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을 찾아] 연재를 시작한다. 왜 이 연재를 시작하는가?  그동안 역사 공부를 하면서 너무 헷갈리는 사실(史實)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가짜뉴스가 여럿이었다. 맨 먼저 시작하는 글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이다. 거기엔 묘가 7개로 사칠신 공원이 되었다.

#1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공원을 갔다. ‘사육신묘(死六臣墓)’ 안내판부터 보았다. “이곳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중략)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 성삼문 ·유응부 ·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 유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  아니, 사육신이 아니고 사칠신이라니. 정말이지 의절사(義節祠) 사당에도 위패가 7개이고, 묘역에도 묘가 7개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의절사 마당에 있는 1955년에 세워진 ‘육각(六角)의 사육신비’엔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하위지 · 유응부 · 유성원의 각비가 있고, 1782년(정조 6년)에 세워진 신도비 앞부분에도 박팽년 · 성삼문 · 이개 · 유성원· 하위지 · 유응부 순으로 이름이 적혀 있고, 그 다음에 ‘추강 남효온의 병자 육신열전’ 운운하는데, 어찌하여 사칠신 공원이 되었나?

#2. 우선 인터넷에서 ‘사육신 공원’을 검색했다. 그랬더니 “1978년에 서울특별시가 사육신 묘역을 확장했는데 이 때 사육신 논란이 있어 김문기를 추가하여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됐다”고 설명돼 있다. 1978년이면 박정희 대통령 때인데 무슨 연유였을까?

1976년에 한 방송작가가 조선일보에 “추강 남효온이 쓴 「육신전」 중의 유응부는 김문기를 잘못 기재한 것이므로, 사육신은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 주장에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최영희)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규명에 나섰다. 특별위원회는 당시 국사학계를 대표한다는 이병도·이선근 · 백낙준 · 한우근 · 이기백 · 김원룡 ·최영희 등 15명으로 구성되었다.

1977년 9월 22일 특별위원회는 “사육신은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라고 만장일치로 판정했다. 이 사실이 9월23일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국민들은 큰 관심과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이가원 · 정구복 등 일부 학자들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이현희 · 김창수 등이 김문기가 사육신이라고 옹호했다. 유응부와 김문기 문중도 가세했다. 이러자 1978년에 국사편찬위원회는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허장(虛葬)을 봉안하고, 유응부의 묘도 그대로 존치한다.’는 애매모호한 결정을 내려 ‘사육신 묘소’가 ‘사칠신 묘소’로 바뀌고 말았다. 수 백 년 간 내려온 ‘사육신’의 명칭이 1978년에 국사학자들에 의해 뒤집힌 것이다.

#3. 원래 노량진에 사육신묘가 있는 것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때문이다. 사육신이란 말은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1456년 6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육신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에서 한양으로 달려갔다. 6월8일에 군기감 (지금의 서울시청 동쪽) 앞에서 성삼문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 등이 두 대의 수레로 사지가 찢기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과 집에서 자결한 유성원의 시신이 또다시 거열 당한 것도 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는데 김시습이 나섰다. 그는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 성승 등 다섯 시신(한 사람은 미상이다)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삼았다.

한편 남효온은 세상을 떠돌다가 1489년에는 고향 의령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병마로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였으나, “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어지게 할 수 있으랴” 하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박팽년 · 성삼문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전』을 집필했는데, 무오사화의 희생자인 사관 김일손(1464∼1498)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손의 문집인 『탁영선생문집(2012년 간행)』의 「탁영선생 연보」에는 “1490년 4월에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 초안을 사관(史館)과 『승정원일기』에 의거해 다시 고쳐짓고 집안에 깊숙이 갈마 두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490년 가을에 남효온은 김일손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서 김시습을 만났다. 세 사람은 밤새 담소하고 백운대를 올랐으며 닷새 동안 같이 지냈다. 아마 단종과 육신에 대하여도 이야기 했으리라.

그러나 세조 이후 사육신 거론은 금기사항이었다. 심지어 1576년에 판서 박계현이 경연에서 “성삼문은 참으로 충신입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선조는 즉시 육신전을 읽어보고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엉터리 같은 말을 많이 써서 선조(先祖)를 모욕하였으니, 육신전을 모두 찾아내어 불태우겠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자의 죄도 다스리겠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76년 6월 1일자)

그러다가 1691년 12월에 숙종은 사육신을 복작하고, 노량진에 민절서원을 세웠으며 정조는 1782년에 신도비를 세웠다. 더 나아가 정조는 1791년에 영월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모든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임금의 명에 의해 공신의 신주를 배향하는 것)’을 편정하도록 했는데, 여기에는 육종영(六宗英), 사의척(四懿戚), 삼상신(三相臣), 삼중신(三重臣), 양운검(兩雲劒), 사육신, 허후 ·허조 ·이보흠 ·엄흥도 등 32명이 망라돼 있다. (정조실록 1791년 2월 21일자)

여기서 육종영은 안평대군·금성대군 등 여섯 종실이고, 사의척은 송현수·권자신 등 네 외척, 삼상신은 김종서·황보인·정분, 삼중신은 민신·조극관·김문기, 양운검은 성승 · 박쟁 을 말한다. 이렇게 정조 때 사육신과 삼중신은 확연히 정리됐다.

그런데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어정쩡한 결정으로 사육신 공원은 사칠신 공원이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참고문헌

o 이재호 지음, 조선사 3대 논쟁, 역사의 아침, 2008

o 신병주 지음,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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