례로 차남 박용오로 이어져 오던 중에 이른바 '쩐의 전쟁'이 터진다. 박용오 전 회장 측은 "두산그룹 일가가 20년 동안 1,700억 원 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폭로한다. 박용성 회장 측은 "박용오 회장이 경영을 맡고 있던 두산산업개발이 2,700억 원 대 분식회계를 했다."며 맞선다. 그해 11월 검찰은 두산그룹 총수 일가가 10여 년 동안 326억 원의 회사 돈을 횡령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결과 박용오 일가는 두산에서 축출된다. 이어 3남 박용성-4남 박용현 - 5남 박용만이 회장직을 맡은다. 박용만은 4세 박정원에 경영권을 이양하면서 4세 경영이 시작된다. 골육상쟁의 상속분쟁을 겪는 다른 재벌과 달리 형제경영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두산이라 일반인조차 배경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 박 회장이 촉발한 두산의 내부고발 사건을 분석해 보자. 

두산그룹 로고의 변천사(상), 박승직 창업주(위 2번째 줄 좌), 2세 박두병 회장(우), 아래는 두칸은 2세 박용곤(장남)  박용오(차남) 박용성(삼남) 박용현(사남) 박용만(오남) 박용욱(육남) 등 6형제 @자료사진
두산그룹 로고의 변천사(상), 박승직 창업주(위 2번째 줄 좌), 2세 박두병 회장(우), 아래는 두칸은 2세 박용곤(장남) 박용오(차남) 박용성(삼남) 박용현(사남) 박용만(오남) 박용욱(육남) 등 6형제 @자료사진

오너의 밀실경영이 빚은 대참사 '각인'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 날 없다." 자식을 많이 둔 부모에게는 걱정이 그칠 날이 없다는 속담이다. 두산그룹이 1896년에 박승직 창업주에 의해 설립된 이후 2세 박두병에 이어 3세 경영이 시작된다.

박두병 회장은 슬하에 자녀 6남 1녀를 둔다.박용곤(장남) 박용언(장녀) 박용오(차남) 박용성(삼남) 박용현(사남) 박용만(오남) 박용욱(육남) 등이다. 인화를 내세운 박두병 회장은 형제 경영을 강조한다. 장남 박용곤에서 차남 박용오로 넘어온 뒤 브레이크가 걸린다. 삼남 박용성 회장에게 회장 바톤터치가 멈춰선 것이다. 일이 터진다. 

박용성은 996년부터 2005년까지 두산 회장직을 맡았다. 식음료·경공업·생활문화 등 내수 산업 위주로 사업을 펼치다오다 경영난을 겪으면서 1995년 구조조정을 단행해 성공한다. 1997년 다른 재벌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해체되거나 사업이 축소된 것과 달리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덩치를 키웠다. 

박 회장은 두산을 중공업 중심의 수출기업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05년 차기 회장 자리를 동생인 박용성에게 물려주라는 형제들의 요구에 반발하다가 물러나면서 내부고발을 결행했다. 내부고발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2005년 7월17일 박용오를 제외한 박용곤·박용성·박용만 등은 가족회의를 개최해 그룹 회장을 박용오에서 박용성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박 회장은 반발하다가 회장직을 내놓는 조건으로 두산산업개발의 계열분리를 요구했지만 묵살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형인 박용곤으로부터 두산을 물려받을 당시 엉망이었던 경영을 정상화시킨 공로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7월21일 동생인 박용성·박용만이 17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800억 원대의 외화를 밀반출했다고 검찰에 고발했다. 

박 회장의 내부고발이 터지자 두산은 일단 내부고발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조치로 대응했다. 내부고발이 언론에 밝혀진 당일 박용곤이 가족회의를 주재해 박 회장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가족에서 퇴출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두산이 오너 가문의 왕국도 아닐 뿐만 아니라 왕조시대도 아닌데 가족을 반역자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박 회장은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자 자신이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두산산업개발이 2700억 원 대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흙탕물 싸움이 진행되며 여론이 악화되자 결국 회장직을 물려받았던 박용성은 그룹 회장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용만은 그룹 부회장에서 각각 퇴진했다. 

마지막으로 형제간의 갈등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까지 관여하면서 수사기관도 외면할 수 없었다. 검찰이 수사한 결과를 보면 오너 일가는 258억 원을 횡령하고 2838억 원 규모의 분식회계 및 비자금을 조성했다.

박 회장과 박용성은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80억 원, 박용만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40억 원을 선고받았다. 박용성과 박용만은 2007년 2월 노무현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았다. 오히려 대기업의 치부를 드러내 처벌을 받게 함으로서 사회정의를 실천한 박 회장은 특별사면에서 빠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사법 카르텔은 로비로 수사기관 무력화

두산의 장자인 박용곤이 박 회장을 반역자로 규정한 것과 달리 시민단체는 내부고발자로 지칭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2004년 말 기준 두산 오너 일가가 가진 지분은 4.95%에 불과했다. 2005년 7월 기준 계열사 직원만 2만1000명이 넘는 대기업이 몇몇 오너 가족이 밀실에서 회장을 결정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박 회장의 내부고발이 사회에 준 교훈도 여러 가지다.

첫째, 창업자의 아들들이 돌아가며 경영을 맡는다는 이른바 ‘형제경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자녀에게도 경영의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는 측면에서 상속분쟁을 피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부실경영의 위험은 피할 수 없다.

형제경영을 전통으로 세우고 싶었던 금호그룹도 2010년 ‘형제의난’을 겪으며 분열됐다. 형제간의 갈등으로 그룹이 우왕좌왕했던 것은 삼성그룹·현대그룹·효성그룹·한진그룹·롯데그룹·대성그룹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대그룹도 창업자인 정주영이 다섯째 아들인 정몽헌에게 그룹을 넘겨주자 다른 아들들이 반발한 ‘왕자의난’이 일어나며 사분오열됐다. 삼성그룹은 창업자인 이병철이 장자인 이맹희 대신 3남인 이건희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둘째, 수사기관은 정권의 눈치도 보지만 사법 카르텔의 로비에 매우 취약해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최초로 재벌 회장이 구체적 근거를 갖고 내부고발을 단행했지만 수사결과는 초라했다. 박 회장이 고발한 불법행위에 관련된 금액이 수사로 밝혀진 불법자금의 규모가 많았다. 

당시 노무현정부는 부정부패와 단절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선 공무원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하지 않았다. 불법행위를 자행한 재벌이 호화로운 경력을 자랑하는 변호사로 법률팀을 구성해 변론하면 수사·재판결과마저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검증해준 사건이다. 

셋째, 우리 사회에서 내부고발자를 배신자 혹은 반역자로 규정해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면 피고발자에게 동정하는 세력이 생긴다. 아무리 백성에게 포악한 왕이라고 해도 신하가 왕을 처단하면 반역행위라고 인식하는 것처럼 서열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박 회장도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내부고발을 결행한 것은 아니지만 재벌의 불법행위와 불법비자금 조성을 막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형제를 고발한 사람이라고 비난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정사회를 외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새로운 시대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해 국가발전을 이루도록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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