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라”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 (사)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 문영숙 이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은 독립유공자는 8월 기준 14562명이다. 그간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왔다. 그런데 이미 동쪽 연해주에서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던 1900년을 전후로 의병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그 중심에는“최재형”이라는 걸출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 연해주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린 최재형 선생. 전 재산을 민족의 교육과 무장투쟁, 언론 사업에 바친 그를 (사)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이하 지원사업회)가 매년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공정뉴스에서는 지원사업회 문영숙 이사(이하 문 이사)를 통해 최재형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2010년 동북아평화연대와 인간개발연구원 회원12명이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관의 [추석맞이 고려인 문화한마당]에 참석하신 것이 출발점이 됐다. 당시 무대 위에서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을 하던 학생들의 복장이 무척 추레한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신 김창송 회장님과 전상백, 박춘봉 부회장님 등이 독립운동가의 직계 자손이라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 힘을 보태야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물론 당시 그 곳의 최재형 선생의 고택을 방문하시면서 대기업가로서 민족의 삶에 투신한 선생의 뜻을 추모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모으셨다.

▲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선생의 고택
▲최재형 선생 성함 앞에“페치카”가 붙는 이유는?

- 페치카는 러시아 어로 벽난로 이다. 최재형 선생님께서는 1900년 초 연해주에서 크게 사업을 성공하시고, 그 재산으로 당시 궁핍한 삶에 찌든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지원사업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곳 한인 집에는 거의 모두 최재형선생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때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고마움으로“페치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페치카”라는 단어가 낯설어“비집게”“, 최비지깨”선생님이라고도 불렀다.

▲최비지깨. 최재형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

-최재형 선생님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이야기 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 분이 살았던 삶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그는 1860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9세가 될 무렵 가난을 피해 지신허로 이주했으나 2년 뒤 선생은 굶주림으로 가출 했다. 이때 그는 러시아 선장부부를 만나 6년간 세계 일주를 하며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이후 통역 일을 하고 사업을 전개하면서 많은 부와 명성을 얻었다. 물론 그 와중에 한인들에 대한 보살핌도 빼놓지 않았다. 1895년에는 얀치헤 지역의 도헌(군수)이 되고 한인마을 소학교를 건립하며 교육 사업에 매진했다. 1904년 러일전쟁 참전을 시작으로 1906년 이범윤 등과 더불어 독립군부대 증강과 무력투쟁을 준비하고 독립군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1908년에는 독립단체 동의회의 총장으로 취임하고 2년 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준비한다. 이후 독립운동자금지원과 대한국민회의 외교부장,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등에 선정되었다. 그 후 1920년 4월 4일 체포되어 이튿날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 편의‘영웅 일대기’같은 그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최 재형 선생의 이야기가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기 보다는 6.25 이후 우리나라의 반공산주의 사상 영향이 컸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러시아라는 나라와 냉전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역사도 함께 잠들어있었던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이유로 현재 국내에는 선생에 대한 연구 자료가 많이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량 있는 학자들의 참여와 연구를 기대하고 있고, 지원도 준비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뒤에는 최재형선생님이 계셨다고 들었다.

-민족 병탄의 원흉이자 제국주의 일본의 수괴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선생님을 지원한 것이 최재형 선생님이셨다. 당시 연추 대동공보 통신원이셨던 안중근 의사께서는 동아시아를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몰아넣는 이토를 처단하기로 최재형선생님과 대동공보 사무실에서 결의 하셨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최재형 선생의 딸인‘최올가’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자서전에서는 “내동생 소냐는 어떤 사람이 집안의 비밀 공간에서 사격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하얼빈에서 이토를 사살한 안응칠(안중근)이었다”는 내용이다. 1908년 10월 21일 대동공보사의 편집실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은 얼마간의 돈과 권총 세 정을 들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을 향했다. 그 사이 최재형은 대동공보의 주필이었던 변호사 미하일로프 변호사를 준비시켰고, 거사 직후 러시아 군 재판에 회부하여 빼내기로 계획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러시아 정부를 압박한 일본군에 넘겨지고 말았다.

▲ 독립운동가 최재영 선생 후손 한국 국적증서 수여식
▲그동안 최재형 기념 고려인지원 사업회에서 해온 일은?

-우리 사업회는 출범한 지 5년밖에 되지 않다. 하지만 그 동안 ‘동양의 카네기’라 불리는 최재형 선생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한국에 알리고 열심히 공부하는 고려인 청년들을 지원하는 일에 매진해왔다. 그리고 외교부의승인을 얻어 사단법인을 출범하여 공식적인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내년부터는 독립기념관이 우수리스크의 고택에 박물관을 건립했다. 카자흐스탄 대학의 한국어학과장 이병조 교수님을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으로 위촉해 지원사업의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또 페치카 뉴스레터발간, 기념음악회 개최, 최재형 전기소설발간, 유라시아 자동차랠리 참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현충원에 최재형 선생 부부의 위패를 봉안했다.

▲앞으로 최재형 기념사업회의 장기적인 비전은?

-현재 재외 동포재단이 주최하는“차세대 한인대회”청년동포들의 롤모델은 최재형 선생이다. 그 말에는 아직도 고려인들의 민족적 뿌리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한국어 교육과 더불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을 만들어주고 조국과의 연대를 통해 젊은이들이 활동할 경제영토를 넓히거나 세상을 보는 시각과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다. 또 소외 받았던 연해주 독립 운동사를 바로잡고 독립에 모든 것을 내어던진 선열의 역사를 한국인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 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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