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추억

▲ 대통령의 아내로, 세 자녀의 엄마로, 국모로서의 조용한 내조를 수행했던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격에 쓰러졌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34년 만에 따님이 또 대통령

1974815일 오전 1023분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단상장서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던 도중 역시 단상에 앉아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표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박대통령은 이 와중에서도 육 여사가 병원으로 옮겨간 뒤 다시 경축사를 끝까지 읽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때 일단의 대학생 일행이 광복절 기념 조국순례대행진을 마치고 집결지인 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정오 무렵 땀에 흠뻑 젖은 학생들에게 서울서 냉동트럭으로 내려보낸 유명제과 H 회사의 아이스크림이 배달됐다. 서울서 대전까지 육 여사가 행군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선물한 것이다. 바로 그시간 천사같던 육 여사는 의식을 잃은채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20158월 지금부터 41년전 발생한 운명같은 비극이었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필자는 박 대통령 내외분이 광복절 기념식을 마치고 지하철 1호선 준공식에 참석, 개통테이프를 끊고 시승하려던 박 대통령을 시청 앞 식장에서 관계장관과 서울시장등 참석자 일행들과 함께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시간이 지나도 박 대통령은 오지 않고 정일권 국회의장 등 일반 내빈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지하철 개통식을 대신 치루었다. 시청앞 식장에 모여있던 청와대출입기자들은 청와대기자실로 달려가 혜화동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치료중인 육 여사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그날 저녁 730분 육 여사는 향년 48세로 타계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 후 13년이 지난 그 해 아내 육영수여사를 비운에 여의었고 슬하에는 박근혜, 근령 두 영애와 영식 지만을 남겨두었다. 그로부터 5년 후 10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흉탄에 맞아 향년 62세로 혁명가의 일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조국근대화의 위업을 앞당긴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어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많이 닮은 큰 따님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사후 34년 만에 다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부녀 대통령이 탄생하는 기록을 세웠다. 가족과 개인의 사연을 살펴보면 불행하고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공적 생활을 되돌아보면 국가와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 박정희 대통령 일가의 운명은 현대정치사와 국가발전에 음양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영부인의 동정과 역할은 간단한 보도 당부

박 대통령 일가의 내조에 지대한 몫을 담당한 영부인 육영수여 사를 빼놓고는 인간 박정희 대통령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22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어머니 육 여사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애틋한 모정은 그의 자서전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19251129(1014) 충북 옥천군 교동리 덕유산 산자락에서 아버지 육종관씨와 어머니 백경령씨 사이에 13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6.25 동란중인 19501212일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박 대통령의 초급장교 시절부터 가정을 꾸려왔다. 육영수 여사는 무뚝뚝하고 과묵한 경상도 사나이지만 배려의 인정이 넘치는 박 대통령을 내조하면서 집안살림을 도맡아 챙겨오고 세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가난했지만 올곧은 성품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군인생활을 해온 인간 박정희와 반려자로 살아온 육 여사에게 말못할 고충은 많았겠지만 겉으로 좀처럼 표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5.16을 거사하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면서 육영수 여사의 대통령 영부인 역할은 소리 소문 없이 돋보였다. 필자가 723월부터 청와대 출입기자를 시작했다. 당시 영부인의 공식 비공식 일정은 청와대 제2부속실이 담당하고 동정의 보도는 청와대 대변인실이 간여했다.

출입기자들이 보통 육 여사의 대외 일정에 풀기자로 한두명 취재에 나서는 경우가 있었지만 부속실의 권숙정, 김두영 비서관은 수행기자들에게 간단한 동정기사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단 두줄정도의 보도가 태반이었다. 신문과 방송 보다는 입소문으로 육 여사의 인품이 소리소문 없이 널리퍼진 것이다. 국가대소사는 모두 대통령 중심으로 추진되고 이를 홍보하는 원칙을 육 여사 스스로가 철저하게 지키는 그림자 내조를 평생 변하지 않고 일관해온 것이다.

한번은 필자가 육 여사 행사에 풀기자로 참여해 불우시설을 시찰할 때 바짝 근접하여 밀착 취재했다. 육 여사는 필자에게 웃으면서 뭘 그리 열심히 취재하십니까? 대충대충 하세요라고 사양하던 기억이 새롭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타계한 후 74년부터 79년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하던 시절의 큰 영애박근혜 대통령도 본인이 직접 주관하는 대외행사 이외에는 조용하고 소리없이 수행했다.

 

▲ 육영수 여사, 아버지처럼 의젓하게 넥타이를 메고 있는 박지만, 근령 근혜 등 박대통령 가족사진.

청와대 야당 역할을 해온 육 여사의 지혜와 용기

필자가 대통령과 그 참모들을 근접취재하는 8년의 청와대 출입기자와 7년의 대통령 비서관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 바로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바른 소리 즉 직언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민감하고 이해가 엇갈리는 정치적 사건이나 국정의 중요사안에 대해 남편에게 솔직하게 바깥의 여론을 전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평범한 가정에서도 자칫하면 부부싸움도 벌어질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출입기자로 일하는 동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 본관주변에서 박 대통령 내외분이 다투었다는 소문도 들은 적이 있었다.

출입기자들이 겪어보고 측근들을 취재한 경험을 상기해 보면 육영수 여사는 참으로 현명하고 기회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영부인이었음이 확실하다. 김두영 비서관의 회고담이다. 19719월 제2부속실 육 여사 담당비서관으로 일하게 된 어느날 김정렴 비서실장이 청와대 전직원에게 보낸 지시공문을 받았다. 비서실 직원은 모두 청와대 문구류나 용품 등을 사적으로 사용하거나 집에 가져가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육 여사가 첫 출근한 비서관에게 알려주고 싶은 사항이었지만 행여 자신의 비서관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김 비서실장을 통해 전체 직원에게 지시를 대신 내렸다는 것이다. 이렇듯 육 여사는 남을 배려하고 기회를 슬기롭게 이용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 야당이라는 얘기는 육영수 여사가 자신이 참석한 행사에서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직접 보고 들은 바깥세상의 이야기 또는 서민들의 여론을 남편인 박대통령에게 전했다. 그것이 정책이나 지시로 반영되고 시정되는 사실이 다시 육 여사에게 전달하고 건의했던 그들에게 되돌아가면서 밝혀지는 것들이 많아 청와대 안 야당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됐다. 또한 남편인 박 대통령의 입을 통해 세간에 알려진 경우도 많았다.

대통령 선거 인천 유세장에서 찬조연설에 나선 연사의 유머에 소탈하게 웃음을 보이고 있는 대통령 내외(1967.4.30)

박 대통령이 얻은 지지표의 30%가 육영수 여사 표

1971년 김대중 후보와 힘든 대통령선거를 치룬 뒤 722월 박 대통령 내외가 서울대 단과대학 수석졸업생들을 청와대로 초청, 격려하는 오찬자리에 졸업생 학부모, 민관식 문교장관, 서울대총장 등이 참석해 잠시 환담했다. 오찬 화제가 갑자기 대통령선거에 이르자 참석자 한사람이 지난해 선거에서 육 여사가 인기가 매우 높다는 여론이 돌았다고 말을 꺼냈다. 박 대통령은 이에 선거후 당으로부터 보고받으니 내가 얻은 표의 30%가 우리 내자가 얻은 것이라고 하더라고 웃으면서 소개했다. 정치적인 분야에서 한발짝 거리를 둔 육 여사의 처신은 항상 비정치적인 분야에서 열심히 내조하는 듯 외부에 비쳐진 것이 오히려 육 여사의 대국민 호감을 상당하게 높여준 것으로 훗날 전문가들이 분석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옛날부터 데리고 쓰던 2명의 제2부속실 행정관을 신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나모, 정모 행정관은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나 육 여사 앞으로 오는 편지나 청원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고하여 국민의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다고 알려졌다.

언젠가 영부인 부속실의 행정관이 직접 박 대통령에게 각하, 시중에서 각하께서 모 여배우와 연애하신다는 소문이 났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대통령에게 행정관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청와대안에서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박 대통령은 그이야기를 듣고 아시아 영화제에 참가한 배우들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그 여배우와 악수해 본 기억 밖에 없다고 대꾸할 만큼 대범했다. 육 여사가 자신의 비서를 시켜 시중의 소문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기지도 가끔 발휘한 것이다.

박 대통령과 같이 근검절약 하는 생활의 모범을 보여

박 대통령 내외의 근검절약은 특별했다. 종이한장, 물 한방울까지 아껴쓰는 남다른 수범을 보였다. 박 대통령의 침실 변기 물통에서 물을 아껴쓰기 위해 넣어둔 두 개의 벽돌이 박 대통령 사후에 발견돼 주위사람을 놀라게 했다. 육영수 여사는 버리는 서류 가운데 한쪽면만 인쇄된 파지를 모아 두었다가 연습장을 만들어 아들 지만군에게 주기도했다.

육 여사는 한복이든 양장이든 외제 옷감으로 옷을 해 입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민 특히 여성들의 주목을 받는 육 여사의 패션은 그 당시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육 여사가 새옷을 해 입으면 같은 옷감이라도 고급스럽고 외국산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청와대를 방문하는 여성손님들 중 어떤 사람은 옷감을 만져보거나 제조회사를 물어보기도 했다. 육 여사는 국산 옷감만을 고집했다.

육 여사는 충북 옥천의 부잣집에서 자라고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했지만 성품이 아주 서민적이었다. 생전에 육 여사는 방송작가 이서구씨, 시인 박목월씨 같은 분과 만나 담소를 나누기를 좋아했다. 가끔 이분들을 청와대로 모시자면 교통편이 항상 문제였다. 바깥으로 소문나는 것을 꺼려 이서구씨 같은 분이 청와대로 들어오자면 경호 절차 등으로 번거로웠다. 자가용이 없는 개인 방문객은 비서실 차를 청와대 입구에 대기시켰다가 손님을 모셔왔으나 얼굴을 몰라 실수를 할때도 자주 있었다. 이서구씨가 방문하는 어느날 연락이 잘 안돼서 결국 육 여사는 비서관에게 지시했다. 청와대 앞에서 경호관이 이서구씨가 타고온 택시를 동승 안내하여 청와대 본관까지 영업용 택시가 들어온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육 여사는 박 대통령과 같이 서민들의 입장에 서서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자질을 타고났다.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의 운구차를 떠나보내며 오열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TV로 생중계 되며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았다.(1974.8.19)

4월에 피는 목련을 좋아했던 학같은 육영수 여사

생전에 언론에 배포된 박 대통령 가족사진을 보면 목련꽃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눈에 많이 띄었다. 육 여사가 목련을 그렇게 좋아해서 그런지 청와대 경내에는 백목련이 여기 저기 많이 심어져있는 풍경을 많이 본다. 이른봄 북악을 등진 청와대 경내에 활짝 핀 하얀 목련의 꽃향기가 뒤덮으면 청와대는 그 어느곳보다 한결 아름답고 여유롭다.

육 여사는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이라 해도 온갖 장식품으로 아름다움을 돋보이려 하지만 목련은 아무런 꾸밈이 없다. 잎새 한 장의 도움없이 앙상한 가지 끝 꼭대기에 꽃만 홀로 피어 은은한 향기를 발산한다. 그 꽃잎들이 무더기로 지는 것을 보면 외경스럽기도 하다고 목련을 예찬했다.

사랑하는 육영수 여사가 미련없이 스러지는 목련꽃처럼 타계한지 1년이 지난 어버이날 박 대통령의 세 자녀는 홀로 남은 아버지 박 대통령에게 감사카드와 카네이션 세 송이를 드렸다. 박 대통령은 그 꽃을 받고 하염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날 박 대통령 집무실에 갖다놓은 카네이션 꽃과 카드가 없어졌음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대통령 침실에 걸려있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 사진 아래 그것을 옮겨 놓았다.

아버지의 어머니 사랑이 이토록 깊고 애절함을 다시 알게 된 박근혜, 근령, 지만 세 자녀는 다시금 설움이 북바쳤다.

쉰여덟살의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평생의 반려를 잃은 그후 가정적으로는 외로운 삶을 살았다. 낮으로는 바쁜 일정에 쫓기고 국정의 현안을 보고 받고 확인하기에 분주했지만 퇴근 후에는 말벗이 적었다. 자녀 삼남매와 단란한 시간도 가졌겠지만 적적한 때가 많았다고 한다. 만찬 스케줄이 없으면 2층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혼자 소파에 쭈그리고 그냥 잠든 박 대통령을 깨워 침실로 안내해드린 부속실 직원들의 후일담을 들은 기억이 난다.

1979년 가을은 카터 미국대통령의 한국 인권 시비와 주한 미군철군 압박 및 부마항쟁 사태 등으로 국내외 사정이 어려운 시국이었다. 박 대통령이 국내외적으로 복잡 미묘한 난국에 직면했을 때 현모양처형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현명하고 반듯한 내조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면 10.26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74815일 저녁 갑자기 내리던 비가 그치고 서쪽하늘에 유난히도 찬란했던 붉은 노을이 세상을 환하게 비칠 무렵 온 국민으로부터 국모로 사랑받고 존경받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이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청와대 정문 앞에서 흰 국화꽃으로 뒤덮인 고 육 여사의 운구차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면서 운구차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던 인간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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