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아래부터 권력 상층부까지 부패로 얼룩진 총체적부패공화국이다. 경제규모는 세계 11위지만 부패인식지수는 170개국 중 40위권이다. 본지는 칼럼니스트 김세곤의 특집<부패공화국 대한민국을 바꾸자>를 통해 부패가 만연한 비정상적인 사회를 정상화시켜 공정한 사회구현을 추구하고자 한다.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 우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재치와 해학의 명콤비 ‘오성과 한음’의 한음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덕형은 최근 종영한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으로 재조명되었다. 그는 뛰어난 행정력과 외교력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고, 올곧음으로 인륜(人倫)을 지킨 재상이었다.

이덕형은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있었다. 14세에 외숙인 영의정 유전의 집이 있는 포천의 외가에서 지내면서 봉래 양사언 · 양사기 형제와 어울렸다. 양사언은 그와 수십 편의 시를 주고받고서 “그대가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이덕형은 17세에 동인의 거두 이산해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산해의 숙부인 토정 이지함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 한다. 1580년(선조 14년)에 이덕형은 20세에 문과 급제하였다. 이때 25세인 이항복도 같이 급제하였다. 이리하여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평생 지음(知音)이 되었다. 

이덕형은 1591년 31세의 나이에 젊은 나이에 예조참판 및 대제학이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최연소 대제학이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사헌 이덕형은 좌의정 유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란 극복에 앞장섰다. 4월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양까지 피난하였다. 6월8일에 왜군이 대동강까지 왔을 때 선조가 평양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이때 이덕형은 한 척의 배로 대동강에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과 담판을 하였다. 비록 교섭이 결렬 되었으나 시간은 벌 수 있었다. 

평양을 떠난 선조는 6월10일에 정주에 도착하였다. 정주에서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 때 이덕형이 청원사(請援使)가 되었다. 이덕형이 명나라로 떠나던 날, 남문 밖까지 전송 나온 이항복에게 이덕형은 “말이 한 필 뿐이어서 하루에 이틀의 거리를 달릴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러자 이항복은 이덕형에게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을 넘겨주면서 “만약 원군과 함께 오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시체더미에서나 찾아야 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이덕형 또한 입술을 깨물며, “원병이 오지 않으면  나는 내 뼈를 중국의 노룡령(盧龍嶺)에 묻고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이덕형은 명나라에서 외교력을 발휘하여 이여송이 이끄는 군대 5만 명을 파병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1593년 1월6일에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10월에 선조는 서울로 환궁하였다. 이 때 이덕형은 잠시도 대궐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대궐 가까운 곳에 기거하면서 애첩에게 시중들게 하였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덕형은 일을 마치고 집에 왔다. 갈증이 심하여 미처 말도 못하고 손을 쑥 내미니  애첩은 즉시 시원한 꿀물을 내놓았다. 한음은 주저 없이 그 물을 마셨다. 이윽고 애첩을 쳐다보더니 “나는 이제 너와 헤어져야겠다.”하고는 나가버렸다.

소박을 맞은 애첩은 내내 울다가 다음날 이항복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항복도 이상하여 이덕형을 만나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덕형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녀의 영리함이 참으로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할 정도라네. 전란의 시기에 내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판다면 낭패 아닌가? 그녀에게 내가 빠져 버릴 것 같아 내친 것이네.” 그제야 이항복은 머리를 끄덕이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명나라 경리 양호의 접반사가 되었다. 그는 양호를 설득하여 왜적을 무찌르게 하였다. 명나라는 9월에 직산(稷山)에서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서울이 평안할 수 있었다.  

이때 양호는 이덕형을 매우 뛰어난 인물로 여기어 선조에게 “이모(李某)는 재상 자리에 앉아 있을 만한데, 아직까지 백관(百官)의 위치에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고 하였다. 선조는 즉시 이덕형을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1598년 10월에 좌의정 이덕형은 순천으로 내려가 명나라 제독 유정, 수군제독 진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1월19일에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하자, 이덕형은 동요하는 수군을 통제하고 수습에 나섰다. 

1602년에 이덕형은 영의정이 되었다. 나이 42세였다. 1604년 6월에 선조는 임진왜란 극복에 헌신한 신하들에게 공신 책봉을 하였다.

호성공신, 선무공신, 청난공신 등이었다. 호성공신은 선조를 한양에서 의주까지 호종한 데 공로가 큰 신하들로 1등에 이항복, 2등에 류성룡, 이원익, 윤두수, 3등에 의관과 내시 등 모두 86명이었다, 임진왜란 전쟁에 공을 세운 선무공신은 1등에 이순신 · 권율 · 원균 등 18명이었고, 이몽학의 난 수습에 공을 세운 청난공신은 홍가신 등 5명이었다.

1601년에 시작된 공신 선발은 논란이 많아 4년을 끌었다. 특히 호성공신은 86명이나 되는데 선무공신이 18명뿐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공신 책봉이었다. 그런데 이덕형은 호성ㆍ선무공신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1604년 3월1일 선조수정실록에서  사관은 이덕형이 선발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것은 국명(國命)으로 적진을 드나들고 뒤에는 중국 장수를 접대하느라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쓴 것이 또한 여러 해였기 때문이다. 그가 힘을 다해 수고한 것이 여러 신하들 가운데 으뜸인데도 끝내 훈봉(勳封)되지 못하였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덕형이 호성공신에는 끼지 못하였으나 선무한 공으로 논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 하니, 이것이 정론(定論)이다.

1600년에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별세하자, 선조는 1602년에 영돈녕부사 김제남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선조는 50세, 인목황후(1584-1632)는 18세였다. 그런데 1606년에 인목왕후가 영창대군(1606-1614)을 낳자 세자 광해군의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유영경 등 소북은  세자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 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당쟁이 확대되었다. 선조는 내심 두 살밖에 안 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런데 1608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피바람이 일었다.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에 1609년에 죽였다.

1613년 4월에는 칠서의 옥이 일어났다. 조령에서 한 상인이 살해당하고 은자 수백 냥이 탈취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범인은 양반의 서자인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이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서자들이 여주 강가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정권 실세인 대북 이이첨 등은 이를 역모 사건으로 조작하였다.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 등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말하면 살려주겠다는 꾐에 빠져 거짓 자백을 하였다.    

이리하여 대북파들은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처형하라고 상소하였다. 영의정 이덕형은 좌의정 이항복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런데 좌의정 이항복은 역모에 연루된 정협을 등용한 일로 탄핵을 받아  6월에 노원으로 물러났다.  

영의정 이덕형은 홀로 광해군에게 영창대군 처형 대신 유배를 주청하였다. 7월 하순에 광해군은 이덕형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고 강화도로 위리안치하였다.

그런데 대북파들은 내친김에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 폐모까지 들고 일어났다. 이덕형 혼자 영창대군 처형과 폐모론을 한꺼번에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탄핵을 받아 8월에 삭탈관작 되어 운길산 밑 용진(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마을)으로 내려가 칩거했다.

이러함에도 대북파의 탄핵은 계속되었다. 한음은 식음을 전폐하고 찬 술만 마시다가  10월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53세였다. 이덕형의 부음이 들려오자 온 백성이 슬퍼하고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한음 이덕형. 그는 광해군 시대에 혼란한 정세를 만나 뜻이 꺾이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올곧은 성품의 명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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