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 무능력한 측근들 방만한 국정운영... 4.19 혁명으로 역사의 심판
박정희 정권, 핵심실세들 돈 잔치로 부정부패... 핵심 측근에 의해 정권 종말

[출처= 뉴시스]
[출처= 뉴시스]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행하다. 역대 대통령들은 불행했다. 이승만(1-3대), 윤보선(4대), 박정희(5-9대), 최규하(10대), 전두환(11-12대), 노태우(13대), 김영삼(14대), 김대중(15대), 노무현(16대), 이명박(17대) 박근혜(18대)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재임시절 불거진 권력형 비리로 퇴임이후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야ㆍ쿠데타ㆍ암살ㆍ감옥행까지 다양한 불행이 역대 대통령을 괴롭혔다. 지난달 30일 17대 이명박 대통령이 재구속됐다. 징역 17년형을 받았다. 18대 박근혜 전 대통령도 구속되어 감옥을 살고 있다.  대통령의 비리는 후진국형 비리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GDP 순위 12위이다. 경제대국이 됐지만 정치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고(故)이건희 삼성회장은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4류 정치와 3류 행정이 기업의 발목을 잡는 나라"라고 비판했디.  4류 정치 이면에 역대 대통령들에 비리가 한몫을 하고 있다. <공정뉴스>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형 비리를 분석한다. 

#이승만 정권, 측근비리에 몰락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다. 1ㆍ2ㆍ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신문, 협성회회보 주필과 독립협회 활동을 했다.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한 반역 혐의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수감시절 기독교로 개종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재헌 국회의장을 지냈다. 그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50년 6.25전쟁을 치렀고, 60년 2.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으로 자진 하야한다. 하외이로 망명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거기서 서거한다. 

이승만 재임기간 동안 △6.25전쟁 발발 △반민족처벌법 제정 했지만 반민특위 활동 방해 △여수ㆍ순천사건 △경무대 폭파 음모 사건 △김구 피살과 민족진영 재결합의 실패 △사사오입 개헌 △4.19혁명 등에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한다. 

이승만은 △시장경제 체제 도입으로 경제개발 초석 마련△자유민주주의 도입 △남녀 평등 투표권 △사병급여 지급 △초등교육 의무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긍정평가와 △친일파 등용 △장기집권 위해 개헌 △부정선거 △언론탄압 △정치체계 권위주의화 △분단 논리로 반공이념화 등 부정적 견해가 있다.

이승만 시대에 측근 비리 만연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됐다.  1960년 3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린 4.19혁명의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개표 과정에서 이기봉을 부통령에 당선을 시키기 위해 개표 조작이 벌어졌다.

전국적 항의시위가 벌어진다.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3·15 마산 의거가 발생했다. 관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태는 확대된다. 3월 28일 선거부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이승만은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한다.  60년 4월 11일 3·15 부정선거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한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된다.  시체의 왼쪽 눈에서 박힌 최루탄이 확인된다. 이는 부정선거 비판여론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언론을 통해 3·15 마산 의거를 남한에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가 된 폭동이라고 간주하면서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해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를 한다. 중고생과 시민이 동참한 시위를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막는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학생들이 집회를 연다.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군은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  4월 21일과 22일에 이승만은 전직 각료들을 경무대로 불러 상의한다.  23일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에 따른 시민들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24일 4.19 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고 한다. 마침내 26일 하야한다. 

독립운동가이자 계몽가인 이승만의 몰락은 측근 비리에서 시작됐다.  친일파를 기용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켰다.  '반공이념'을 이용해 권력의 장기화ㆍ사유화하는 과정에 측근 비리가 발생했다. 이기붕ㆍ최인규ㆍ이강석ㆍ곽영주 등이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리면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겼다.

이승만 몰락의 주역은 이기붕이다. 이승만 비서 출신인 이기붕은 제3대 국방부장관ㆍ재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권력욕이 강한 이기붕은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과 연계,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웠다. 56년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해 낙선했다. 57년 자신의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킨다. 이후 이승만의 측근과 자유당 내에서 많은 적을 양산한다. 60년 제5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3.15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된다. 4.19혁명이 일어나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그해 4월 28일 아들 이강석은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등을 사살하고 자살한다.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은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양아들로 입적한다.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맞추어 양자로 입적된것.  양자 입적 후 이강석과 관련 추문이 들끓는다. 서울대 법학과에 부정입학한다. 학생들의 반발로 중퇴한다. 육군사관학교(14기)에 또다시 부정입학한다. 소위 임관한다.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이강석의 권력은 막강했다. 대표적인 예가 어느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수 있다. 

이강석은 정치테러와 부정선거로 수많은 국민을 죽게 만든 친아버지 이기붕을 증오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해 민중들이 항거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지 이틀 뒤인 28일, 경무대에 비서가 쓰던 36호실에서 이기붕, 박마리아(母), 이강욱(제)을 권총으로 쏘고 자살한다.

자유당 시절 권력자는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경무관)이다.  이천 출생으로 이정재, 유지광과 더불어 이천 3인방이다. 60년 4.19혁명이 일어나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곽은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학생들에게 발표 명령을 내린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다.  그후 이승만 하야로 제1공화국이 몰락한다. 이승만 사저인 이화장에서 계속 경호업무를 수행하다가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구속된다. 5.16군사정변 이후 혁명군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 판결로 교수형이 집행된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아양 떠는 기술 밖에 없다는 뜻의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 불렀다. 최인규는 4.19 혁명 때 미국의 매카너기 대사가 전달한 미국의 외교문서도 은닉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키웠고 결국 자유당 정권을 몰락시킨다. 

#박정희 평가...극명하게 엇갈려

 

[출처= 뉴시스]
[출처= 뉴시스]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제5·6·7·8·9대 대통령이다.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다.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18년간 장기 집권했다. 10월 26일 궁정동 연회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되면서 권력은 막이 내린다.

박정희에 대한 긍정평가는 △경부고속도로 △서울 지하철 △농촌 현대화 운동(새마을 운동)△중화학 공업 육성△산림녹화 사업△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헀다는 점이다. 반면 부정평가는 △장기집권 △3선 개헌 △유신헌법 △부마항쟁 △민주화탄압 등이 있다.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정은 4.19혁명이 계기가 됐다.  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린 4.19혁명의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개표 과정에서 이기봉을 부통령에 당선을 위해 개표 조작이 벌어진다. 전국적 항의시위가 벌어진다.  4월 11일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한 낚시꾼에 의해 마산 앞바다에서 숨진채로 발견된다. 부정선거 비판여론은 전국적 확대된다.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를 한다. 이는 이승만의 하야로 이루어진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보고 일어섰던 박정희 정권도 타락한다. 1970년 사상계에 발표된 시인 김지하의 <오적>은 박정희 정권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재벌, 국회의원,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으로 빗대어 박정희 정권 시절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비리를 해학적으로 풍자했다.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김지하를 필두로 사상계의 편집진들이 줄줄이 고문을 당했다. 결국 사상계는 강제로 폐간된다. 

최근 영화<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하는 한 인물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폭로를 보면 박정희 정부가 부정부패와 비리가 만연했음을 알수 있다. 

김형욱이 외신과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서 증언한 박정희(정권)에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기업은 수수료, 리베이트, 정치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총투자액의 5%를 강제적으로 징수 당했다. 이 돈은 박정희가 스위스은행에 개설한 비밀구좌에 입금된 후 대외활동자금 등으로 사용됐다.(77년 6월 6일자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

▲서울 지하철 건설은 프랑스와 일본이 경합했다. 일본 측은 기시 전 수상과 야스기 씨가 박정희에게 직접 요청함으로써 공사는 미쓰비시상사에 맡겨졌다. 당시 주일대사였던 이후락 씨가 한일 간의 파이프역을 했다. 미쓰비시상사로부터 리베이트가 기시와 이후락 양쪽으로 건너갔다. 그만큼 서울지하철 공사비는 비싸게 치렀다.(77년 7월 17일, 교토통신과의 회견)

▲박 정권과 일본 자민당간의 '검은 채널'은 김성곤(전 공화당 제정위원장), 이후락, 이병희(전 무임소장관) 등이 그 역을 맡았다. 이병희로부터 자민당의 세이란까이(靑崗會) 멤버에게 선거자금 형식으로 비밀헌금이 여러 번 흘러갔다. 미쓰비시, 미쓰이, 이토쭈, 마루베니 등이 한국 측에 거액의 리베이트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있다.(77년 7월 16일 마이니치신문과의 회견)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보다 빨리 타락했다. 군에만 있던 그들이 사회에 나오면서 권력과 돈에 취했다.  부산의 대표기업인이자 자유당 진영 정치인인 김지태의 부산일보사와 MBC(현 장수장학회 지분)를 강탈한다.  쿠데타 자금을 지원을 거부한 것이 이유였다. 2007년 5월 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부가 정수장학회(옛 부일장학회)재산을 강탈했다고 결론내렸다. 

박정희 정권은 재벌과 기업인들에게 정치자금을 받았다. 공무원, 군인, 정치인 등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선거 떼 부정 선거 자금으로도 활용됐다.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일종의 매수 행위를 한 것이다. 자기 사람을 만드는 데 돈처럼 유용한 건 없다는 판단이 이런 행위를 낳게 한 것”이라며 “채명신 회고록을 보면, 심지어 아들 학자금으로 쓰라고 하면서 이런 봉투를 보냈다고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 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만섭 공화당 전 의원은 생전에 “유신 이후 장기 집권에 따른 권력 심층부의 타락과 부패가 광범위한 민심 이반을 가져왔다”라고 얘기했다.

박정희 시대를 끝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유언을 통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면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를 마음껏 누리십시요. 저는 먼저 갑니다. 지금 이 시간이 명예롭고 보람되고 즐겁다"고 했다.  자유민주주의의 회복과 국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암살을 결심했다는 것.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대부분 역사가들은 "장기집권에 대한 욕심과 부정부패가 불행한 결말을 맺게했다."고 보고 있다. 부정부패에 대한 단죄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저작권자 © 공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