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불교소설의 맥을 잇는?이 시대 최고의 불교소설 '공유'

- 불교 구법(求法)소설 <공유(空有)> 출간을 축하한다. 오랜만에 창작 정통 불교 소설이 나왔다고 들었다.

▲ 그렇다. 아마 1978년 만다라 이후 처음이지 싶다. 

- 창작불교 소설이 그 동안 뜸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 불교계에 창작 문화적 토양이 없다보니, 불교 소재로 뭘 만들어서는 밥을 못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다보니 불교 소재로 창작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다. 

- 불교 문화적 토양이 빈곤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 불교계 각 종단마다 문화부, 포교부, 교육부가 있다. 그들이 실질적인 노력을 했으면 이 지경이 됐을까 생각한다. 말이 나오질 않는다. 1,600년 넘은 한국불교에서 매년 양산되는 불교 창작 문화를 짚어 보자.  창작 소설, 창작 연극, 오리지널 영화 한 편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있다 해도 동아리 정도고, 영화라 해봐야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다큐멘터리가 전부다. 창작불교문화가 전무하다고 봐야한다. 이런 토양에서 불교 소재로 누가 무엇을 하겠다 해도 개풀 뜯어 먹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1,600년 한국불교가 망하겠냐며 배 내밀고 있는 거와 무엇이 다를까.

- 나라의 근간도 문화가 우선인데?

▲ 당연하다! 불교가 대중으로부터 추앙 받으려면 창작불교문화를 발전 시켜야 한다. 창작불교문화가 바닥인 불교계에 내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광고를 통해 출가자를 모집하는 세상이 되었다.
 
창작불교문화 토양이 없는데 광고로 출가자를 모집한다고 출가할 사람이 있을까. 불교를 믿는 신도 수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1,200만이라 했는데 지금은 반 토막 500만도 안된다.

시대가 변화하는 만큼 문화척도도 달라져야 하는데, 문화 없어도 부처님만 모시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 불교계의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신도수가 줄어들고 출가자가 없는 현실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대로는 안된다. 정말 불교계의 관심이 아쉬운 시절인 것 같다.

- 김행수 감독이 말하는 창작불교 문화는 어떤 것인가? 
 
▲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종교다. 말씀 자체가 진리라 말이다. 진리는 천년만년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 진리를 따르려면 생활화 되어야 한다. 생활화 되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진리를 따르라하면 따르나? 매개체가 있어야 따르지. 그 매개체 전부가 문화다.

팔만대장경을 조성 할 때만 하더라도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쇄문화를 만들어 냈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진리를 전 할 수 있는 재미있고 다양한 문화적 방법이 수없이 많다. 난 창작불교문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내가 영화감독이니까. 사람들이 불교에 접근 할 수 있는 매개체가 지금 사회는 영화고 연극이고, 문학이고 미술이다. 이런 창작문화가 살아 날수 있는 토양을 먼저 교계에서 관심 가져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공유 얘기를 다시 해보자. 구법소설 공유는 어떤 이야기인가?

▲ 어차피 이생(生) 사람으로 왔다면 잘 살다 가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떻게 살다 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인데. 산중 노 선사의 열반(涅槃)을 지켜보면서 집나갔던 탕아의 영혼을 돌아오게 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 천국 가기를 원한다. 웃기는 소리다. 살아서 가지 못할 천국을 죽어 가겠다니 말이 되나. 공유는 살았을 때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잘 산다는 것은 잘 먹고 풍족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풍족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불편함 없이 사는 것을 말한다. 풍족하고 부족함 없는 생활이지만 마음이 불편하면 보이는 일체가 고통인데 지옥이 어디 따로 있겠나. 

산중선사 묵계에게는 그 옛날 노 보살로부터 어쩔 수 없이 떠맡아 키운 두 상좌가 있다. 열반직전에 이르면서도 노보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아끼는 모습에서 진정한 수행자의 근본과 생명 본질의 가치를 행동으로 보인다.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잘 죽어야 하는지 엿보게 되는 작품이 공유다.

- 만다라의 맥을 잇는 최고의 불교소설이라는 평단의 평가다. 집필 배경은.

▲ 만다라의 맥을 잇는 최고의 불교소설이라기 보다는 정통 불교소설의 맥을 잇는 불교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거다. 왜냐하면 공유를 만다라와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 만다라는 만다라고 공유는 공유다. 만다라는 만행을 통한 두 수행승의 고뇌와 고통을 그 시대의 눈으로 보여준 작품이고, 공유는 평생 수행자의 삶을 살아 온 산중 노 선사가 목전(目前) 열반을 준비하면서,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생(生)인지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 증명하니 분명히 다르다.

사실은 소설을 기획한 적이 없다. 워낙 창작불교문화가 일천하다보니 영화제작 환경 만들기가 쉽지 않다. 영화뿐만 아니다. 불교를 소재로 한 모든 창작 장르가 마찬가지다. 아시다시피 충무로에서 종교영화를 만든다하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특히 순수불교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작품도 아닌데 말이다. 공유 기획한지 거의 십년이 다 되간다. 안되겠다 싶어 소액 후원자 모집을 하기 위해 티셔츠를 만들고 있다. 장편소설 한 권, 티셔츠 한 벌, 시사권 한 장도 주고 내가 만들 한국불교영화인협회에서 발행 되는 소식지를 받아 볼 수 있는 영구회원으로도 모시고, 영화 앤딩 자막에 후원자 이름도 새겨주고 투자자가 없으니 어쩌겠나. 앵벌이 해서라도 영화를 만들어야지. 

- 다시 공유 얘기해 보자. 불교 경전보다 문화를 통해 새로운 구법를 만들어냈다는 평인데.

▲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로 불교의 진리를 얘기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진리란 수 억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진리란 그런 것이다. 우주의 중심이고 현재의 내 모습으로 이생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진리에 있기 때문이다. 또 다음 생을 이어가야하는 이유를 현재, 지금, 이곳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불교의 진리에 있다. 

- 현대사회에서 불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희망이고 인간 구원의 절대적 가치다.  자본주의가 한계점에 이른 세상에 물질은 풍족한지 몰라도, 인간성(人間性)은 황폐해져 탐욕의 정점으로 치달으니, 결국 물질의 성질(性質)대로 이것 아니면 저것, 이기느냐 지느냐, 아군과 적군 이분법만 남는 결과다. 그 끝은 파멸뿐.   

물질적 성취는 힘의 논리밖에 설명이 안 된다. 결국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만 존재한다는 말이다. 나 외에는 모두 적이니 파괴를 위한 자기만족 성취 밖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 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성의 결과인가. 내편 아니면 적! 중용(中庸)이 없다! 서로 누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고 지금의 정치 현실과 다를 것이 있나. 

세상에 모든 것은 끝이 있는데, 자기만 무(無)한 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유(有)한 하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가끔 유한하다는 자신을 들여다보면 지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데 말이다. 내 자신이 행복해 지려니 나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진실로 사랑하면 내가 행복해 지니까. 

잘 죽기를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어느 것 하나 내 것은 없다. 늘 맛난 것을 먹이는 자신의 몸뚱어리도 자기 것이 아니잖나. 내 것이라면 영원히 내 것이어야 하는데, 불과 얼마 후 바람으로 흙으로 사라질 것들일 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 내 몸뚱어리에 에너지가 있을 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나. 찾아야지. 소멸하지도 않고 진정 영원히 살아 있는 자기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지. 그게 불교다. 

- PD수첩에서 불교계 큰 스님들의 감춰둔 은처승, 도박 등 비리 문제를 다뤘다.

▲ 지리산 내 토굴에는 TV가 없어, 신문도 없으니 난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믿는 불교가 왜곡 절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퍼렇게 목숨 내 놓고 수행하는 스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분들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 한국 불교가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안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 문화다. 치고 박고 싸우고 뒤집어엎는 것이 개혁이 아니다. 개혁해야 한다는 말도 뒤집어보면 잘 하겠다는 것일 뿐. 잘 어떻게 할 건지 말하지 않는다. 갈기갈기 찢어놔야 잘 하는 건가. 그 답은 문화에서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잘하려 해도 문화가 없는데 잘 해 봤자다. 문화가 반듯하면 도둑놈도 사기꾼도 나올 수 없다. 허접한 문화적 토양에서는 당연히 어지러운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불교 창작문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 고령화 시대에 불교계도 늙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대중문화에 더 관심이 있다. 메스미디어 역할에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번 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와 같은 취지인가

▲ 팔만대장 부처님 말씀 줄여보면 생로병사(生老病死)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거다. 이미 정해진 순리다. 인간은 그런 거다. 불교계가 늙은 것이 아니고 세상이 변했다는 거다. 불교는 변할 수가 없는데 사람들 관심이 대중문화로 바뀌었다는 거다. 대중문화는 한 곳으로 향하는 거부 할 수 없는 물줄기 같은 거다. 메스미디어가 아니고는 소통 할 수 없는 물줄기 앞에 놓인 세상이다. 문화현상. 영화는 메스미디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메스미디어를 운반하는 힘이 있다. 인간이 이생에 왔어 어떻게 살다 가는 것이 잘 살다 가는 것인지 불교로써 세상과의 소통이 필요한데, 제일 파급력 있는 것이 영화인 것 같다. 

- 향후 비전은.

▲ 내가 꼽는 정통 불교영화라면 만다라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두 편 이다. 다 37년 전에 만들어 졌다. 37년 전 두 편의 영화가 종교가 다른 유럽사회와 미국사회에서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두 편의 영화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간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 알거다.

유럽은 카톨릭 국가이고 미국은 기독국가이면서, 2009년 유럽에서는 유럽불교영화인협회와 유럽불교국제영화제가 만들어 졌다. 그 보다 더 빠른 2003년 미국에서는 미국불교영화인협회와 세계불교영화제가 설립되었다.
 
지금은 유럽이나 미국사회 어딜 가도 불교 참선도량과 명상센터는 어렵지 않게 발견 할 수 있을 만큼 대중화 되었다.

그런데 정작 1,600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는 불교영화제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영화인협회 마저 없다. 웃기지않나.

2011년, 나는 한국불교영화인협회를 설립하기 위해 영화인들을 규합 했던 적이 있다. 영화인들 형편으로 협회를 꾸린 다는 것은 여건상 녹녹하지 않다. 잘 알지 않나. 불교계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이다. 열의만 넘쳤던 한국불교영화인협회는 그 때 결국 그렇게 무산 돼버렸다.

영화 공유 제작을 기점으로 한국불교영화인협회를 재 설립 할 생각이다. 이유가 있다. 1,600년 불교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가 불교영화인협회 하나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불교를 종교로 가진 영화감독인 나의 직무유기다. 영화 산업국가로서 유럽불교영화인협회와 미국불교영화인협회와 소통하지 않으면 한국불교영화 미래를 약속 할 수 없는 것도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영화제작 시기가 아니면 다시는 못 만들 것 같다.  

 


 
- 마지막으로 질문하자. 불교영화 투자를 못 받아 소설까지 쓰고도 10년 세월 동안 공유를 붙들고 있는 다른 이유가 있나?

▲ 난해한 질문이고 꼭 필요한 의심이다. 왜 사느냐는 질문과 같은 거다. 

왜 사느냐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왜 살지? 명확하게 대답하는 사람 아마 없을거다. 대답을 했다 해도 답이 될 수 없을 거다. 누군가는 행복해지기 위해,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또 누군가는 태어났으니. 돈을 벌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종교를 가졌던 안 가졌던 올바른 답을 내 놓는 사람 못 봤다. 

공유 주인공은 다르다. 답을 내 놓는다. 죽어도 죽지 않고 불에 타지도 않는 자기 본래의 모습이 있는데, 그 본래의 자기를 찾는 거거든. 그러니 어찌 내가 공유를 만들지 않을 수 있겠나.

인간은 누구나 영원불멸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 씨앗이 본래 자기다. 지금의 몸뚱어리는 그 씨앗이 잠시 머무는 집 일 뿐이다. 그 씨앗을 달리 부를 말이 없어 순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라. 저널리스트인 당신이 어딜 간다고 쳐보자. 누가 가지? 몸뚱어리가 가나? 보통 몸뚱어리가 간다고 해보자. 근데 아니잖나. 마음이 가니까 몸이 따라 가는 거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죽어도 못간다. 가다가도 마음이 뒤틀리면 돌아오지 않나. 그런데도 몸뚱어리가 가나. 그렇듯 마음은 전지전능하다.

옛사람들은 마음을 잘 쓰라고 했다. 마음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한 생을 잘 살았다고 할 수 있고 헛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근데 그놈에 마음이라는 것이 발이 수 천 수 만 개가 달려 지 맘대로 돌아 다닌다. 한 순간에 지구 몇 바퀴 도는 거 문제도 아니잖나.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귀한 몸을 가지고 이생에 왔는데 마음을 아무데나 써다 죽기에는 억울하지 않나. 잘 써야된다. 따지고 보면 눈에 보이는 몸뚱어리는 껍데기다. 그냥 이생에서 잠시 한 벌 걸쳐 입은 옷일 뿐. 그 옷은 결국 어떻게 되나. 남루해 지는가 싶으면 기름기 빠지고 불과 얼마 안 있어 죽음 앞에 가 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출가자는 수행을 하는 거다. 그게 어렵다. 왜냐하면 집착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뭘 집착 하냐고. 살면서 길들여진 것들이 있을 거 아닌가. 맛있는 거, 좋은 거, 멋진 거, 하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거, 따지고 보면 허깨비 같은 것들인데 말이다.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집착하니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틈이 없는 거다. 

마음을 영원히 사는 곳에 붙잡아 두면 영원히 사는 거다. 마음을 찰나에 붙잡아 두면 찰나로 끝나는 거다. 어느 곳에 둘 것인지 공유 주인공들은 안다. 그 잘난 영웅호걸은 그 쉬운 것도 모르고 지금은 다 무덤 속에 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공유를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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