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이는 영의정(領議政)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조선시대 최고의 영의정은 누구일까? 단연코 황희(1363-1452) 정승이다. 세종시대를 연 그는 69세에 영의정이 되어 87세에 사임할 때 까지 무려 18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황희는 태종 시절에 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데 1418년에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황희는 국본을 쉽게 바꾼다며 반대하여 태종의 눈 밖에 났다. 그는 서인(庶人)이 되어 남원에 4년간 유배되었다.

1422년(세종4년) 2월에 황희는 유배가 풀렸다. 상왕 태종은 세종(1374-1450)에게 “황희의 지난 일은 덮어두라. 이 사람은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이다.

세종은 그 해 10월에 황희를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였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1423년에 강원도에 큰 흉년이 들었다. 세종은 그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강릉 대령산에 있는 죽실을 따서 밥을 만들어 먹도록 하고 성심으로 구황책을 마련하여 기근을 면하게 하였다. 나중에 관동 지방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울진에서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다 대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이름하고 비를 세웠다.

황희는 승승장구하여 1425년에 대사헌, 1426년에 우의정, 1427년 1월에 좌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1427년 6월17일에 좌의정 황희는 사위 서달이 신창현(지금의 아산시 온양읍)의 아전을 죽인 사건에 연루되어 우의정 맹사성, 형조 판서 서선과 함께 의금부에 갇혔다.

황희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신창현 출신인 맹사성에게 부탁을 하였고, 사건은 은폐 · 조작되어 서달의 종이 죄를 뒤집어썼다. 형조도 가담하였는데 형조판서 서선이 서달의 형이었다. 세종이 이 사건을 살피다가 사헌부에 재조사를 시켜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6월21일에 황희·맹사성은 파직을 당하였다. 그런데 세종은 7월 4일에 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에 복직시켰다. 7월15일에 대사헌 이맹균 등이 상소하여 문제를 삼았다. 그러자 세종은 “그대들의 말한 것이 옳다. 그러나 대신을 진용퇴출(進用退出)시키는 일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 말라.”하였다.

1년 뒤에 추문이 또 터졌다. 이번에는 뇌물 스캔들이었다. 1428년 6월 14일에 사헌부 집의 남지는 좌의정 황희가 동파 역리 박용의 아내 복덕(卜德)으로부터 말 한 필을 뇌물로 받고 박용을 비호하는 청탁성 편지 한 통을 써 주었고, 대제학 오승 · 도총제 권희달도 각각 말 한 필씩을 도총제 이순몽도 소 한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고 세종에게 아뢰었다.

이는 경기감사가 박용을 옥에 가두고 추국하는 것을 황희 등이 편지를 통하여 그의 죄를 가볍게 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을 사헌부가 알고 탄핵한 것이었다. 같은 날 황희는 누명을 썼다고 하면서 이를 조사해주길 세종에게 청하였다. 세종은 박용의 아내를 국문하라고 사헌부에 명하였다.

6월25일에 황희가 박용 등의 문제로 사직을 청하였다.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의 비답을 읽어보면 황희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두터웠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보상(輔相)은 중(重)하나니, 국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까닭이다. 인재를 얻기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경은 세상을 다스려 이끌 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도다. 모책(謀策)은 일만 가지 사무를 종합하기에 넉넉하고, 덕망은 모든 관료의 사표가 되기에 족하도다. 아버님(태종을 말함)이 신임하신 바이며, 과인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바로서, 정승되기를 명하였더니 진실로 온 나라의 첨시(瞻視)하는 바에 부응하였도다.”
                     
그런데 이 날의 실록 뒷부분에는 사신(史臣)의 평이 실려 있다.

황희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子)이었다. 김익정과 더불어 서로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는데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박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중략) 박용의 아내가 말[馬]을 뇌물로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일은 본래 허언(虛言)이 아니다. (세종실록 1428년 6월 25일 1번 째 기사)

황희의 부도덕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기록이다. 이러함에도 세종은 황희를 내치지 않고 좌의정으로 일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좌의정 황희는 1430년에 또 한 번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1년간 경기도 파주 반구정에서 근신하였다. 그는 말 1천여 마리 이상을 폐사케 하여 투옥된 제주도 감목관 태석균의 치죄(治罪)에 개입하여 사헌부에 선처를 부탁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1년 뒤인 1431년 9월에 세종은 69세의 황희를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화려한 복귀였다. 이후 황희는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1449년 87세로 그만 둘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으로 일했다.

영의정 황희의 국가 경영능력은 누구보다 탁월하였다. 그는 관후(寬厚)하고 침중(沈重)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부하고 중후한 자질과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또한 그는 노회한 대신들과 젊은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임금과의 거리를 좁히는 조정(調整)의 달인이었다.   

세종 말년에  세종은 궁궐 내에 불당을 차리고 불공을 드리곤 하였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나라였다. 조선의 기초를 세운 정도전은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배척하였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불교가 허무의 종교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세종 임금이 내불당을 차리자 조정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황희 역시 불당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황희가 중재자로 나섰다. 늙은 몸을 이끌고 젊은 집현전 학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개를 숙이면서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임금과 신하간의 갈등을 해소시켰다.
 
한편 황희는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은  재상으로 유명하다. 하인의 아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이가 황희에게 하소연을 하자 “네가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억울함을 호소하자 “네 말도 옳다”고 하였다. 이를 본 황희의 부인이 도대체 “둘 다 옳다고 하는 것이 맞느냐?”고 황희에게 따지자 “부인 말도 옳소”라고 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1436년에 세종은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도입했던 육조직할체계를 의정부 삼정승 중심의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었다. 황희·맹사성 등 삼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 대신 세종은 창조 업무에 몰두하여 1441년에 측우기 발명,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다.

1450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황희는 1452년(문종 2년)에 9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황희는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익성(翼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이 익(翼)이고 재상이 되어 종말까지 잘 마친 것이 성(成)이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가 반구정에서 갈매기를 벗 삼은  황희 정승. 남북을 가로 막은 임진강 철책선에서 조정의 달인 황희는 분단한국이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하기를 기원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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