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배임·탈세 ~ 맷값폭행·아들 보복폭행... 갑질, 사건사고 ‘가지가지’... 법은 재벌 편
-국민, 67% 재벌 “꼴보기 싫어”... 50% 정부 “재벌개혁 강력히 추진해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생애 최후의 대작 <법률> 5권에서 한 나라의 최고소득자가 얻는 소득이 최저소득자에 비해 4배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초과분은 국가에 환수하거나,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의 주장은 다분히 당시 도시국가 수준에 어울리는 것이다. 2400년이 지난 오늘날은 모든 것이 비할 바 없이 복잡해졌다.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과도한 격차는 국가의 가장 큰 질환인 불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플라톤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실로 지금 한국사회도 심각한 소득격차와 양극화가 국가경제를 더 어렵게 하고 있다. 따라서 그 격차를 해소하거나 줄이는 것이 한국사회의 안정과 건실한 경제발전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 이에 공정뉴스는 재벌총수들의 연봉 수준과 그것이 우리 사회에 적합한지를 살펴본다.

 

#재벌총수, 화려한 재판 역사
 

故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 재벌총수 중 역대 최고구형 보유자이다.
故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 재벌총수 중 역대 최고구형 보유자이다.

 

재판에 넘겨진 재벌총수 가운데 가장 높은 구형량을 기록한 것은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이다. 1997, 검찰은 정 전 회장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혐의는 비리, 불법정치자금지원 등 8가지에 달했다. 법원은 이보다 낮은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2002년 말 대장암 진단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은 정 전 회장 다음으로 가장 높은 15년을 각각 구형받았다. 김 전 회장은 21조 원대에 달하는 분식회계와 10조에 가까운 사기대출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현 전 회장은 13000억 원의 사기성 기업어음 발행 혐의로 기소됐다. 김 전 회장은 징역 86개월에 추징금 179253억 원, 벌금 1000만원을, 현 전 회장은 징역 7년을 각각 확정판결 받았다.

재계 1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90년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외로 처음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2008년엔 편법증여, 배임 및 탈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두 차례 재판에서 이 회장은 모두 법정구속을 피했다.

노 전 대통령 관련 재판 당시, 이 회장을 비롯해 김우중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등 거물급 재벌총수 8명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재판에서 이 회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최원석 회장(징역 26개월), 김우중 회장,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정태수 총회장(각 징역 2)에겐 실형이 선고됐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징역 16개월, 집행유예 2), 이준용 전 대림산업 회장, 이건 전 대호건설 회장(각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2008년 에버랜드 관련 재판을 시작한 이 회장은 2009년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 벌금 1100억 원을 확정판결 받았다.

2006년 구속 기소된 재계 2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2008년 징역 3, 집행유예 5년에 사회봉사 300시간을 선고받았다. 현대차, 현대모비스 등 계열사를 이용해 비자금 1034억 원을 조성하고, 회삿돈 900여억 원을 횡령한 혐의다.

서울고등법원이 재산 많은 사람은 재산으로 사회에 공헌하면 된다는 논리로 사재 출연, 준법경영 강연, 신문 기고 등을 사회봉사로 허용하려 했다가 거센 비판을 불렀다. 대법원이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해 자연보호·환경보호·복지시설 봉사명령으로 수정했다. 정 회장은 형 확정 후 2개월13일 만인 2008815일 광복절 사면대상에 포함돼 사면됐다.

재계 3위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두 차례 구속된 적이 있다. 200315000억 원대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최 회장은 2008년 대법원에서 징역 3,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된 후 8·15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2012년에는 동생 최재원 SK 수석부회장과 함께 그룹 계열사 자금을 펀드 출자하는 방식으로 636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징역 4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27개월 뒤 재차 8·15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재계 7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1993650만 달러 상당 불법 외화유출로 징역 1,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면서 맺은 검찰과의 인연을 2014년까지 이어갔다. 2007년 파문을 일으킨 차남 보복폭행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비자금 조성, 부실계열사 부당지원 등으로 징역 5, 벌금 50억 원, 집행유예 5, 사회봉사 300시간 등을 선고받았다.

한화그룹 계열사들이 부실 위장계열사인 한유통·웰롭·부평판지에 담보 없이 거액 자금을 지원한 혐의가 재판에서 인정됐다. 모친 요청으로 계열사가 보유한 동일석유 주식을 저가에 누나에게 양도한 행위도 배임으로 인정돼 유죄를 선고받았다.

재계 14위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조세포탈, 횡령·배임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후 2014년 징역 4, 벌금 260억 원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후 파기환송심을 통해 징역 26개월, 벌금 252억 원을 확정판결 받았다. 수감생활 중 건강이 나빠져 형 집행이 수차례 정지됐는데, 2016년 광복절 특별 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재계 15위 두산그룹 총수일가도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박용성·박용오·박용만 전 회장 등은 계열사를 통한 부외자금 조성, 두산건설 자금횡령 및 분식회계 등 혐의로 각각 징역 3, 집행유예 4~5, 벌금 40~80억 원을 선고받았다. 매출액을 부풀려 차액을 챙기거나 분식회계를 공모한 점 등이 인정됐다.

박용성·박용만 전 회장은 20072월 설 특별사면에 포함돼 자유의 몸이 됐다. 6개월27일 만의 특별사면이어서 논란거리가 됐다.

#재벌 갑질, 법마저 외면 피해자만 억울

재벌총수 일가의 '권력형 추태'는 한두 번이 아니다.

기내 땅콩서비스 방식이 매뉴얼과 다르다며 비행기를 돌려세우는 재벌 자녀도 있었다.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사용하거나, 끼어들기를 허용한다며 욕설과 폭언을 일삼는 사장도 있었다. 술자리에서 종업원을 때리거나, 업무상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변호사에게 막말과 폭력을 일삼는 재벌 3세도 있었다.

이런 재벌의 갑질은 법으로 단죄할 수 있을까. 즉답 대신 최근 발생한 재벌 갑질 사건의 재판 결과를 살펴보는 편이 낫겠다.

·야구방망이 맷값 폭행 사건(야구방망이 1대에 맷값 1백만 원씩, 2천만 원)
 

최철원 전 M&M 사장. 재벌 폭행사의 한 획을 그었다.
최철원 전 M&M 사장. 재벌 폭행사의 한 획을 그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2009'야구방망이 맷값 폭행' 사건은 그 자체로 충격이다. 최철원(당시 M&M 대표)씨는 회사 인수합병과정에서 계약을 해지 당한 화물노동자 A씨가 고용승계와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자 그를 불렀다. 최 씨는 직원들을 도열시킨 채 2천만 원을 주는 대가로 A씨를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등 무차별 폭행을 했다. A씨가 고통을 호소하며 용서를 빌기까지 했으나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A씨의 폭로로 뒤늦게 알려진 이 사건으로 최 씨는 법정에 섰다. 그는 '군대의 '빳다' 정도로 생각하고 훈육한 것'이라며 황당한 주장을 폈다. 하지만 1심 서울중앙지법은 "피해자가 나이가 11살이나 많고, 피고인으로부터 훈육을 받을 지위에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적절하지 아니하다"면서, 이 사건을 "우월적인 지위와 다수인을 내세운 사적보복"으로 규정, 갑질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1심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집단 흉기 등 폭행)을 적용, 징역 1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최 씨의 다른 폭행사건이 더해져 나온 재판결과였다. 하지만, 최 씨의 수감생활은 길지 않았다. 두 달 뒤 항소심은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면서 깊이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다. 어쨌거나 이 판결은 "세상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우쳐 준 사건이다.

·김승연 회장, 아들 보복 폭행 사건


 

김승연 한회그룹 회장. 아들들과 함께 재벌 사건사고의 단골손님이다.
김승연 한회그룹 회장. 아들들과 함께 재벌 사건사고의 단골손님이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도 직접 쇠파이프를 들었다가 콩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는 2007년 자신의 차남 김동원 씨가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종업원들에게 폭행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분노한 김 회장은 즉시 경호원과 조폭들을 대동하고 보복에 나선다.

그는 한밤중, 폭행에 관여한 사람들을 청계산으로 불러 쇠파이프로 직접 응징하기까지 했다. 당한 아들에게 복수할 기회도 제공했다. 재벌 아들을 몰라보고 주먹을 휘둘렀다가 호되게 당한 피해자들은 무려 9.

1심 형량은 징역 16개월. 법원은 "사회적 지위와 재력 및 회사조직을 사적 보복에 악용한 범죄로서 사인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 회장에겐 항소심이 있었다. 피해자가 9명이나 되는데도 항소심은 '중상을 입은 사람이 없고, 모두가 합의한 점'을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폭력전과가 없고, 반성한 점도 높이 샀다.

법원은 "재벌그룹 회장인 피고에게 요구되는 준법정신 등을 함께 고려해 보면 그에 상응한 형사처벌이 이뤄져야 하는 범죄행위임이 분명하다"면서도, "아버지로서 부정이 앞선 나머지 사리분별력을 잃고 범행에 이르게 됐다고 석방한다.

이 사건은 재벌의 갑질로 분류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재벌 회장 정도의 스케일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사건임은 틀림없다. 경찰보다 빠르고 강력하게 '폭력범'을 응징한 재벌 회장, 감탄사만 나온다. 보통사람들은 자식이 맞으면 달래거나, 고작해야 형사고소나 민사소송으로 국가의 힘을 빌릴 뿐인데.

법원의 재판으로 재벌의 갑질을 단죄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법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좁고, 실제 사건까지 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재판은 기소된 사실만 갖고 판단하는 한계가 있다. 대개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나는 것만 처벌할 수밖에 없다.

또한, 갑질 중 형법상 범죄가 되지 않는 행위가 더 많다. 이를테면 명백한 폭행과 추행, 강요와 같은 범죄가 아닌 일상의 부당한 지시, 인격모독, 정신적 피해 등은 입증하기도 어렵다. 처벌은 더더욱 쉽지 않다. 사법절차가 진행되더라도 피해자는 생계와 인사 상 불이익 등을 감수해야 하는데, 법은 의외로 무기력하다. 기소되지 않은 불법과 드러나지 않는 갑질은 단죄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갑질이 단죄되기 어려운 이유는 더 있다. 재벌의 갑질에 법원이 상당히 관대한 편이기 때문이다. 사례에서 보았듯이 벌금형이 선고되거나, 1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되더라도 2심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풀어주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 법원이 가진 자의 편이라는 오해를 사기 딱 좋다. 배려가 필요한 사람은 갑질 재벌이 아니라 피해자들이다. 법원이 명심했으면 한다.

#국민, “재벌 문제 많다

우리나라 국민 3명 중 2명은 재벌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지난해 연합뉴스가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재벌 및 재벌개혁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 밝혀진 것이다. 이번 조사는 전국의 19세 이상 남녀 117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 방식으로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재벌에 대한 현재 인식을 묻는 말에 3명 중 2명 이상 꼴인 66.9%'부정적'이라고 대답했다. '긍정적'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27.5%에 불과했다. 재벌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는 부정적이었다'고 응답한 비율도 63.4%로 긍정(31.0%)보다 높았다. 예전과 현재 모두 10명 중 6명 이상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이유를 묻는 말에 '정경유착'이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전체의 25.7%로 가장 많았다. '편법 승계'(23.6%), '갑질 행태'(18.9%), '불공정 거래'(18.1%), '독단 경영'(7.3%) 등을 꼽은 응답자도 있었다.

실제로 재벌의 경영권 세습과 관련해 총수와 전문경영인 중 기업경영에 누가 더 적합한지를 물어본 결과,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인 82.3%가 전문경영인을 꼽았다. 반면 총수 경영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응답자는 13.1%에 그쳤다. '모름·무응답'4.6%로 집계됐다.

갑질 행태에 대한 질문에도 국민 대다수가 심각하다고 인식했다. 한국 재벌 일가의 갑질 행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4.7%'매우 심각함'이라고 답했다. 33.1%'다소 심각함'이라고 답해 10명 중 9명이 심각하다고 여겼다. 갑질 행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응답은 11.4%(전혀 심각하지 않음 2.8%, 별로 심각하지 않음 8.6%)에 불과했다.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은 재벌이 한국경제의 불균형을 야기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벌이 한국경제를 불균형하고, 불평등하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에 공감 여부를 물어본 결과, 예전에는 '공감' 비율이 61.0%, '비공감' 비율은 37.6%였다. 현재는 '공감'3.4% 증가한 64.4%, '비공감'34.2%로 집계됐다.

또한, 재벌이 국내 소비자를 차별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지를 물어본 결과 '공감'78.4%(매우 공감 39.2%, 다소 공감 39.2)'비공감'(20.8%)3배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이 수익을 사회로 환원하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 응답자도 79.4%에 달했다.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 응답자는 17.2%에 그쳤다.

이에 따라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은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벌개혁에 대한 질문에 '매우 필요함'이란 응답(52.6%)이 절반을 넘었다. '다소 필요함'33.5%86.1%가 필요성을 인식했다. 반면 '불필요' 응답은 13.4%였다.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응답자를 대상으로 가장 먼저 추진해야 할 재벌개혁 과제를 물어본 결과 1위는 '정경유착 근절'(27.4%)로 조사됐다. 이어 '기업의 소유·지배구조 개선'(24.5%), '불법 가업 승계 금지'(18.5%), '불공정 거래 근절'(17.7%), '재벌 일가 전횡 방지'(9.2%) 등의 순이었다.

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한 질문에는 과반인 56.0%'현재보다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응답해 재벌개혁 요구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현재보다 약하게 추진해야 한다'(20.4%), '현재처럼 하면 된다'(18.8%)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국민 과반은 현 정부의 경제 민주화 정책을 보다 강하게 추진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경제주체 간의 정의로운 소득 분배와 공정한 경쟁 등 현 정부에서 실시하는 경제 민주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2.9%'현재보다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답해 '현재보다 약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21.9%)2배 이상이었다. '현재처럼 하면 된다'는 응답도 20.0%로 집계됐다.

#재벌은 왜 혐오 대상이 됐는가...

과거 재벌이 국민의 존경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여론조사에서 재벌 총수의 이름은 존경의 대상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상황이 변했다. 재벌이나 재벌 총수에 대해 존경심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최근에는 그런 여론조사 자체가 아예 사라지기도 했다. 재벌이나 재벌 총수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재벌은 한국경제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재벌은 자본 불모지의 척박한 한국경제를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으로 이끈 주역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때문에 재벌이나 재벌 총수들이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과실을 저질러도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너그러이 보아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재벌의 조그만 잘못에도 여론은 매섭게 뭇매를 친다.

혹자는 가진 자에 대한 질투심이라고 폄훼하지만 재벌에 대한 국민 인식이 바뀐 배경을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재벌이 한국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벌에 대한 인식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거시적인 경제성장과 국민이 느끼는 미시적 체감경제의 괴리감이 커진 때문이다. 경제는 성장했는데 서민의 삶은 팍팍해졌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은 그 이유를 성장의 과실이 상위층에 집중된 때문이라고 믿는다. 국세청의 2017년 기준 종합소득 통계를 보면 최상위 5% 계층이 벌어들인 순소득이 전체의 44%를 차지했다. 최상위 계층은 재벌이라는 인식이 반재벌 정서의 출발점이다.

과도하게 이익추구에 매몰된 재벌의 우월적 경영방식도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진 배경이다. 한국의 경제 시스템은 대기업을 정점으로 중소기업과 소상인이 수직관계로 연결돼 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용역과 서비스를 납품하고, 소상인은 대기업의 제품을 가져다 파는 구조다. 그런데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2018년 대기업 이익률은 8%대인 반면, 중소기업은 4%, 소상인은 2%대에 불과하다.

중소기업과 소상인이 챙겨야 할 이익이 대기업으로 넘어간 셈이다. 대기업들은 시장 개척과 기술 개발을 주도하니 이익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이익집중은 풀뿌리 경제를 초토화시켜 결국 대기업의 생존 가능성도 보장하기 어렵게 했다.

아울러 재벌 총수나 일가족의 일탈행위가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만든 이유다. 창업세대에서 승계세대로 넘어가면서 벌어진 일탈행위는 사회적 반감을 더욱 증폭시킨 기폭제로 작용했다. 국민은 재벌의 창업세대가 한국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승계세대에 대해서는 부모 잘 만나서 혜택을 입은 금수저라는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승계세대의 일탈행위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보통사람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그들을 단죄하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이유다.

결국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시대감정의 변화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 재벌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문제점을 알면 해법도 찾아낼 수 있다. 재벌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건강한 성장을 하려면 재벌 스스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지 모색해야 한다.

대부분의 재벌이 차세대로 승계하는 시기에 와있다. 환골탈태의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재벌의 미래는 장담하기 힘들다. 지난해 재벌 총수가 쓸쓸히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현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재벌의 변화가 절실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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