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말로는 전문성 선호, 실제론 오너와의 친분 중요... 학계·법조계·전관 3大 출신성분
-‘6년 연임 제한 규정’ 시행, 기업들 인재난에 혼란... 장기간 놀면서 고액 연봉 수령도 이젠 끝


우리나라에 사외이사제도가 생겨난 것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은 이듬해부터다. 처음엔 상장법인들을 대상으로 도입됐다. 이후 2001년부터 증권거래법상 사외이사제도 운영이 의무화됐다. 대주주와 대표이사로부터 독립된 인사가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해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한다는 취지였다.

어느덧 사외이사제도가 본격적으로 운영된 지 2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여러 논란은 해마다 증폭되고 있다. 사외이사의 전문성이나 독립성은 고질적인 지적사항이다. 관료나 경제계, 법조계 등 힘쓰는 인사를 사외이사로 영입하기 위한 경쟁도 문제다. 주요 그룹 상장사에 사외이사로 있는 유력인사는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이에 〈공정뉴스〉는 대기업 사외이사제도의 현황과 주요 문제점을 짚어보고, 이상적 개선방안에 대해 분석해 본다.

‘6년 연임 제한 규정’ 시행

지난 3월로 주요 기업 주총이 일단락됐다. 이번 주총에선 역대 어느 때보다 사외이사 변동이 많았다. 6년 연임 제한 규정(계열사 9년)이 신설됐기 때문이다. 바뀐 상법 시행령에 따라 한 상장사에서 6년 넘게 사외이사로 재직한 자는 더는 같은 회사 사외이사를 맡을 수 없게 됐다. 이 규정으로 상장사 556개, 718개의 사외이사 자리가 새로 났다. 이 빈자리는 여느 해처럼 권력기관 출신이 대거 꿰찼다.

상장사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상법 시행령 개정안은 법무부가 만들고, 지난 1월 국무회의와 대통령 재가를 거쳤다. 당초 법무부는 재계 혼란을 고려해 시행 시기를 1년 늦추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당정(黨政) 협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올해 강행됐다.

개정된 상법 시행령이 1월 발효되자 3월 주총을 앞둔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기업이 갑자기 신규 사외이사 선임에 나서며 재계에서 한바탕 ‘사외이사 대란’을 겪었다. 일부 기업은 임기가 끝난 사외이사끼리 ‘돌려 막기’에 나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올해 사외이사는 예년과 달라진 점도 있다. 코로나19 여파가 사외이사 선임에도 영향을 끼쳤다. 비상경영에 돌입한 기업이 위기 극복에 꼭 필요한 전문가를 대거 영입한 것이다.

자본시장 변동에 예민한 증권사는 금융 전문가를 주로 선임했다. 미래에셋대우 사외이사를 맡은 이젬마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가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중소기업창조경제확산위원회 위원, 금융위원회 신성장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재무·회계 전문가다.

NH투자증권은 홍석동 전 NH농협증권 부사장과 정태석 전 광주은행장을 새로 모셨다. 이로써 NH투자증권 5명의 사외이사 중 4명이 금융 전문가로 채워졌다. 삼성증권은 장범식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를 새롭게 영입했다. 그는 한국증권학회장 등을 역임한 경제 전문가다.

대기업이 원하는 사외이사는

주요 대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외이사 직업군으로 변호사, 회계사, 업계 이해도가 높은 기업인 출신을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외이사의 역량으로 전문성을 선호한 것이다.

지난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자산총액 기준 상위 200대 상장기업(비금융업 분야)을 대상으로 '사외이사제도'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 기업(70개)의 51.4%는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를 원했다. '의사결정 및 감시·감독의 독립성'이 중요하다고 답변한 기업은 48.6%였다.

사외이사가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역량은 관련 사업에 대한 이해도, 지식 등 '전문성'이라고 답했다. 자산 2조원 이상인 기업에서 전문성이 중요하다고 답변한 비율은 54.2%, 2조원 미만 기업들은 50%였다. 전경련은 "기업규모가 클수록 관련 사업이 많고, 복잡해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더 많이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사외이사 선호직업군으로는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등 전문 자격증 보유자(41.4%)를 가장 선호했다. 이어 기업인(28.7%), 교수(16.1%) 등 순이었다. 관료를 원한 비율은 13.8%로 가장 낮았다.

기업은 전관을 좋아해

 


국내 주요 그룹 계열사의 사외이사 3명 가운데 1명 이상은 관료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는 상장 계열사가 있는 57개 대기업집단 계열사(267곳) 사외이사 이력을 전수 조사한 결과, 전체 857명 가운데 관료 출신이 321명, 37.4%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1년 전의 39%보다는 1.6%포인트 낮아졌지만, 여전히 전체의 3분의 1을 넘었다. 학계 출신이 32.8%(282명)로 뒤를 이었다. 이어 재계 17.9%(154명), 언론계 3.1%(27명), 변호사 2.9%(25명), 공공기관 2.1%(18명), 정계 0.2%(2명) 순이었다.

특히 관료 출신 가운데 전직 판·검사가 102명으로 31.8%를 기록했다. 이어 세무 공무원 출신이 14.6%(47명), 청와대 8.7%(28명), 금융위·금융감독원 8.4%(27명), 공정위 7.8%(25명) 출신 등으로 나타났다.

그룹별로는 영풍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중이 64.3%로 가장 높았다. DB와 두산, 신세계, 현대백화점, GS, 하림, 롯데, CJ, 유진, 현대중공업, 한진 등 모두 12개 그룹이 계열사 사외이사 절반 이상을 관료 출신으로 꾸린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의 경우 전체 59명의 계열사 사외이사 가운데 관료 출신이 24명(40.7%)이었다.

관료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는 대기업집단은 한국투자금융과 하이트진로, 한국타이어 등 3곳뿐이었다.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 등을 지낸 최고위급 출신도 대기업 사외이사에 대거 포진해 있다. 이귀남(69·12기) 전 법무장관은 기아자동차, 이창재(55·19기) 전 법무차관은 삼성생명, 김준규(65·11기) 전 검찰총장은 현대글로비스, 김진태(68·14기) 전 검찰총장은 GS, 이재원(62·14기) 전 법제처장은 롯데쇼핑 사외이사로 활동 중이다. 또한 김홍일(64·15기) 전 대검 중수부장은 오리온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다.

권력기관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의 사외이사 영입도 두드러진다. 특히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기획재정부와 '재계의 검찰'로 통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고위직을 모셔가려는 기업들이 많다.

GS는 현오석 전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를, 현대중공업은 권오규 전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를 각각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현대차그룹은 공정위 사무처장 출신들을 선호하는 모습이다. 현대차는 이동규 전 공정위 사무처장을 사외이사로 재선임 했고, 기아차는 한철수 전 공정위 사무처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현대글로비스는 이동훈 전 공정위 사무처장을 사외이사로 재선임 했다.

법조계도 기업들의 주요 영입대상이다. 한화생명은 김경한 전 법무부 장관을 재선임 했고, 롯데푸드는 송찬엽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롯데케미칼은 박용석 전 대검찰청 차장을, 롯데정밀화학은 변동걸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을 각각 재선임 했다.

대기업 사외이사를 지낸 한 변호사는 "전관 출신 사외이사가 후배 판·검사들에게 직접 전화 걸어 청탁하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은 현실에 없다"면서도, "대기업들은 고위직 출신의 간판급 사외이사를 일종의 '위세재(Prestige goods, 위신 세우기 위해 과시적으로 소유하는 재화)'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후광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내심 이들이 '외풍'을 막아줄 '방패' 역할 뿐 아니라 정부 핵심인사와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처럼 정부가 자신들의 집권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강제로 꽂아넣기 보다는 해당 기업에서 방패로 이들을 영입해 활용하려는 측면이 강한 게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사외이사 선임 스펙

과연 대기업의 사외이사에는 누가 선임될까. ‘이코노미조선’이 국내 30대 그룹 지주회사와 주력 계열사 39곳의 사외이사 169명을 집중 분석했다. 이번 조사는 2018년 사업보고서를 기준으로 했다.

30대 그룹 지주회사, 주력 계열사의 사외이사 특징은 ‘64세의 서울대 경제·경영학과 교수, 고위 관료’ 출신으로 요약된다. 학교별로 분류하면 서울대가 15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고려대·서강대가 4명, 연세대·성균관대가 3명이다. 이외에도 중앙대·이화여대(2명)를 비롯해 카이스트, 경희대, 한양대, 국민대, 서울시립대 등 다양한 대학에 분포돼 있다.

사외이사로 교수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은 교수들이 정부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관련 정부 위원회나 학회, 관련 기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기업의 미래 성장과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수의 사외이사 영입은 이사회의 신뢰성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된다. 유명 대학의 유명 교수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면 기업과 이사회의 신뢰도와 함께 정책 결정의 정당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사외이사로 선임된 교수들의 전공 분야는 경제·경영이 대다수였다. 법률·공학 등은 소수에 불과해 견제 장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힘든 구조라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경제·경영학과 교수들이라도 그들에게 기업 경영에 대한 전문성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전직 고위 관리 모시기’ 행태도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경제민주화 추세에 따른 경영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고위 관료 출신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대기업 지주회사와 주력 계열사들은 대부분 1~3명 정도의 전직 관료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롯데쇼핑·효성·미래에셋대우는 각각 3명의 고위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두고 있다. 오너가 재판 중이거나 정부 영향을 많이 받는 기업들은 전직 관료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경우가 많다.

효성그룹의 경우,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손영래 전 국세청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손병두 전 KBS 이사장 등 막강한 사외이사진을 구축하고 있다.

대기업 지주사 중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단 한 명도 없는 곳은 LS와 에쓰오일, 대우조선해양, 한국투자금융 등 4곳이었다.

169명의 사외이사 중 대형 법무법인(로펌) 출신 변호사와 고문도 13.7%(23명)에 달했다. 가장 많은 사외이사가 활동하고 있는 법무법인은 김앤장(8명)이다. 태평양(4명), 율촌·화우(각각 3명)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현직 로펌의 고문으로 고위 공직자 출신이란 점도 공통점이다. 사실상 대관업무 목적으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소수이긴 하지만 전문경영인 출신 사외이사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로는 김신배 포스코 사외이사가 꼽힌다. SK텔레콤 사장과 SK그룹 부회장을 역임한 김신배 이사는 지난해 서울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포스코 주총에서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오너와의 인연 중요

아모레퍼시픽그룹은 2017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신모 교수를 사외이사로 재선임 했다. 신 교수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아모레퍼시픽그룹 자회사인 태평양제약(현 에스트라) 사외이사를 역임했다. 2013년부턴 아모레퍼시픽그룹 사외이사로 활동 했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신 교수에 대해 “장기간 사외이사로 활동할 경우 지배주주 및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신 교수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과 대학 동문이다. 이사회에서 동문이 사내이사와 사외이사로 활동할 경우 사외이사의 독립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GS홈쇼핑, OCI, 세아베스틸 같은 회사는 오너 일가와 고교·대학 동창인 인물을 사외이사로 앉혔다. 회사의 미래를 설계하고 건전한 토론이 있어야 할 이사회가 ‘오너 일가의 동문회’로 전락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력의 다양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기업들의 사외이사 구성은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 20여 년 전보다 다양해졌다. 작가와 소설가는 물론 연예인까지 사외이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직 비중은 낮지만 여성의 사외이사 참여도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 특이한 경력을 가진 사외이사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유시민 씨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회의원 등을 거친 그의 현재 직업은 작가다. 그는 2017년 3월 보해양조 사외이사로 선임돼 지난 3월 24일까지 활동 했다.

보해양조가 유 작가를 선임한 배경은 '다양성'이다. 기업과 사회 간 소통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만큼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분야를 두루 거친 그의 조언을 경영에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언론인 출신 사외이사도 눈에 띈다. 포스코 사외이사인 김주현 파이낸셜뉴스 대표는 2018년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조현재 광주대 초빙교수는 SK하이닉스의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조 씨는 매일경제신문 편집국장과 MBN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여성의 사외이사 진출도 시작됐다. 삼성전자는 첫 여성 법제처장을 지낸 김선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신미남 전 두산퓨얼셀 사장(에쓰오일)과 최명희 한국내부통제평가원 부원장(KB금융) 등도 눈에 띄는 여성 사외이사들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사외이사의 다양성을 끌어올려 경영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라며 "다만, 구색 맞추기 식의 다양성 제고로 치우쳐 전문성이 희생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사외이사 이모저모

대기업집단의 사외이사 비중이 4년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2019년 대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발표`에 따르면 대기업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중은 51.3%(810명)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인 250개 상장회사가 상법·금융회사 지배구조법 등에 따라 의무적으로 선임해야 하는 사외이사는 725명이다. 그런데 이를 85명 초과해 선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외이사의 평균나이는 64.3세였다. 연령별로 보면 60대가 100명으로 가장 많았고, 50대(33명), 70대(30명), 40대(5명), 80대(1명) 순이었다.

에쓰오일의 사외이사인 이승원 전 국제스키연맹 집행위원이 1932년생으로 최고령자였다. 이 이사는 에쓰오일의 전신인 쌍용정유의 회장을 역임했다. 가장 나이 어린 사외이사는 교보생명보험의 하라 라잔(1977년생) 이사였다. 하라 라잔 이사는 교보생명의 외국계 대주주인 미국 PEF 코세어캐피털 측에서 요청한 인사다.

유리천장은 여전했다. 169명의 사외이사 중 여성은 5명에 불과했다. 국내 기업의 여성 사외이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최고의 노후 보장

‘평균 연봉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 이상, 근무내용은 1년에 10여 차례 2시간 안팎 회의 참가(불출석해도 별도 제재조치 없음, 단 참석해 반대의견 낼 경우 연임 불가 우려 있음), 고가 건강검진 제공, 출근(회의 참석)시 기사 딸린 승용차 제공 가능.’ 이런 믿기 힘든 ‘신의 직장’이 또 있을까? 대한민국 상장기업 사외이사의 현주소다.

이른바 전관예우와 거수기, 낙하산, 로비스트, 자격 논란 등 사외이사를 둘러싼 잡음은 끝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들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처우다. 하는 일에 비해 누리는 게 너무 많다.

기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사외이사들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하면서 1년에 수천만 원의 보수를 받아간다. 고액 보수는 기본이고, 본인은 물론 배우자까지 고액 건강검진 혜택이 주어지기도 한다. 거마비를 별도로 주는 곳도 적지 않다.

금융지주사 사외이사를 역임한 한 금융권 출신 인사는 "사외이사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골프를 치며 보냈고, 1~2달에 한 번 이사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높은 급여와 이사회 때 지급되는 교통비와 식비, 사외이사라는 직함까지 고려하면 '명함이 있는 노후'를 보장받기엔 이만한 직업이 없다는 것이다.

현행 상법상 상장사 사외이사는 최대 2곳까지 등기임원(이사·감사 및 집행임원) 겸직이 가능하다. 은퇴 후 상장사 2곳의 사외이사를 겸직하면 비상근 근무만으로도 상당한 연봉을 받을 수 있다.

통상 대기업 사외이사 급여는 월 300만~500만원 수준이다. 대기업 2곳의 사외이사를 겸직한다면 은퇴 후 억대 연봉이 가능하다. 때문에 사외이사는 정치권과 재계, 금융권 통틀어 은퇴 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생 3모작 직업'으로 꼽힌다.

현직자에게도 사외이사는 매력적인 부업이다. 근무 시간이 짧은 반면 높은 보수가 주어지고, '사외이사' 자체가 경력이 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카카오뱅크 사외이사 6인의 2017년 평균 업무시간은 27시간에 불과한데, 기본급은 2216만원을 받았다. 시간당 급여가 100만원에 육박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기업별 사외이사 주안점

삼성전자는 2016년부터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강조해오고 있다. 그해 말 주주가치 제고방안을 발표하면서 글로벌 기업 CEO 출신 사외이사 영입 계획을 밝혔다.

우선 삼성전자는 2018년 주주총회에서 김종훈 키스위 모바일 회장을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김 회장은 미국 벨연구소 최연소 사장 출신이다. 그는 미국에서 통신장비 업체 유리시스템즈를 설립, 1조1000억 원에 매각한 벤처 신화의 주인공이다.

또한, 삼성전자는 여성 최초 법제처장을 지낸 김선욱 전 이화여대 총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는데, 삼성전자 이사회에서 외국인과 여성 사외이사가 동시에 활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 계열사인 삼성물산도 같은 해 주주총회에서 제너럴일렉트릭(GE)의 최고생산성책임자를 역임한 필립 코쉐 씨를 사외이사로 영입해 눈길을 끌었다. 또 삼성 주요 계열사는 2016년 초 정관 개정을 통해 대표이사 외 이사들 중에서도 이사회 의장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 대표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거버넌스 개선 작업이다.

현대차그룹의 새로운 사외이사 운영 계획은 주주가치 제고에 방점이 찍힌다. 현대차그룹은 2018년, 그룹사 투명경영위원회의 주주권익보호담당 사외이사 후보를 국내·외 일반 주주들로부터 공모했다.

주주권익보호담당 사외이사는 주주 관점에서 의견을 적극 제기하고, 국내·외 주요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거버넌스 NDR(거래를 수반하지 않는 투자 설명회)에 참석, 이사회와 주주 간 소통을 담당한다. 현대글로비스가 같은 해 주주총회에서 길재욱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를 주주권익보호담당 사외이사에 선임한 것이 그 시작이다.

SK㈜는 사외이사의 독립성 보장과 견제 기능 강화를 위해 선임사외이사 제도를 신설했다. 선임사외이사는 사외이사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하며, 사외이사를 대표한다.

또한 SK㈜는 2016년 사외이사로만 구성된 거버넌스위원회를 만들어 지배구조 선진화를 실천하고 있다. 선임사외이사제도 신설을 통해 주주권익보호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이밖에 사외이사 중 1인이 주주소통위원을 맡아 주주 및 이해관계자와의 소통 강화와 권익 보호 활동을 한다. SK㈜는 2018년 열린 이사회에서 이 같은 제도가 담긴 '기업지배구조헌장'을 제정했는데, 대기업 지주사 중 최초의 시도로 평가됐다.

정성엽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기업들이 과거 법률요건을 충족하는 수준에 그치던 사외이사 운영 방안에서 진일보한 것"이라며 "각 기업별로 새 제도가 마련된 만큼 실질적 운영이 이뤄지는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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