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정치 고전이란 가장 오래된 미래이자 가장 오래갈 미래라는 말이 있다. 보통은 500년 이상 읽혀 온 책을 고전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과거나 지금, 미래에도 인간 사회가 직면하게 될 '영원한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는 의미겠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사상을 가르치는 앨런 라이언은 자신과 같은 학자를 가리켜 평생 20권도 안 되는 정치 고전에 집착하는 직업인이라 풍자한다. 향후 500년 뒤에도 그 책들은 여전히 읽힐 텐데 그 가운데 누구라도 첫 번째로 꼽는 책은 2500년 전에 출간된 플라톤의 '국가'다. 

미국 예일대의 정치사상 분야를 대표하는 스티븐 스미스는 플라톤의 '국가'를 가리켜 "모든 것이 시작된 책"이라 말한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제목부터 다시 봐야 한다. 원제는 그리스 말로 폴리테이아(Politeia)이다. 국가 말고도 정체(政體) 내지 국체(國體)라고도 번역되는 이 개념이 중요한 것은 정치를 하나의 건축학적이고 조형적인 구조로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설계자고 누가 시공자일까? 인간이다.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갖느냐에 따라 폴리테이아를 좋게 설계할 수 있고 그 속에서 개개인의 시민들이 좀 더 좋은 삶을 살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화와 자연철학이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이런 발상이 놀랍도록 혁명적이었다. 

신의 변덕과 폭력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인간이 정치의 방법으로 체제나 구조를 조형해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초인적 섭리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에 순응하기보다는 이를 통제하고 선용할 수 있다는 대담한 발상도 가능케 했다. 

정치가 신과 자연을 대신해 '질서의 창조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관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훨씬 전에 미국의 연방 헌법을 준비하면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훌륭한 체제, 훌륭한 정부를 만들 능력이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운과 무력에 영원히 의존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회인가"를 자문한 적이 있는데 이런 접근이야말로 플라톤적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정치가 분야별 정책을 통해 경제와 사회 질서는 물론 교육과 복지, 교통과 생태 환경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전체의 질서를 만들고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것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이 개개인 삶과는 무관하게 정치의 구조나 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시민들이 살아가게 될 삶의 양식(way of life)에 폴리테이아가 미치는 영향을 중시했다. 그에게 폴리테이아의 좋고 나쁨은 시민들이 훌륭한 개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린 문제였다. 

이는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든다는 상식적 관점을 뒤집는 것과 같았는데 그 이후 인간과 정치에 대한 관념은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들고 사나운 정치가 사나운 시민을 만든다는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인과 오늘날 독일인의 사회적 모습을 국민성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고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로 구분되는 정치 체제의 도덕적 효과를 통해 시민성이 달라진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는 다분히 플라톤적이다. 

흔히 누군가를 가리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하지만 법 없이 유지되는 사회는 없다. 나아가 법 없이 살 사람도 법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에서 더 많아질 수 있다. 

이처럼 플라톤은 좋은 정치를 통해 좋은 폴리테이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시민 개개인이 덕성과 지성의 힘을 키워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는 도덕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징을 갖는다. 

폴리테이아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비판받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플라톤은 민주정치의 한계를 넘어 이상적 폴리테이아를 설계하고 싶어했다. 현실의 정치가 불완전한 주장과 불안정한 의견에 휘둘려 기초도 없이 유동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런 정치 생태를 대체하는 일종의 체제 재설계자 혹은 체제 변혁자의 기획이었고 당연히 이상적 정체나 최선의 국가에 가까운 형상을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다. 그는 존재하지도 또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 폴리테이아를 설계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여러 체제의 장점을 조합하고 단점을 제어하는 것에서 만족하려 했다. 

플라톤이 이상적 최선을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 최선을 선호했다. 1인 지배(왕정)도 소수 지배(귀족정)도 다수 지배(민주정)에도 단점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장점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혼합해 비교적 나은 체제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폴리테이아 개념은 오늘날 국가나 정체로 번역되기보다 헌법(constitution)이나 혼합정(mixed regime)으로 번역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상적인 국가나 정체에 대한 헌신을 촉구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공공의 선보다 공공의 무관심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태도는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반면 현실의 정치에서 특단의 조치나 근본적인 대책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의 한 사람인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을 보면 그 중심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플라톤은 한 손에 '인간 사회의 근본'을 논한 '티마이오스'라는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걸어 나온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인간의 실천론을 다룬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들고 다른 쪽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최선의 인간 삶을 추구하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이 영원한 긴장을 이루고 있음을 이보다 압축적으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정치를 통해 어떤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까? 당시의 현실에서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반대자였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 대해 플라톤보다 훨씬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론의 구조로 보면 정반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균형과 중도를 중시했다면 플라톤은 혁신과 신체제 건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점진적 개선과 제도의 보완을 중시하는 보수적 현실주의 사상의 원조에 가깝다. 그에 반해 플라톤은 반체제 혁명론의 사유 방법을 만든 철학자다. 

통치자의 가족과 재산을 공유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는 국가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가족이나 사적 삶보다 우선했다.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플라톤의 '국가'에는 늘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옹호서'와 같은 위험한 오명이 따라붙는다. 

고전은 문제를 새롭게 보는 패러다임으로서 힘을 갖는다. 이는 현실의 전부나 일부가 가진 권위나 가치를 부정하는 효과를 낳기에 늘 위험이 동반된다. 게다가 고전의 저자들은 그저 상황을 예측하는데 만족하는 대신 관여하고 변화시키려는 헌신의 징표로서 자신만의 개념과 정치 언어를 사용한다.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사상 연구를 대표했던 셸던 월린은 정치 고전의 역할이란 오해와 모멸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지금의 관성이 미래가 될 수 없다는 "경고의 언어"를 주저 없이 발설하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의 '국가'가 그런 책이다. 플라톤의 '국가'에는 아주 재밌는 비유가 실려 있다. 책 말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동굴 속에 갇혀서 그림자에만 의존해 사물을 판단한다. '동굴의 우화' 라고도 불리는 이 장면은 편협한 대중들의 독선적 의견에 휘둘리는 현실의 민주 정치를 빗댄 것이다. 

그때 한 철학자가 우연히 동굴을 벗어나 세상의 참된 지식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동굴 밖에서 참된 삶을 이어 가지 않고 다시 동굴로 돌아간다. 돌아간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말하며 다르게 살기를 권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겨 모욕하고 철학자는 핍박받는다. 

왜 그는 현실에 기꺼이 자신을 던지고 또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을 한 것일까? 플라톤의 '국가' 안에서 그에 대한 직접적 대답을 찾기는 어렵다. 정치 공동체에 속해 살아야만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플라톤 자신의 교리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 현세에서는 오해 받는다 해도 정의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이 구원받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지치지 않고 최선의 정치의 길에 대해 말하겠다는 것, 그것이 플라톤의 '국가'를 위험한 고전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25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테네 시민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우리의 삶을 본다면 지금의 정치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미래였다고 여길까? 평균 연령이 30세 정도에 불과했던 그때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되었고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오늘날 우리는 그들보다 더 도덕적인 정치와 지적인 삶을 향유하는 존재가 된 것일까? 플라톤의 '국가'는 우리를 늘 근본적인 질문 앞으로 끌어당긴다.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는 오늘의 우리를 성실하게 돌아보는 일과 같은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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