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인하로 방향 트는 한은... 경기전망 실패, 정부의 잇단 신호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하 카드를 만지기 시작했다. 최근까지 금리인하에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던 한은의 태도가 전격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만큼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인한 대외여건 악화를 심각하게 본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뉴시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뉴시스)

 

이주열, 금리 인하 시사
이주열 한은 총재는 12일 한은 창립 69주년 기념사를 통해 “최근 미중 무역분쟁이 심화되면서 세계교역이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최근 대외 요인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진 만큼, 그 전개추이와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면서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대외 여건 악화로 국내경제 성장세가 약화될 경우 금리 인하로 경기 부양에 나설 수 있다고 시사한 셈이다.

이 발언이 나온 직후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실었다. 홍 부총리는 “통화 완화적 기조 가능성을 좀 진전해 말한 것 아닌가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의 이날 발언은 불과 2주전까지의 한은 입장을 뒤집는 셈이어서 파장이 만만치 않다. 지난달 31일 열린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결정문에서 “국내경제가 잠재성장률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며 “앞으로 국내경제 성장흐름은 하반기에 점차 회복될 것으로 전망되는 등 지난 4월 전망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금통위에서는 조동철 위원 한명만 금리인하 소수의견을 냈다.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도 이 총재는 “하반기로 가면 확장적 재정정책과 수출ㆍ투자 부진 완화로 성장 흐름이 나아질 것”이라며 낙관론을 유지했다. 금리인하 주장 소수의견이 나온 것에 대해서도 “소수의견을 금통위 시그널(신호)로 보는 건 무리”라며 “현재 경기는 금리인하로 대응할 상황이 아니다”고 못박기도 했다.

금융가에서는 이 총재가 금통위 관련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 한은 창립기념식에서 시장에 ‘금리인하 여지’로 받아들여질 발언을 했다는 점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금리를 정하는 금통위에서 당연직 위원을 맡고 있는 한은 총재·부총재는 위원 7명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구조에서 사실상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

이 때문에 ‘7중·8말’ 금리인하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선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소수의견도 나왔고 경제지표가 둔화한데다 시중금리는 당장 인하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내려와 있다. 시간을 길게 끌 이유를 찾기 어렵다”며 7월 18일 내지 8월 30일 금리 인하가 단행될 것으로 내다봤다.

입장 변화 영향 미친 대내외 여건
한은의 전격적인 입장 변화 배경으로는 ‘경기전망 실패’가 우선 꼽힌다. 이 총재는 이날 발언 배경을 묻자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 대외 요인(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경기)이 예상보다 어려운 쪽으로 가고 있다”고 답했다. 당초 한은은 미중 무역분쟁은 조속한 타결, 반도체 경기는 이르면 2분기 중 반등에 각각 무게를 뒀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일제히 완화적 통화정책에 나서는 흐름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제롬 파월 연준의장 등이 대거 미중 무역분쟁의 충격 흡수 차원에서 금리조정 필요성을 언급하며 하반기 금리인하 기대를 키우고 있다. 호주는 이달에 올해 선진국 중 처음 금리인하를 단행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올해 연말이던 제로금리 기한을 내년 상반기로 연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실제로 정부는 한은에 금리인하 요청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홍남기 부총리가 지난 4월부터 시장의 기대, 국제기구 보고서 등을 인용하며 에둘러 금리인하 필요성을 언급해왔다. 청와대도 지난 9일 윤종원 경제수석이 나서 “대외 불확실성이 예상보다 커지면서 경기하방 위험이 장기화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의 통화정책 완화 요구에 한은이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16년 이후 3년간 긴축에 맞춰졌던 한은의 정책 기조가 완화 쪽으로 선회하면서 부동산, 대출 등 자산시장 전반에도 연쇄 파장이 미칠 전망이다.

다만 한은이 금리인하를 단행하더라도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채 금리가 장단기를 막론하고 기준금리 1.75%를 밑돌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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