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북(Black book)’ 형식 첩보보고 주장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기무사의 국기 문란행위
심승섭 신임 해군총장 임명, 군 개혁 효시되나

기무사 계엄령 문건이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2017년 3월 작성된 문건이 2018년 3월 국방장관에게 보고되고 이후 4개월간 제대로 된 법리 검토조차 되지 않아 논란이 확산됐다.

급기야 7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방부, 기무사와 각 부대사이에 오간 문서를 대통령에게 즉시 제출하라고 지시함으로써 군의 ‘제식구 감싸기’를 원천봉쇄함은 물론 군개혁과 인적청산을 예고하고 있다.

누구의 지시로 작성했고 누구에게 보고했나?
2017년 2월24일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은 국방부 공식회의인 고위정책조정간담회에 참석해 현 상황(촛불시위와 태극기집회)과 관련해 위수령과 계엄령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한다.

3월에 조 사령관은 당시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의 위수령 존폐여부 검토보고서와 합참 계엄시행계획을 참고해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을 작성 보고한다. 비밀 처리되지 않고 평문형식으로 작성된 개념보고서다.

국군기무사령부 전경
국군기무사령부 전경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 장관은 이를 계엄 주무부서인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에 지시해 계엄시행 가능성을 고려해 이를 실행계획으로 구체화시키지 않았다. 청와대 김관진 안보실장에게 참고보고 하게 한 후 종결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탄핵 인용과 기각시 촛불시위와 태극기 집회가 과격화 되는 등의 사태 악화를 예상해 군의 책무인 위수령이나 계엄령의 필요성을 검토하게 한 것이다. 이런 준비를 하지 않으면 장관으로서 직무유기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철희 의원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 탄핵 국면이 있었는데 당시 군이 계엄 계획을 짰느냐고 군에 묻기도 했다.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 의원은 “이건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군이 본분을 잊고 그냥 나쁜 짓을 한 것”이라며 “단호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무사가 작성했다는 것은 국군 통수권자(당시 황교안 권한대행 등)가 지시해 작성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명령체계에 따라 지시를 받아서 작성됐다면 합참 주도하에 각 군이 포함돼 검토했을 것이라는 것.

일각에서는 이순진 합참의장(3사14기)이 육사 출신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는 육사출신 알자회 지휘관들에 의한 ‘내란음모’ 실행계획이라는 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물론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육사38기)과 조종설 특전사령관(육사41기)은 알자회원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구홍모 수방사령관(육사40기)은 알자회 멤버가 아니다.

기무사가 이 문건을 작성하게 된 것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라는 김관진 안보실장 등 청와대와의 교감 아래에서 한민구 장관에게 통보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 장관에 따르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더 논의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송영무 국방장관과 청와대 대응
2018년 3월16일 이석구 기무사령관은 계엄령 문건을 송영무 장관에게 보고하게 되고, 같은달 18일 평창 겨울 패럴림픽 폐회식에서 송 장관이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문건관련 구두문의를 했다.
4월28일, 국방부는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에게 이 문건을 먼저 보고한 후, 4월30일 청와대에서 송 장관, 임종석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등 기무사 개혁관련 회의에서 국방부는 기무사 정치개입 사례 중 하나로 문건을 설명했다.

기무사 개혁과 관련해 송 장관은 기무사 장군 숫자를 9명에서 2명으로 줄인다는 보고를 청와대에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청와대는 기무사의 더욱 강한 구조 조정안을 원했기 때문에 송 장관의 기무사 조직 축소안이 반려됐다고 알려져 있다. 송 장관이 기무사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데 비해 청와대는 장영달 위원장의 기무사개혁 TF 활동과 자체 개혁안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군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전·현직 기무사 인원들의 조직적인 저항 △지난해 4월 대선 직전 기무사출신 예비역 장군·대령 22명이 국회 정론관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공개선언한 것에 대한 보은 △정권 안보 차원에서 군을 간접 통제할 수 있다는 이전 정권의 교훈 등을 고려했다는 반론도 나온다.

여기에 청와대가 계엄령 관련 검토 문건을 보고받고도 그냥 넘어갔다는 식의 석연치 않은 설명을 내놨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문건 인식 시점에 대해 “두부 자르듯 잘라 말할 수 없다. 회색지대가 있다”라고 얼버무리는 듯한 해명을 내놨다.

이런 부분들이 국방장관의 늑장 대응과 청와대 참모진의 안일한 현실 인식으로 사태를 확대시킨 원인이라고 비난받는 이유다. 이런 안일한 대응의 책임 소재를 따지기 위해서는 송 장관과 청와대 참모진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 당시 회의록을 확인하면 검증 가능한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대응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6·13지방선거 관계로 정상회담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곧바로 보고한 것이라는 해명이 나온다. 청와대가 이 문서를 즉시 공개할 경우 정상회담 분위기 위축과 지선에서 공연히 보수세력의 결집을 가져오는 역효과를 불러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미온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국방개혁과 군 인적청산의 신호탄
국회 국방위 더불어민주당 간사였던 이철희 의원이 7월 5일 문건을 공개하게 되고, 인도를 방문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기무사 문건관련 독립수사단 구성’을 지시했다. 급기야 16일에는 “문건과 관련해 국방부, 기무사와 각 부대 사이에 오고 간 모든 문서를 즉시 제출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이는 수사와 별개로 계엄령 문건과 관련된 모든 경위를 문 대통령이 직접 파악하겠다는 의미다.

군 인권센터가 공개한 계엄발령시 서울지역 병력투입배치도(제공=군인권센터).
군 인권센터가 공개한 계엄발령시 서울지역 병력투입배치도(제공=군인권센터).

청와대 자체조사 결과에 따라 대대적인 국방개혁과 군 인적청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송영무 장관은 16일 오후 김용우 육군참모총장 등 지휘관 20여명을 국방부 청사로 긴급소집해 “2017년 당시의 계엄령 관련 준비, 대기, 출동명령 등 모든 문건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고 최단시간 내 제출할 것을 명령한다”고 했다.

군 안팎에서는 국군 통수권자가 지시하지 않은 장관 차원의 검토 지시한 개념보고를 ‘과연 합참 등 계엄 시행부대에 지시했을까’라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만일 수방사, 특전사 등 일선부대에서도 계엄령 관련 흔적이 발견된다면 실제 실행계획을 문건에 담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군 정보기관 체계에 정통한 전직 군 관계자는 “아마도 계엄령 관련 문건은 개념 보고 형식으로 작성된 문건으로 해당 작전 시행부대에 작전명령 형식의 지시가 아닌 해당부대 기무부대를 통해 관련문건을 지휘관에게 첩보 보고하는 ‘블랙 북(Black book)’ 형식으로 보고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작전 시행부대에 지시된 계엄 실행계획이 존재한다면 해당부대는 계엄령에 대비해 증원부대 계획을 마련해 병력·장비 이동계획을 구체화했을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이러한 구체적 계획 문건이 나오지 않으면) 계엄령 문건은 실행계획이 아닌 기무사 차원의 개념보고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3월 군인권센터(소장 임태훈)는 2016년 12월9일 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당시 구홍모 수방사령관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소요사태 발생시 무력진압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국방부 감사관실은 3월8일부터 19일까지 컴퓨터 포렌식 전문요원까지 투입해 국방부, 합참, 수방사, 특전사 등을 조사했고, “군 병력투입이나 무력진압 관련 논의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나 진술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전직 군 관계자는 “기무사가 과거 전두환 시절 보안사처럼 불법적인 방법으로 군을 통제해 정권을 장악했듯이,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두환 정권처럼 촛불시위와 태극기 집회를 국가 위기인양 침소봉대해 기무사가 유일한 국가통수 및 군 통제의 중심이라는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역사인식 아래서 행한 국기 문란행위”라며 “기무사는 본래 군 이동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쿠데타를 막기위해 군 이동을 보고해 막는 역할을 한다”며 “해당 문건을 작성한 것은 아무리 봐줘도 월권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16일 엄현성(60·해사35기) 해군참모총장이 사의를 표함에 따라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인 심승섭 중장(55·해사39기)를 신임 해군참모총장으로 내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은 19일 청와대에서 심승섭 참모총장을 승진·임명했다. 엄현성 전 총장은 임기를 2개월 남기고 최근 발생한 해군장성급 성폭력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2달 후 정기인사를 통해 교체하거나 1달 후 특수수사단의 수사결과를 보고 계엄령 문건 관련 인원들을 인사조치하면서 후속 인사를 단행할 수 있었는 데도 청와대가 빠른 인사조치를 한 데 대한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군 관계자들은 심승섭 신임 해군총장이 엄현성 총장보다 4기수 후배임을 내세워 유래없는 군 인사개혁의 신호탄이라고 보고 있다.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보직 및 진급 신고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삼정검에 직위와 이름, 진급 날짜 등이 수놓아져 있는 ‘수치(짙은 자주색 매듭 끈)’를 달아주고 있다(사진제공=청와대).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심승섭 해군참모총장 보직 및 진급 신고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삼정검에 직위와 이름, 진급 날짜 등이 수놓아져 있는 ‘수치(짙은 자주색 매듭 끈)’를 달아주고 있다(사진제공=청와대).

그러나 지난해 8월 임명된 김용우 육군참모총장(육사39기)과 이왕근 공군참모총장(공사31기)은 엄현성 해군참모총장보다 사관학교 2기수 후배 뻘이다. 참모총장의 기수와 임기를 고려하면 다음 육·공군 참모총장은 신승섭 총장 내정자와 사관학교 동기뻘이 될 확률이 높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한 달 후 특수수사단 수사결과를 보고 책임소재에 따라 인사 이동을 할 경우 청와대의 군 개혁에 대한 의지와 동력이 현 상황에 편승한 걸로 비춰져 약하게 인식될 우려가 있다”며 “대대적인 인사이동으로 인한 군 동요와 혼란을 우려해 2달 먼저 교체해 자연스러운 후속 인사가 진행되도록 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특수수사단 수사결과 발표에 앞서 해군총장을 교체한 것은 청와대가 특수수사단의 수사 방향을 제시해주고 군에는 대대적인 개혁과 인적 청산에 대한 신호탄을 쏘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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