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 군부독재 70여 년 좌파운동 성지 역할... 학생, 교사 중심
-박정희 정권, 인혁당 간첩조작사건... 대구 진보성 싹 자르기 → 보수화 고착

 

왜 영남의 정치는 이토록 무기력해졌을까? 근현대사를 보면 엄청나게 폭발적인 정서와 활동력을 가진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뭐가 두려워서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정치인이나 정당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전통, 조직이나 단체 등등을 살펴야 한다.

어떤 지역의 정서가 진보적이나 보수적이라는 말, 정당득표율로는 그 지역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더군다나 정치를 논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어떤 사건이나 원인이 그 지역을 보수/진보적으로 만들었는가? 어떤 세력들이 지역의 의사결정과정이나 논의과정을 주도하는가? 그 지역의 독특한 정치문화가 존재하는가? 지역민들이 자기 지역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역사에 관해 알 방법은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난 뒤에 어떤 정치적인 '판단'이 가능하고,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에 공정뉴스는 영남의 쌍두마차인 대구와 부산이 진보에서 보수의 성지로 변해가는 원인과 과정을 분석해 본다.


대구, ‘진보의 토양

대구는 항쟁의 도시였다. 1907년 차관 1300만원을 강제로 제공해 대한제국을 경제 속국으로 삼으려던 일제에 맞선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중앙로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엔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던 지역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대구에 좌파들이 많았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먼저 협소한 농경지 탓에 대지주 계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찌감치 자영농 등 자립적 경제주체들이 형성됐다. 일제는 대지주·양반 계층을 식민지배의 하위 파트너로 삼았는데, 대구 지역은 이런 흐름에서 한발 비켜 있었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안동 김씨 등 서울로 올라가서 정치의 주류가 된 양반과 안동에 남아 있던 안동 김씨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이미 중앙 정치 무대에서 제외돼 일제에 비타협적인 특성을 가졌다. 초기 사회주의자 가운데 이런 양반 출신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다음 이유는 일제 때 신교육기관이 경성, 평양, 대구에 생기면서 남쪽 지역에 신문물 흡수와 젊은 지식인 계층 성장이 대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학생운동의 맥이 대구에서 퍼져, 좌파 형성으로 이어진 셈이다.

마지막 이유는 대구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점령지가 아니어서 대대적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0월 항쟁 직후 대구 민중운동사를 연구한 김상숙 박사는 대구는 인민군 점령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뒤 부역자 학살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덕에 진보적 역량과 기풍이 보존될 수 있었다. 또한 4·19 혁명 등의 전후 진보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구, ‘남한의 모스크바
 

 

한때 정치적으로 남한의 모스크바라 불리며 남한 진보 운동의 중추구실을 했던 대구. 지금은 수구보수의 아성으로 변한 대구가 사실 반세기 전에는 진보운동의 핵이었다는 이 놀라운 아이러니.

해방정국이던 4610월 초에 일어난 ‘10월 인민항쟁은 마치 80년 광주항쟁을 연상시킬 정도의 민중 봉기였다. ‘10월 인민항쟁당시 인민들의 정치적 요구는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문제가 주였다. 당시 미군정은 식량정책에 실패하고, 설상사상으로 친일파를 재등용 하는 무리수를 뒀다.

그러던 중 '9.23총파업'이 계기가 돼, 101일의 기아행진을 비롯한 노동자와 민중들의 집회가 일어났다.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중들이 폭발했다. ‘10월 항쟁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 봉기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대구경찰서 등을 점거하고 무장해제 시키면서 대구를 해방구로 만들어버렸다. (박근혜의 큰아버지 박상희가 대구에서 봉기를 조직하다가 사살됐다)

사실 이 사건은 그동안 수구세력에 의해 왜곡돼 그 의미가 축소된 채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사의 공간에서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룬 사건임에 분명하다. 당시 ‘10월 인민항쟁의 기운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싹을 내렸다. 이후 48년의 제주 4.3항쟁과 그 해 10월 여순 항쟁으로 이어지게 됐으니 말이다.

진보성의 뿌리는 제도 정치 공간에서도 꽃을 피웠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대표적이다.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과의 양자 대결에서 자유당 이승만은 전국 70%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현직 대통령과 맞붙은 진보 후보 조봉암은 전국 30% 득표에 머물렀다. 그 조봉암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지역이 바로 대구였다. 대구는 강화도 출신의 진보 인사 조봉암 에게 무려 72.3%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런 민중들의 저항 정신은 물밑에서부터 서서히 싹을 틔워간 것이다. 그 기운은 이승만 정권말기에 다시 분출하게 된다. 바로 이승만 독재정권의 경제파탄, 부정부패, 불법적 집권연장음모에 맞서 온 민중이 저항운동에 나선 ‘4.19’가 그것이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집권연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하지만,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960228일 야당 후보의 선거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학교에 등교령을 내리자 대구 지역 학생들이 학교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며 시위를 벌였다. 대구 2.28 학생의거를 시작으로 3.15 마산항쟁이 일어났다.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돼 419일 정점에 다다랐다. 마침내 426일 이승만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됐다.

역사는 이때부터 다음해 5.16 군사쿠데타까지의 약 1년간을 ‘4월 혁명의 공간으로 기록한다. 4월 혁명은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학생, 도시화과정에서 성장한 시민사회, 새로운 권력으로서의 언론과 민족민주운동역량과의 결속에 의해 가능했다. 이러한 조건을 가장 잘 갖춘 곳이 대구였다. 대구는 ‘4월 혁명의 공간에서 전국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당시 대중운동의 중심은 피학살자유족회, 경북교원노조, 고등학생조직 등이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경북교원노조는 전국교사운동의 실질적 중심이었다. 대구시 초중고교 교사 조직률이 90%(37백 명)에 달했다 할 정도로 교사들의 역할이 막대했다. 그것은 고등학생조직들이 당시 운동에 큰 역할을 한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경북교원노조는 현재로 치면 전교조와 같은 조직일 텐데, 조직률 면에서나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력 면에서나 지금의 전교조와는 그 위치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지금과는 격이 달랐던 당시의 <매일신문>, <영남일보> 등과 같은 진보적 언론 노조의 활발한 활동도 민중들에게 혁명의 기운을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실로 교육과 언론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입증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진보 보수 터닝 포인트, ‘인혁당 간첩조작사건

 

 

60, 70년대 박정희독재에 대한 저항의 세력은 대학생들이었다. 이 시기, 학생투쟁과 야당의 저항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저항을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하고, 지도할 의도를 가진 운동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이 세력이 인혁그룹이다.

 

인혁그룹4월 혁명 당시 투쟁을 주도했던 민자통의 청년조직인 민민청이 박정희에 의해 대탄압을 받자 지하로 들어가서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이 학생들에 대한 운동적 지도를 통해 운동을 확대시켜나갔다.

인혁그룹은 대구에서 야당과 연대해 민주주의 쟁취운동을 전개한다. 그 당시 전국적 명성을 지녔던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을 지도하면서 전국적 학생연대(‘민청학련’)도 구축하게 된다. 그 연결고리가 경북대생 여정남이다. 여정남은 인혁그룹의 지원으로 전국적 학생연대를 구축해 박정희와 최후 결전을 시도하려 했다. 박정희는 이를 감지하고 고문조작을 자행한다.

인혁당 사건이 담당 검사 3명의 기소 거부로 사실상 실패에 그치자 박정희 정권은 10년 뒤인 19744인혁당 재건위라는 또 다른 조작 간첩 사건을 기획한다. 이철·유인태 등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지휘부로 서도원·도예종 등 과거 인혁당 사건 연루자(인혁당 재건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고문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사건이다.

1년 뒤 197548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기소된 여정남 전 경북대 학생회장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그리고 이튿날인 49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사형이 집행된다.

사형수 8명은 모두 영남에서 출생했다. 여정남·서도원·도예종·송상진·하재완 등 5명은 대구에 살고 있었다. 대구 지역에 한줌 남았던 혁신 계열이 뿌리째 뽑힌 순간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법살인이라는 국내외 비난이 거세지자 민청학련 등 나머지 관련자들을 형집행정지로 풀어준다.

그 후 인혁그룹의 싹은 인혁당 사건에서 살아남은 이재문 선생 등에 의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남민전 사건으로 대구의 진보는 또 한 차례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 그 후 대구 진보의 불씨는 완전히 괴멸 직전에 놓이게 됐다.

박근혜는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 인혁당 재건위 유가족에 대한 사과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아버지의 사법 살인에 대해 사과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대구는 박근혜에게 80.1%의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 박정희가 마지막으로 선거에 나선 1971(박정희 67.0%)보다 훨씬 더 높은 지지율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정화영 씨는 그 사건 이후 대구를 떠난다. 사형당한 여정남의 경북대 법대 후배였던 그는 여정남이 학교를 떠난 뒤 반유신 투쟁에 주력했었다. 그에게 대구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그는 지금 대구에는 박정희 수혜자들이 많다. 박정희의 혜택을 뜯어먹고 산 사람들은 지금도 사돈의 팔촌이라도 자기 가족 중에 고위직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기 신분이라고 착각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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