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88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앞두고 부량아 소탕 작업
형제복지원 3146명 수용...강제 끌려온 원생 쿠타와 강제 노동 동원
젊은 여성 성폭행, 저항하면 구타하고, 죽여 암매장까지 온갖 인권유린

부산의 형제복지원(弟福祉院)은 부량인 선도 목적으로 975∼1987년까지 12동안 3만 8000면을 불법감금하고 인권 유린사건이다. 강제노역에 이어 구타, 성폭행 등 끔찍한 학대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을 암매장했다. 확인 사망자만 551명이다.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생존자 13명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나섰다. 인권 유린의 만행이 저지러진 형제복지원 터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가 끔찍한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의 눈물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검찰의 형제복지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보도한 당시 기사. '철옹성'형제복지원 제하의 기사에 높은 담으로 둘러 싸여 있고 각방마다 창살이 촘촘하게 쳐 있어 철옹성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복지원 숙소건물과 정문 앞에는 경비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고 적고 있다. 
검찰의 형제복지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보도한 당시 기사. '철옹성'형제복지원 제하의 기사에 높은 담으로 둘러 싸여 있고 각방마다 창살이 촘촘하게 쳐 있어 철옹성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복지원 숙소건물과 정문 앞에는 경비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다고 적고 있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1(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백양대로 372) 일대에 위치했던 부랑자 강제수용소이다. 3,146명이 수용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졌다. 35명이 탈출했다. 앞서 1월 부산지검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가 형제복지원에 대한 수사를 착수한 뒤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비호 아래 벌어졌던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 그리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민국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것이 형제복지원 설립의 배경이었다.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이나 노숙자, 기차역에서 TV를 보고 있거나, 시장에서 음식을 먹던 무고한 시민 등을 부랑인으로 생각하고 아무도 모르게 무조건 끌고 가서 불법 감금 시키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여성은 강간까지 당했다.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 하거나 심지어는 죽이고 암매장까지 했다. 인원수만큼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 12년 동안 무려 589명 사망했다.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원장 박인근(당시 58세)은 울주군에 위치한 개인 소유의 토지에 운전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킨다. 온갖 매질과 핍박으로 점철된 형제복지원의 생활은 일제 강점기 감옥을 연상시켰다.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한 한 수용자의 증언에 따르면, 비가 내리면 야산에 매장된 시신이 흙이 무너져 쓸려 내려온다.  진흙과 사람의 살점이 뒤섞인 것을 아이들이 뭉쳐서 '쫀득이'라고 부르고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는 것이다.  주린 배를 인육으로 채울만큼 식사도 엉망이었다. 제대로 된 처우나 대우는 없었다. 개나 돼지처럼 사육됐다. 

형제복지원에 끌려온 수용자들이 강제노역하던 울산 울주군의 반정목장농원 @자료

◇김용원 검사의 수사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건 김용원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現울산지검) 김용원(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 변호사)이다. 

김 검사는 1986년 12월 21일  지인들과 함께 울주군 청량면 삼정리 인근에 꿩 사냥을 간다. 이곳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땅을 일구거나 돌을 깨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몽둥이를 든 경비원이 경비견까지 동원해 노동자를 감시를 하고 있었다. 중범죄임을 직감한 김 검사가 증거 확보를 위해 강제노역 현장을 인권유린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울산지검은 1987년 1월 15일 반정목장의 강제노역 현장을 덮친다. 개간 작업을 위해 숙소를 지어 180명이 수용한다. 이들은 박인근 (당시 58세ㆍ2016년 사망)원장의 소유 토지(270,000㎡)을 개간하여  목장과 운전교습소를 만드는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하루 10시간씩 강제 노역을 했다. 원생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경비원 10여명이 24시간 감시했다. 심지어 경비견 13마리를 풀어 감시했다.

울산지검은 직원과 수용자로 나눠 투 트랙으로 조사를 한다. 반정목장 현장 간부와 경비원을 대상으로 △수용자 입소 경위 △감시방법 △가혹행위 등에 대해 조사했다.  또한 수용자를 대상으로 △수용 경위 △수용 조건 △강제노역 사실 △감금사실 등을 조사했다. 여성 수용자의 경우 △간부와 간음 △성폭행 등에 대해 조사를 실시했다.

형제복지원에서 180명 수용자를 차출해 울산 반정목장 현장에 수용시킨 뒤, 강제동원해 혹독한 작업을 시키고 구타를 한다.

김계원(당시 40세)씨가 1986년 8월 2일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뒤 소대장 이충열(26세)씨로부터 폭행을 당해 다음날 숨진다. 김씨가 사망하자 병사로 꾸며 매장한다

수사의 발단은 반정목장이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형제복지원으로 불똥이 뒤었다.  운영비 등의 비리가 드러났다. 

부산형제복지원 @자료

울산지청은 16일 오후 부산에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해 관계자 6명을 연행한다. 박인근 원장의 방을 압수수색했을 당시 대형 금고에 현금 20억원(현재 가치 65억원)과 예금증서가 발견됐다.

검찰은 17일 박 원장과 직원들을 업무상 횡령, 불법감금(반정목장 건)으로 구속한다. 원장은 불법감금, 폭행, 횡령 등 6가지 죄목으로 기소된다. 살인죄는 혐의에서 빠진다. 박 원장은 1심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가 2심 등 7번의 재판을 받아 최종 2년 6개월 선고 받았다. 그것도 형량이 줄어 고작 2년만 살고 석방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단이 된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였던 만큼 형제복지원 인권유린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해 사건을 덮으려고 검찰에 외압을 넣은 것으로 알려진다.

울산지청은 울산의 180명 수용자에 이어 부산 형제복지원에 있는 3000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부산지검장이 나서 형제복지원에 대한 본격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다. 횡령액수를 축소하라고 했다. 부산지검이 나서면서 부산 형제복지원에 대한 조사를 못해 특수감금 혐의는 적용할 수 없었다. 

월간 부산문화 (1987.10.)
월간 부산문화 (1987.10.)

울산지청은 박인근 원장 등 6명을 구속한다. 총무를 보던 아들 박두선을 불구속 입건한다. 김계원 사망사고 때 형제복지원의 부탁에 따라 '신경쇠약으로 인한 신부전증으로 숨졌다'는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해준 북부산의원 정명국씨를 불구속입건했다. 

◇형제복지원 실태와 원생 수용

형제복지원은 1960년 7월 부산시 남구 감만동에서 고아수용시설인 형제원을 출발한다. 1975년 7월 부산기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로 이전한다. 부지155,600 ㎡에 건물 34동, 연건평 23,700㎡이다. 형제복지원으로 변경한 뒤 부산시로부터 부량아, 걸인, 윤락녀, 마이 등의 수용을 위탁받는다. 정신병자를 수용하는 형제요양원을 건립한다. 

1987년 1월 검찰이 형제복지원 수사를 시작할 당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원생은 남자 2,811명, 여자 253명 등 3,164명이다. 18세 이하 청소년과 육아가 878명이다.

당시 형제복지원에는 '새마음'이라는 잡지가 발간됐다. 87년 1월호에 3,971명 중 경찰이첩 3,346명(84%),  구청이첩 258명(6.5%), 봉사센터 132(3.3%), 부산의료원 7명 기타 228명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부산 10개 경찰서로부터 인계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거리의 부량인을 단속해 내부부 훈령 제410호에 의거해 형제복지원 같은 수용시설에 수용시켰다. 

형제복지원은 섬 전체를 강제수용소로 사용한 일본 나가사키현 사나사키시에 있는 '군함도(ぐんかんじま)와 유사한 시스템을 갖췄다. 군함도는 1940년 조선을 강제 징용하여 석탄노동을 시켰다. 형제복지원도 부산시 외곽에 있지만 섬과 같았다. 높은 담에 방 창문마다 쇠창살이 가려져 있다. 출입구는 이중문으로 굳게 닫았다. 육중한 열쇠까지 채워져 외부세계와 단절시켰다. 

박인근 원장은 1930년 경남 울주군 강동면 출신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대 후 헌병 하사관 특무상사를 지낸다. 1960년 7월 장인이 설립한 부산 남구 감만동에 있는 형제보육원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을 갖는다. 65년 7월 부산시로부터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받는다. 국고 지원으로 보육원을 운영한다.  75년 부산시와 부량인 일시 보호 위탁계약을 맺고 사회복지 사업을 시작한다.

형제복지원의 운영을 군함도와 군대의 특징을 도입해 운영한다. 복지원 체제에 비교적 순종적인 수용자에게 완장을 주고 같은 수용자를 관리하도록 했다. 조장, 반장, 실장, 소대장, 중대장으로 이어지는 계급을 만든다.

원생은 60명씩 1개조로 한  23개 소대로 편성했다. 수용자 중에 전과자나 원장의 친위 세력을 소대장으로 임명한다. 월2~3만원의 월급을 지급한다. 보급품 지급에 특혜를 준다

완장은 일반 수용자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었다. 복지원 직원들은 완장을 했다. 박인근 원장을 비롯해 10~12명 정도가 완장을 찼다. 복지원을 지키는 경비도 수용자 중에서 뽑았다.

조장>반장>소대장>중대장>직원>원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어 원생들을 감시했다. 만약 도망을 기도하는 원생이 발각될 때는 가혹하게 못매를 때려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다. 체벌은 조장>반장>소대장>중대장 순서대로 이어졌다.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작업장에 투입되어 일하고 있다. 당시 작업장에서는 구타가 일상적으로 자행된 것으로 알려진다.@자료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작업장에 투입되어 일하고 있다. 당시 작업장에서는 구타가 일상적으로 자행된 것으로 알려진다.@자료

13소대는 말을 잘 듣지 않은 원생 중심으로 편성해 심한 가혹 행위를 했다. 7소대는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편성해 교회 옆 바위산을 깍아내서 평지로 만드는 작업을 시켰다.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시켰다. 강제노역의 댓가로 새마을담배 3개비씩을 지급받는다. 식사는 1식 5찬을 홍보했지만 실제는 거의 변함없는 젓갈, 된장, 무우, 배추축이 고작이었다. 

외부 홍보용으로 1인 1기 직업훈련사업으로 목공, 이발, 용접, 미용, 미장 등의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기술을 배워 정상적인 생활을 할수록 지원한다는 목적이다. 

 부산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어린 원생들이 새벽애 일어나 4열 종대로 서서 부동자세로 아침 점호를 받고 있다. 점호가 끝나면  열을 맞춰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자료
 부산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어린 원생들이 새벽애 일어나 4열 종대로 서서 부동자세로 아침 점호를 받고 있다. 점호가 끝나면  열을 맞춰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자료

◇형제복지원 피해보상 요원

형제복지원 사건이 발생한 이후 복지원은 해체된다. 가해자인 박인근 원장은 항소심에서 횡령죄만 인정돼 징역 2년6개월에 실형이 선고된다. 그것도 형량이 줄어 2년 만에 석방된다. 

박 원장은 전두환 정권에서 부량아 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과 1984년 각각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훈포상은 2018년 7월 박탈됐다.

박인근 원장은 출소 후 형제복지원 부지를 매각한다. 다른 사업에 투자해 성공한다. 1,000억원 대 재산을 가진 재벌로 살다가 2016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건 이후 풀려난 피해 생존자들은 제대로 된 피해보상은 커녕 재사회화 역시 엉망진창이 된다.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지옥의 섬이던 형제복지원에서 죽어나간 피해자들의 시신들이 집단 암매장 된 곳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밤 마다 켜지는 전등 불빛에 찬란하게 비치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피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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