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출연·제작진도 대거 OTT로 넘어가
2024년 한국영화 신규 투자 축소 가능성

김진국 경기영화인총연합회 회장
김진국 경기영화인총연합회 회장

[공정뉴스_조경호 기자] 한국 영화 산업이 위축됐다. K-컬처의 중심 축인 한국 영화는 코로나를 거치면서 OTT공습에 속수무책 당했다. 신규 제작과 투자가 축소되면서 영화제작 인력과 출연진이 대거 OTT산업으로 이동했다. 서울의 위성지역인 경기도가 풀뿌리 영화 산업을 이끌고 있다. 그 정점에 김진국 영화감독이 있다. 경기영화인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70년대 척박한 영화산업 현장에 들어와 20년간 연출부 생활을 거쳐 1990년대 후반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영화와 사업을 병행하면서 영화계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50년 간의 그의 저력이 척박한 경기도에 영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영화제를 통해 후배 영화인을 양성하며 새로운 K-컬처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난 10월 13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열린 <2023 제2회 경기도예술영화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를 만나 향후 행보를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3년 경기도예술영화제 
2023년 경기도예술영화제 

-경기예술영화제가 성황리 막을 내렸다. 2회째를 맞아 지역영화제로서 빠른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경기도(京畿道)는 서울과 가장 인접한 수도권이다. 31개 시군에 22개 영화인지부가 있다. 영화산업이 서울과 부산으로 이원화되면서 인프라가 부족하다. 경기도가 영화·영상 산업 중심도시를 만들기 위해 2021년부터 영화·영상 산업 관련 부지나 스튜디오, 제작환경을 연계한 경기도에 특성화된 산업으로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경기예술영화제는 경기도의 브레인웨어(Brainware) 분야 발전 방향에 맞춰 영화·영상산업에 종사할 인재 양성, 발굴 등을 통해 경기도의 영화·영상산업 중심도시 만들기에 일조해 나가고 있다.

-경기도 예술영화제가 추구하는 전략과 내용은 무엇인가.
▶브레인웨어(Brainware)전략이다. 창작 지원사업을 통해 미래 영화·영상산업에 종사할 고급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다. 영화·영상 콘텐츠 산업도 BT·NT·IT등과 융·복합한 산업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창조 콘텐츠가 핵심이 되면서 브레인웨어 전략이 필요하다.  미래 영상문화 산업을 선도할  대학생 청년들을 발굴하여 길러내어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할 인재를 양산하는데 목적이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은 경기예술영화제는 각 지부의 지부장과 회원들의 협조로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으로 자리 매김해가고 있다. 영화·영상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영화축제'가 되고 있다.

-영화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개인 성장을 위해 개개인의 창의력이 예술산업에 주체가 되야 한다.

-가수 BTS·싸이·HOT, 드라마<겨울연가><대장금>, 영화<기생충>, OTT<오징어게임>등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세계 속에서 한류문화를 각인시켰다. 한류의 힘은 그 자체 만으로 가치가 증명됐다. 영화 산업도 극장을 벗어나 비디오→DVD→OTT등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은 전세계 로 OTT영화가 각광을받는 시기에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예술성보다 상업성이 산업에 중심이 되고 있다. 경기도영화인협회에 지향점은 예술성이다. 어느 누구든 배급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영화,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미래 한국영화를 이끌 청년 영화인들이 자신 만의 창작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플랫폼을 만들어 국내·외 배급과 해외 영화제 출품을 지원하는 일들을 해나갈 계획이다.

김진국 회장
김진국 회장

-현재 영화감독에서 사업가로 성공했다. 젊은 시절 영화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한국의 헐리우드로 불리는 충무로에서 영화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사업과 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70년대 대학을 졸업한 뒤에 영화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충무로로 들어왔다. 나는 배우로 시작해 영화감독으로 꿈을 바꿨다. 내 이름이 들어간 작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충무로 생활을 했다. '꿈의 공장'으로 불리는 헐리우드와 달리 한국의 영화 산업은 열악했다. 충무로에는 제작·스텝·배우가 있었다. 스탭 용역비·개런티(출연료)는 계약금-중도금-잔금으로 지급됐다. 영화사에서 잔금을 떼어 먹는 것이 예사였다. 영화인들의 삶은 피폐했다. 배급 시스템은 영화사에서 서울 개봉관을 제외한 지방 판권을 입도선매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흥행에 성공해도 서울 개봉관에서 부금(50~60%)을 받았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당시 충무로에는 영화인의 꿈을 꾸는 자들이 넘쳐나면서 1970~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1989년 미국 헐리우드 영화사인 UIP가 직배를 시작하면서 충무로의 환경을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직배를 둘러싼 영화계 내부의 갈등이 폭력적 양상으로 치달리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다. 충무로의 세대 교체 바람이 분다. 신·구 영화인 간에 갈등이다. 나는 1989년 마침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흥행은 실패했다. 작품성보다 제목의 선정성 때문에 여론에 도마에 오른다. 영화감독으로 제기를 꿈꾸다가 시간이 지체되면서 생활고 때문에 영화를 떠나 리사이클 사업에 뛰어든다.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뒤 다시  영화에 대한 그리움에 충무로에 나오게 됐다. 충무로는 젊은 시절 나에게 줄거운 추억이지만 아품이다. 

-70~80년대 영화를 하면서 느꼈던 점과 현재 전환된 영화산업에서 느겼던 점은.
▶영화산업의 구조가 바꼈다. 중소기업의 영역이던 영화산업에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산업구조가 바뀌는 계기가 됐다. 필름→비디오→CD→DVD→IPTV→OTT로 전환됐다. 배급구조도 극장→복합상영관으로 바꼈다. 현재 한국 영화·배급 산업을 넷플릭스가 삼켰다. 한동안 영화산업을 쥐락펴락하던 CJ·롯데·중앙일보 등도 영화산업에서 빠져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충무로는 더욱 쇠락했다. 충무로 거리는 사라졌다. 선배로서, 현재까지 영화를 지키는 영화인으로서 충무로를, 영화를 사랑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영화감독 시절 김진국 회장
영화감독 시절 김진국 회장

-영화 산업에서 일자리 창출이 시급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상륙한 이후 제작비가 증가했다. 주연배우의 개런티는 천정부지다. 하지만 조연·단역배우와 스텝 대부분이 개런티·용역비와 처우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다는 게 10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나왔다. 연기자 40%는 출연료로 연간 1000만도 안되다는 증언이다. 경기도영화인협회는 영화인 일자리 창출을 첫번째 개선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경기도예술영화제와 배리어프리영화를 시작하면서 쉬고 계시는 영화인(배우,감독,스탭) 들을 참여시켜 일자리 창출을 하고 있다.  청소년 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해 교수진으로 영입해 강의를 하도록 하고 있다. 또는  학생들이 만드는 작품에 기성 영화인을 슈퍼바이저(고문)으로 참여하도록 해서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진국 회장
김진국 회장

-일자리 창출 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현재 개인의 사저를 털어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부와 경기도에서 기성 영화인과 청년 영화인의 일자리 창출 사업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한다면 더 많은 영화인과 청년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충무로에 마지막 남은 산타크로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배경은.

▶70~90년대까지 30년 넘게 영화를 하다 10여년 간 충무로를 떠나 사업을 하다 2010년대에 다시 돌아왔다. 과거 충무로에는 스타다방 초우다방 까치다방 명다방 벤허 초겨울다방 나산다방 초원다방 등이 성업중이었는다. 그곳을 가면 배우와 스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산업이 쇠퇴하면서 대부문 문을 닫고 현재 초원다방만 남았다. 한마디로 충무로에 모처럼 나오면 갈 곳도 없어진 셈이다. 과거 다방처럼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왔다 가고 만날 수 있는 사무실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옛날 초우다방 2층에 사무실을 개설했다.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고, 간단한 사무 일을 할 수 있다. 정겨운 지인들을 만나 커피를 마시며  옛날 충무로 시절 정담을 나누는 장소가 되고 있다. 만났다가 맹숭맹숭하게 갈수 없어 소주라도 한잔 할수 있도록 그런 자리를 만든 것이 산타크로스라는 별명을 듣게 된 것 같다. 

경기영화인총연합회가 주최한 단편영화 시사회 후 제1기 영화아카데미 수료한 학생
경기영화인총연합회가 주최한 단편영화 시사회 후 제1기 영화아카데미 수료한 학생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위독한 아버지에게 신장을 내어줬다"는 효자 아들을 뒀다는 자랑이다. 

▶젊은 시절 영화와 사업을 하며 바쁘게 살았다. 내 건강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10년전 건강이 나빠졌다. 신장을 기증할 공여자를 찾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아들이 공여자로 나섰다. 아들이 너무 고맙고 기특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젊은 아들에게 늙은 아버지가 더 살기 위해 신장을 받기까지는 힘든 결정이었다. 아들의 공여로 수술을 받았고, 성공적이었다.  아들에게 신장을 공여받아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이젠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 어렵게 생활하는 영화인들을 돕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 

경기도예술영화제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지역영화제로 자리매김하면서 국내 예술제를 대표하는 대한민국종합에술대회에서 수상한 김진국 회장(왼쪽에서 4번째).
경기도예술영화제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지역영화제로 자리매김하면서 국내 예술제를 대표하는 대한민국종합에술대회에서 수상한 김진국 회장(왼쪽에서 4번째).

-다시 영화감독으로 현장에 서게 된다면 어떤 감독으로, 어떤 영화를 연출하고 싶은가.
▶TV를 켜거나 신문을 보면 뉴스의 90%이상이 폭력적이다.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분야가 폭력과 오락에 얼룩졌다. 물질만능이 범죄국가를 만들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직·간접적인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다. 안타깝다. 국민의 감정과 정서를 위로하는 가장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어머니, 자녀들이 함께 보는 국민의 정서를 변화할 수 있는 영화를 언제가는 한번 만들어 볼 생각이다.

김진국 Kim Jin-guk 영화감독

김진국
김진국

1954년 10월 서울생.  청구상고·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1974년 노진섭 감독의 <소띠아가씨>에 출연한 것이 계기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당시 촬영부로 일하던 한 선배의 권유로 연출 공부를 한다. <남사당(이규환·1974)> <석양의 10번가_빛을 마셔라(강대진·1979)><타인의방(김문옥·1979)><여자가 울린 남자(서윤모·1981)><사랑이 시작되는 날(한상훈·1985)><성춘향(한상훈·1987)><감자(변장호·1987)><밀월(변장호·1989)><이태원 밤하늘엔 미국 달이 뜨는가(윤삼육·1991)>등 작품에서 조연출을 맡는다.

1989년 영화<껄떡쇠>로 영화감독 데뷔한다. 조선시대 부패한 껄떡쇠라는 인물을 통해 양반사회를 비판한 성인 영화다. 

첫 영화의 실패 이후  리사이클 사업에 뛰어든다. 멘땅의 헤딩이었다. 기후 행동이 화두가 되면서 화석연료를 감축한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스크랩 재사용이 철강기업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사업은 성공한다.  기업가로 성공한 그는 그가 못이룬 영화의 꿈을 후배 양성을 통해 제2의 인생 절정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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