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중궈중차(中國中車), 전 세계 고속철시장 70% 장악
호시절에 R&D 투자 미흡... 2대주주 모건스탠리 차익 실현후 발 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정몽구 회장이 현대로템으로 또 다른 고민에 휩싸였다. 현대로템의 실적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로템은 남북·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며 최대 수혜 업체로 떠올랐다. 덕분에 4월초 1만 원대 중반에 머물던 주가는 6월 들어 4만 원대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2대 주주였던 모건스탠리는 지분을 처분했다. 회사채 공모도 겨우 마쳤다. 정몽구 회장을 고민에 빠뜨린 현대로템을 살펴본다.

줄어든 매출, 반토막 실적
최근 몇 년간 현대로템의 실적은 썩 좋지 않았다. 영업이익은 2013년 1700억 원을 넘어섰으나 2014년 66억 원으로 급감했다. 이어 2015년엔 적자로 돌아서 1929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2016년 영업이익 1062억 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이듬해인 2017년 영업실적은  반토막 난 454억 원에 그쳤다. 연 3조 원대 매출은 2016년부터 2조원대로 줄어들었다.

현대로템은 2015년 10월 터키 안탈리아 트램(노면전차) 18편성(총 90량)을 386억원에 수주했다. 이어 2016년 4월 터키 이스탄불 전동차 300량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6월에는 타이완 철도청에서 발주한 교외선 전동차 520량 납품 사업을 수주했다. 현재까지 현대로템은 단 한 차례도 고속철 차량 해외 수출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문인지 현대자동차(43.36%)에 이어 현대로템의 2대주주였던 모건스탠리 프라이빗에쿼티(모건PE)가 올해 들어 세 차례나 지분을 매각했다. 작년 말까지 24.81%를 보유하고 있던 모건PE는 올 1월 3.35%(285만주), 5월 9.7%(823만주)를 매각한데 이어, 6월에는 8.2%(700만주)의 매각을 완료했다. 이번 지분매각으로 모건PE의 지분율은 3.5%로 떨어졌다. 한반도 평화무드라는 호재 아래 차익을 실현하고 빠진 것으로 관측된다.

일각에서는 모건PE가 현대로템에서 손을 뗀 원인으로 세계 철도업계의 공룡 ‘중궈중처(中國中車)’를 꼽는다. 중궈중처는 2015년 중국 양대 고속철 제조사인 중궈난처(中國南車·CSR)와 중궈베이처(中國北車·CNR)의 합병으로 태어난 회사다. 합병 전에도 이미 세계 철도차량 업체 순위에서 매출액 기준으로 중궈난처·중궈베이처가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합병을 통해 중궈중처는 고속철 차량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 69%짜리 공룡으로 탄생했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굴러다니는 철도 전동차 10대 중 3대는 중국산이다. 업계에서는 이미 원가경쟁력에선 중궈중처와 경쟁할 수 있는 회사는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중궈중처 측은 “현대로템 보다 20~30% 더 싸게 만들 수 있다. 기술력도 문제없다”는 반응이다. TGV의 알스톰이나 ICE의 지멘스도 중궈중처를 만나면 긴장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중국 1할에 불과한 연구개발비
이런 배경에는 중궈중처의 엄청난 R&D(연구개발) 투자가 있다. 중궈중처는 2017년까지 5년 동안 매년 매출의 5.3% 이상을 연구개발 비용으로 투자했다. 액수로는 584억 위안(한화 약 10조원)에 달한다. 이 밖에도 중국 전역에 연구센터 11곳, 기술센터 20곳, 해외 연구센터 13곳을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열차 설계·열차 운행 기술·부품 개발 등 고속철 관련 기술 전반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로템은 2003년 경부고속전철(KTX)에 이어 2009년 자체 기술로 개발한 신형 고속전철(KTX-산천) 제작에 나섰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 때만 해도 프랑스 TGV, 독일 ICE, 일본 신칸센 등에서 기술을 이전받아 고속철 사업에 막 뛰어든 풋내기였다. 당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우리 측에 고속철 기술이전을 요청하기도 했다.

현대로템은 1999년 7월 현대모비스,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사업 빅딜로 탄생했다. 국내 유일의 철도차량 제작사가 된 덕분에 사실상 국내 고속철 사업을 독식해왔다. 중국보다 일찍 유리한 출발선에서 시작했는데도 이렇게 밀린 데에는 현대로템이 한국 내수시장 독식에 안주하며 연구개발에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현대로템의 연구개발(R&D) 투자 비용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3%를 넘지 못했다. 그나마 상황이 좋았던 2013년엔 연구개발 투자비를 매출의 0.8%(251억 원) 밖에 쓰지 않았다. 그러다 2016년에 3%를 넘겼고, 2017년엔 4%를 넘어섰지만 “실기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이렇게 벌어진 차이는 더욱 더 벌어지고 있다. 중궈중처는 고속철 각 분야에서 대부분 국산화에 성공했다. 여기에 속도까지 차이난다. 중국 고속철의 최고속도는 605㎞/h(시험운행)로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현대로템이 개발한 최고속도 421.4㎞/h의 ‘해무’보다 200㎞ 가까이 빠르다.

실제 투입된 열차의 속도도 압도적이다. 중궈중처는 베이징과 상하이 노선에 최고속도 400㎞, 평균 시속 350㎞의 2세대 고속철 ‘푸싱(復興)호’를 투입했다. 설계상 최고속도 330km/h, 평균시속 305km에 불과한 KTX ‘산천’보다 빠르다.

KTX 산천.
KTX 산천.

이러한 배경에는 세계 고속철 길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중국 고속철의 영향도 있다. 2017년 말 기준 전 세계 고속철 노선 3만2000㎞ 중 중국 내 노선만 2만2000㎞에 달한다. 2615㎞인 2위의 일본과 2355㎞의 3위 스페인, 4위 프랑스의 1985㎞를 합치더라도 중국 노선 길이의 33%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은 1000㎞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 잡으려 손잡은 독일·프랑스
철도산업의 시장판도를 바꿔버린 중국 앞에 급기야 유럽의 경제적 라이벌인 독일과 프랑스가 손을 잡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9월, ICE를 만드는 독일 지멘스사는 철도차량 사업부인 지멘스모빌리티를 TGV를 만든 프랑스 알스톰사와 합병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사는 새로 생길 합작사 지분을 50%씩 보유하기로 했다. 이 합병은 순전히 연간 360억 달러(약 40조원)의 매출을 올리며 세계 1위에 올라선 중궈중처와 경쟁하기 위해서다.

아직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승인이 남았지만 현지에선 에어버스와 같은 초대형 기업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콧대 높은 독일과 프랑스 정치권도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발씩 물러선 것이다. 두 기업은 양사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다시금 중궈중처에 도전하겠다며 심기일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회사의 매출을 합해도 중궈중처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런 경영현실 앞에서 현대로템의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정몽구 회장은 어떤 묘수를 둘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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