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청백리가 된 사연은 참으로 기구하다. 1601년 10월에 류성룡은 이원익과 함께 청백리로 뽑혔다. 영의정 이항복이 그를 추천하였는데 “이는 미오(?塢)의 무고를 씻어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미오는 중국 섬서성에 있는 지명인데, <삼국지>에 나오는 후한의 간신 동탁이 그곳에 성을 쌓고 온갖 보화를 저장하였다.

 

북인들은 류성룡을 탄핵하면서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즉 “세 곳의 전장(田莊)이 미오(?塢)보다 더하다.”고 한 것이다. 1598년 11월19일에 이순신(1545~1598)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고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났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날 류성룡이 파직 당하였다.

류성룡의 파직은 1598년 6월 명나라 감찰관 정응태가 경리 양호를 탄핵한 것이 발단이었다. 양호가 1598년 1월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울산성 전투를 승전으로 허위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선조는 양호를 변호하고자 영의정 류성룡에게 명나라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류성룡의 입장은 분명했다. 양호의 탄핵은 명나라 내부의 문제일 뿐 조선이 개입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하자 선조는 좌의정 이원익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 일이 더 커지고 말았다. 정응태가 조선을 양호와 함께 싸잡아 탄핵한 것이다. 정응태는 조선이 양호와 부화뇌동하여 명나라 조정을 속이고 있고, 조선이 왜를 끌어들여 요동을 탈취하여 조선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선조는 아연실색하였다. 9월23일부터 선조는 명나라 황제 처분을 기다린다며 정사를 보지 않은 채 거적을 깔고 대죄하였다.

그런데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9월24일에 대북파의 실세 이이첨이 상소를 하였다. 그는 즉시 명나라에 변무 사신을 보낼 것을 주청하면서 류성룡이 사신으로 자청하지 않은 것을 탄핵하였다.

9월25일에 류성룡은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지 않았다. 북인은 계속 탄핵 상소를 냈고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간들의 상소는 더 격렬하였다. 상소 내용도 명나라 사신으로 안 간 죄에 멈추지 않고, 주화오국[主和誤國]이 추가되었다. 즉 류성룡이 일본과 화친을 주도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류성룡과 동문인 퇴계 이황의 제자 조목(趙穆 1524-1606)도 가담했다. 조목은 류성룡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선생이 평소 배운 것이 단지 ’화친을 주장하여 국사를 그르치는[主和誤國]‘ 네 글자뿐입니까? 나는 당신이 성현의 글을 알면서 이런데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10월16일)

같은 퇴계 동문도 이러했으니 북인은 류성룡 축출에 열을 올렸다. 북인들은 류성룡을 탄핵하면서 부정축재도 추가했다. 북인은 류성룡을 남송의 진회와 같이 나라를 망하게 한 간신, 삼국지의 동탁과 같은 부정축재자로 마녀사냥을 계속하였다. 통제사 이순신도 완도 고금도에서 류성룡의 논핵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시국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크게 탄식하였다.

10월 6일에 성균관 유생 정급 등이 연명하여 탄핵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의 상소는 영향력이 대단한 공론이었다. 사직 상소를 여러 번 올린 류성룡은 동문 밖으로 처소를 옮기고 선조의 처분을 기다렸다.

10월8일에 선조는 류성룡을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후임 영의정은 이원익이었다. 11월19일에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났다. 이 날 선조는 류성룡을 파직시켰다. 북인들의 탄핵을 빌미로 한 토사구팽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이를 개혁세력에 대한 수구세력의 반격으로 보기도 한다.

11월20일에 류성룡은 서울 도성을 떠났다. 22일에 류성룡은 삼각산을 바라보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다시는 서울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3천리인데               
벼슬살이의 깊은 은혜는 40년 동안이었네         
도미천에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종남산(남산의 다른 이름)빛은 여전히 그대로이네 

그런데 11월23일에 그는 급히 고향 집에 사람을 보내서 양식을 가져오게 하였다. 안동 내려 갈 노자(路資)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12월6일에 서애 류성룡은 삭탈관작 되었다. 그의 관직과 이름은 기록에서 아예 지워졌다.

1599년 2월 안동으로 내려 온 류성룡은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옥연정사에 있으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일체 사절했다. 경상감사 한준겸이 찾아오겠다고 전갈이 왔지만 류성룡은 사양하였다.

1600년 1월에 류성룡은 옥연정사에 소나무를 심었다. 5월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서애가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송죽의 절개를 되뇌고 싶어서였을까?

이즈음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 글을 썼다. 마침내 그는 1604년에 책을 탈고하였다. 책 이름도  당초에는 <난후잡록>이라 했는데 <징비록>으로 고쳤다. 7월에 서애는 <징비록> 서문을 직접 썼다. 여기에는 <징비록>을 쓴 사연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한편  1600년 11월에 선조는 류성룡의 직첩을 돌려주었고, 1601년 12월에는 서용(敍用)의 명이 내렸다. 그러나 류성룡은 조용히 물러나서 말년을 보내도록 하여 달라고 선조에게 청하였다. 두 번 다시 중앙정치에 나서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1601년 10월에 류성룡은 이원익과 함께 청백리로 뽑혔다. 영의정 이항복이 그가 부패 관리라는 무고를 씻어 주기 위해 추천하였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의 ‘서애청백’글에서 류성룡의 청렴함을 적고 있다. 이 글에는 서애의 문인 정경세가 서애의 아들 류진에게 써 준 시가 있다.

하회 마을 집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서책뿐이니     河上傳家只墨庄
자손들 나물밥도 채우기 어려워라                  兒孫蔬?不充?
십여 년 동안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도              如何將相三千日
후손에게 물려줄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도 없었던가. 倂欠成都八百桑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란 말은 촉한의 제갈공명이 임종 시 후손에게 남겨준 재산이 척박한 땅에 뽕나무 팔백 주란 데서 나온 말이다. 이어서 선조는 1604년 3월 관직을 복구하였으며, 7월에 호종공신 2등에 책봉하였다. 8월6일에  류성룡은 상소를 올려 공신록에서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는 선조로부터 내려 온 모든 것을 사양한 것이다.  

1607년 5월6일에 류성룡은 세상을 떠났다. 6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승지를 보내 조문하게 했고, 3일 동안 조시를 정지했다. 백성들도 슬퍼했다.

그랬다. 조선 백성들은 불쌍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채 안 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북쪽 오랑캐가 나라를 짓밟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고두례를 하였다. 징비(懲毖)를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 때 뿐이었을까.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게 망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못 이룬 꿈을 이룬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징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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